"아, 참, 제임스가 있었지."
린드스트롬은 문가로 걸어가 역마차 안에 타고 있던 소년을 처음으로 주의 깊게 쳐다보았다.
칼은 애나에게 온 정신을 쏟느라 소년이 같이 타고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었다.
"제임스?"
린드스트롬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 온 사이처럼 스스럼없이소년의 이름을 불렀다.
"네."
제임스가 대답했다.
소년은 키 큰 사내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고 싶은 마음에 다시 대답했다.
"네, 선생님."
"왜 길에 서 있는 거지? 어서 들어와서 내 친구 모리셋에게 인사하라구."
기대하지 못한 환대에 깜짝 놀란 소년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제임스
와 애나는 여러모로 많이 닳아 있었다. 소년 역시 비참할 정도로 말라 있었고, 머리 색도 비
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주근깨가 없고 커다란 눈동자가 초록색이라는 것뿐이었다.
칼은 능숙하게 놀라움을 감추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가게 앞에 대 놓은 마차에 식료품을
실었다. 제임스와 애나는 가게 안을 둘러보다가 서로 시선이 마주치면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 예상 밖으로 태연한 칼의 태도에 둘은 오히려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제
임스가 있는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물건들을 마차로 옮기며 모리셋과 농담을 주고받았다.
마차에 짐을 다 싣고 나자, 칼은 안으로 들어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이젠 떠날 시간이라고
말했다. 애나는 그의 표정과 태도에 조금 전과는 달리 냉기가 흐르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 모리셋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 애나의 팔꿈치를 잡았다.
그의 억센 손아귀는 그녀에게 뭔가를 경고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예비 신랑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흡족한 마음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전달하고
있었다.
거짓말쟁이 신부
애나는 칼이 자신의 팔을 부러뜨릴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에게 보조를 맞추느라 애나는 종종걸음을 쳐야 했다.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끌려
오고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무시한 채 그는 큰 걸음으로 앞서 걸었다.
그리고 마차 좌석에 애나를 팽개치듯 올려놓았다. 그의 완고한 표정을 살짝 훔쳐 본 애나는
위가 심하게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팔꿈치와 어깨를 문지르며 그녀는 진작에 사실을 털
어놓을 것을 그랬다고 후회했다.
고삐를 잡고 말을 부리는 그의 목소리는 극도로 화를 참고 있는 것처럼 절제되어 있었다. 등
글게 구부러진 길을 지나 모리셋의 상점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마차가 갑작스럽게 멈춰
섰다. 낮고 느린 린드스트롬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다.
"조 모리셋 앞에서 당신과 말다툼을 하고 싶지는 않았소. 말많은 모리셋이 칼 린드스트롬을
놀려 대는 꼴은 참을 수가 없으니까. 하긴, 벌써 우스운 꼴이 되고 말았지만…… . 애나 레
어든, 당신은 나를 그렇게 멍청하고 호락호락한 사람으로 생각했소? 당신은 정직하지 않았어
, 내 친구 앞에서 이 칼 린드스트롬을 바보로 만들려고 했단 말이오!"
그녀는 두려움으로 어깨를 펼 수가 없었다.
"무…… 무슨 말이죠?"
낭패감을 느끼며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칼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무슨 말이냐고? 난 바보가 아니오!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은 말아요. 몇 달 동안이나 결혼
계획을 세우면서 당신은 한 번도 동생이 있다는 얘기를 편지에 쓰지 않았소. 그리고선 내게
깜짝 놀랄 선물을 들이민 거지 내 신부가 기대하지도 않았던 군식구를 달고 온다는 사실을
마지막 순간까지 몰랐다면,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멍청하다고 생각하겠소?"
"다…… 당신에게 미리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
"생각은 했었다고!"
그가 참지 못하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거짓말하지 말아요! 당신은 오래전부터 나를 속이려고 계획적으로 일을 꾸민 것이 틀림없소
. 칼 린드스트롬은 어리석은 스웨덴인이니까 속임수가 통할 줄 알았겠지!"
"아니에요,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먼저 말을 할까도 생각했지만, 당신이 제임스를 직접 보
고 나서 얼마나 도움이 될지 판단하도록 하는 게 좋겠다고 여겼어요. 제임스는 착하고 튼튼
한 아이예요. 아니, 거의 다 큰 청년이라구요!"
"제임스는 애송이에 불과해! 저앤 귀중한 음식과 옷을 축내는 군식구라고!"
"동생은 벌써 열세 살이에요. 1, 2년만 있으면 완전히 자랄 거구요. 그때가 되면, 나보다 두
배는 더 쓸모 있는 일꾼이 될 게 틀림없어요."
