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86)

제임스가 가게를 본 것 같다고 소리쳤다. 애나는 땀이 밴 손바닥을 드레스에 문질러 닦으며,

 혼혈 인디언 마부의 등뒤에 숨어서 앞을 내다보았다. 

"진짜로 보인다!"

제임스는 목을 길쭉하게 빼올리며 다시 외쳤다. 애나는 반사적으로 마차 안으로 몸을 숨겼다

"어떡하지?"

"누군가 가게 앞에 서 있어!"

제임스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갈라져 있었다. 

"그 사람 맞아? 그 사람인 것 같으냐구?"

애나가 안절부절 못하며 속삭였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 하지만 이쪽을 바라보고 있기는 해,"

"제임스, 나 괜찮니?"

그는 누나의 번쩍거리는 파란색 드레스를 쳐다보았다. 애당초부터 제임스는 누나의 옷이 마

음에 들지 않았다. 누구한테서 물려받았는지는 몰라도, 점잖치 못하게 가슴의 노출이 심하고

 너울이 많이 달린 야한 드레스였다. 애나가 아무리 얌전하게 보이려고 앞자락을 끄집어 올

려도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사실대로 얘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응, 예뻐, 누나."

"모자가 있으면 좋을 텐데…… ."

애나는 부풀어오른 곱슬 머리를 매만지며 안타깝게 중얼거렸다. 가지런하게 만들어 보겠다고

 손가락으로 벗어 내린 머리카락이 전보다 더 부풀어올랐다. 

"그 사람이 하나 사 줄지도 모르잖아? 저 남자도 모자를 쓰고있으니까 말야. 파이 접시처럼 

챙이 작고 우습게 생기긴 했어도…… ."

"다른 건, 다른 건 어때? 그 사람…… 어떻게 생겼니?"

"덩치가 아주 커. 그것 말고는 아직 모르겠어. 햇빛에 눈이 부셔서 잘 볼 수가 없어."

애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두 손을 맞대고 무릎 사이에 끼운 채, 몸을 앞뒤로 흔들며

 천천히 눈을 뜨고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떨리는 몸과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다

"확실히 볼 수 있게 되면, 어떻게 생겼는지 곧바로 얘기해 줘."

그녀의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었는지 인디언 마부 하나가 의아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다보았다

"당신은 마차나 몰아요!"

애나의 뽀로통한 말투에, 마부는 고개를 돌리고 앞을 쳐다보며 껄껄 웃었다. 

"이젠 다 보여! 우와, 정말로 거인이야. 하얀색 셔츠에 진한색 바지를 입고, 긴 장화를 신었

어"

"아니, 그런 것 말고, 얼굴을 보란 말이야! 어떻게 생겼는지!"

"에이, 아직 얼굴 까진 안 보여. 그러지 말고 누나가 직접 보지 그래 ?"

제임스는 더 이상 훔쳐보는 모습을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지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애나가 경고했다. 

"잊지마, 내가 먼저 그 사람에게 얘기할 기회를 잡기 전에는 절대 네가 누구인지 말해선 안 

돼."

그녀는 치맛자락의 먼지를 털어 내고 공연히 드레스를 매만졌다. 두근거리는 가슴에 떨리는 

손을 얹으며, 헐렁한 드레스의 가슴 부분에 집어 넣은 천 조각을 그가 눈치채지 않았으면 좋

겠다고 기도했다. 

제임스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가느다란 목에서 이제 겨우 생겨난 듯한 목젖이 꿈틀거렸다.

"행운을 빌어, 누나."

변성기에 들어선 동생의 목소리는 최근 들어 자주 그러는 것처럼 우스꽝스럽게 갈라졌다. 예

기치 않게 갈라지는 기이한 목소리에 두 남매는 언제나 웃음을 터뜨렸지만, 이번에는 애나도

 제임스도 침묵을 지켰다

마차가 점점 가까워지자 칼 린드스트롬은 갑자기 손을 어째야 좋을지 몰라 안절부절 못했다.

유별나게 크고 못생긴 자신의 손을 보면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할까? 그는 얼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편지가 손에 닿자 그는 그것이 마치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꼭 움켜 쥐었다. 

목구멍으로 침을 넘기는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이제는 마차에 올라앉은 마부 두

 명이 뚜렷하게 보였다. 그 뒤쪽으로 사람머리가 둘 보이는 것 같았다. 칼은 어느 쪽이 자신

의 신부감인지. 두 사람의 머리 색을 확인하느라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 

진정해, 칼! 다 큰 남자가 여자 하나 때문에 이렇게 안절부절못해서야 되겠어?

칼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켜 보려고 노력했지만, 좀처럼 달래기가 어려웠다. 

마차가 속력을 늦추더니 드디어 멈춰 섰다. 인디언들이 뛰어내려 말뚝에 고삐를 매는 것이 

보였다. 

굵직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좋은 계절에 오셨군요. 여행은 편안하셨소?"

듣기 좋은 남자의 목소리에서는 희미하게 스웨덴 억양이 느껴졌다. 

"그럭저럭 괜찮은 여행이었소."

마부 하나가 대답했다. 

천천히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마차뒤쪽으로 금발의 거인이 나타났다. 그를 처음 본 순간, 

애나는 온몸으로 그에게 미소를 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일 듯 말 듯 미소 짓는 그의 

얼굴에선 소년다운 머뭇거림이 느껴졌다. 굳은살이 박힌 커다란 손으로 챙이 좁은 모자를 들

어 올리자, 황금빛 밀밭을 연상시키는 금발머리칼이 탐스럽게 물결쳤다. 남자의 목젖이 한 

번 움직였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낡은 모자를 쥐어 짜며 서 있을 뿐이었다

. 그의 시선은 애나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애나도 혀가 굳어 버린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다. 

"당신이 애나요?"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따뜻한 음성으로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것을 듣자 애나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네, 제가 애나예요."

간신히 그녀가 대답했다. 

"나는 칼이오."

그는 시선을 들어 그녀의 머리칼을 바라보았다. 애나 역시 칼의 머리칼을 쳐다보았다. 

정말로 노란색이네.

그녀가 줄곧 상상해 온 대로였다. 아니, 실물을 눈앞에 보고 있으려니, 오히려 그녀의 상상

력이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나는 이토록 탐스럽고 아름다운 금발 머리를 가진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 숱이 많고 건강해 보이는 금발 머리칼이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는 얼

굴 주변과 목덜미에서 가볍게 곱슬거리고 있었다

참으로 풍부한 느낌이 드는 머리 색이군.

칼은 햇빛을 받아 광채를 뿜고 있는 그녀의 머리칼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낱낱이 일어선 곱슬머리가 탐스러웠다 스웨덴 식으로 단정하게 땋아 내린 

머리칼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었다. 

그의 집요한 시선에 불안해진 애나는 관자놀이 부근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비비 꼬기 시

작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이 주체할 수 없는 머리칼을 모자로 가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

았을까. 아쉬워했다. 그러다가 문득 남자의 눈길을 불편해하며 안절부절못하는 자신의 행동

을 의식한 애나는, 얼른 손을 내리고 두 손을 맞잡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 만났다. 미네소타의 하늘처럼 새파란 그의 눈동자와 애나의 진한 갈

색 눈동자가 동시에 빛을 발했다. 

칼은 그녀의 눈빛이 자신이 일군 비옥한 토지의 색깔과 닳았다고 생각했다. 그의 눈길이 애

나의 입으로 옮겨갔다. 칼은 윗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는 그녀의 입술이 어떤 모양인지 몹

시 궁금했다. 바로 그때, 그의 마음을 읽기라고 한 듯이 그녀가 행동을 멈추었다. 조그만 잎

사귀 모양의 사랑스러운 입술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미소 짓는 그녀의 입술이 보고 싶었기 때문에 칼은 먼저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가 마지못해 

서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애나는 잘생긴 그의 얼굴을 마주 보며 환하게 미소 지을 자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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