"일꾼을 구하려고 보스턴 신문에 광고를 낸 게 아니오. 난 아내를 원했소."
"그래서 내가 이렇게 왔잖아요."
"그래, 당신이 왔지. 동생을 달고서 말이오. 난 당신과 동생을 함께 거래하진 않았소."
"제임스는 훌륭한 일꾼이에요, 린드스트롬."
"여긴 보스턴이 아니오, 애나 레어든. 이곳에선 식구 하나가 늘면 먹여 살릴 입 하나가 더
늘어났다고 생각하지. 게다가 저앨 어디에다 재운단 말이오? 무슨 옷을 입히고? 다가오는 긴
겨울에 세 식구가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식량이 충분할까? 이곳에서 살아 남으려면 고려
해야 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오."
"바닥에서 자면 되죠. 한 해 겨울을 넘길 정도의 옷은 이미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여름 동
안 곡식을 더 심어서 수확하도록 도와드리면 되잖아요."
"씨를 뿌릴 시기는 이미 지났소. 게다가 나를 도와서 농사를 지을 사람은 당신 한 사람으로
도 족해요."
"물론 저도 돕겠어요. 하지만 세 사람이 함께 하면 얼마나 더 많은 농사를 지을 수 있을지
생각해 보세요. 당신도 할 일이 아주 많다고…… ."
"말했잖소, 씨앗은 벌써 다 뿌렸다고! 그리고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건 곡식이나 농사 따
위가 아니오. 중요한 건 당신이 나를 속였다는 사실이오. 이 사태를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할
지도…… . 난 거짓말쟁이를 아내로 맞을 생각은 없소."
애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 점에 대해서라면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이 없었다.
마차에 오른 뒤로 내내 잠자코 앉아 있던 제임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린드스트롬 씨, 우린 어쩔 수가 없었어요. 내 얘기를 했다간 당신이 결혼 계획을 포기하고
말 거라고 누나가 그랬어요."
당황한 제임스의 목소리는 테너에서 소프라노로 제멋대로 갈라졌다.
"잘 알고 있었군! 당연히 그랬을 테지 지금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오!"
애나는 공포감을 억누르며 있는 힘을 다해서 목소리를 쥐어 짰다. 창백한 얼굴로 그를 바라
보는 애나의 커다란 눈에는 벌써 물기가 어려있었다.
"설마…… 설마 우리를 돌려보내려 는 건 아니겠죠? 오, 제발…… 그러지 말아요."
"거짓말로 우리의 계약을 깨뜨린 사람은 바로 당신이오. 난 이제 더 이상 당신에 대해 책임
이 없소. 거짓말쟁이 신부를 얻기 위해서 거래를 한 것은 아니니까."
정의의 수호신처럼 당당하게 버티고 앉아서 독선적인 말투로 얘기하는 거대한 사내를 보고
있으려니 애나의 심사가 뒤틀렸다.
틀림없이 좋은 음식과 편안한 잠자리에 익숙해 있을 그의 편협함에 화가 났다.
"그래요, 당신은 굳이 이런 거래를 할 필요가 없었겠죠!"
허공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분노를 터뜨리는 애나의 목소리는 잔뜩 꼬여 있었다.
"따뜻하고 아늑한 집 안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었을 테니, 뭘 알겠어! 춥고 배고픈 심정이
어떤 건지 알기나 해요? 그런 지경에 부딪혀 보라구요, 칼 린드스트름 씨. 그런 힘겨운 인생
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약간의 거짓말 정도는 술술 나오게 된다는 것을 아마 당신도 알게
될 거예요. 보스턴에서라면, 정직한 사람들도 살아 남기 위해 쉽게 거짓말을 배우게 되죠."
"그래서 거짓말을 하는 게 습관이 되었단 말이오? 마치 자랑인 것처럼 얘기하는군?"
고집스럽게 앞만 바라보던 칼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분홍색으로 달아오른 애나의 뺨 위에 주
근깨가 도드라져 보였다.
"그래요, 자랑이에요."
애나도 지지 않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굶주리지 않으려고 거짓말을 했어요. 그래야 제임스를 먹여 살릴 수 있을 테니까요. 처음엔
정직하게 살려고 했었죠. 하지만 살 방도가 없었어요. 제대로 먹지 못해 비리비리한 제임스
를 고용하겠다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어요. 난 여자라는 이유로 무조건 거절당했구요. 결국엔
, 정직하게 살려고 하면 생존할 수조차 없다는 서글픈 현실을 깨닫게 되었죠. 이젠 조금 불
성실하게 살아보자, 그래서 어떻게 되나 한 번 보자, 그렇게 결심한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