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숲 사랑/라빌 스펜서.
지루한 여행의 끝
애나 레어든은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짓을 저질렀다. 칼 린드스트롬과 결혼하겠다는 욕심으
로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한 것이다. 신부에게 미네소타까지 여행할 경비를 보내도록 유도하
기 위해서 그녀는 의도적으로 선량한 남자를 속였다. 장래의 신랑이 기다리고 있는 신부감은
, 스물다섯 살에 요리 솜씨가 뛰어나고 가사일에 능하며 농장일에도 호감을 가지고 있는 아
가씨였다. 물론, 순결한 신부를 바라고 있으리라. 더욱이, 신부가 군식구를 달고 도착하리라
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할 것이다.
애나가 거짓말을 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자신의 외모에 관한 것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모습을 솔직 담백하게 알려 주었다. 질 좋은 위스키를 연상시키는 적갈색 머리칼과 갈색 눈
동자를 가졌고, 아일랜드인 특유의 큰 키에 약간 말랐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치아도 모두 튼
튼하고, 주근깨가 조금 있다는 것까지, 봐줄 만한 얼굴은 되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애나의 편지에 수록된 나머지 내용은 모두 거짓이었다. 린드스트롬이라는 남자가 아
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그녀에게 여비를 보내 줘야 지긋지긋한 보스턴에서 탈출할 수 있었으
므로, 그녀의 편지는 허위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럴듯하게 터무니없는 내용으로 편지를 채우는 일은 애나에게도 쉽지만은 않았다. 세상 어
느 곳에도 기댈 구석이 없는 고아남매가 유일하게 매달릴 수 있는 희망은 그 방법뿐이었다
하지만, 어린 동생이 열심히 편지를 받아 적는 모습을 바라보며 애나 역시 양심의 가책을 느
꼈었다 자신이 지어낸 거짓말들을 떠올릴 때마다 그녀는 뱃속이 졸아드는 것 같은 통증을 느
꼈다. 칼 린드스트롬을 만나는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온 지금, 그녀의 불안감은 극에 달했고
전에 없이 속이 불편했다.
거대한호수의 얼음이 풀려 배를 띄울 수 있게 되면서 시작된 지루하고 긴 여행이 벌써 한 달
째였다. 서쪽을 향해 조금씩 다가갈수록 애나의 고통은 나날이 심해졌다. 애나와 그녀의 동
생 제임스는 6월 한 달을 온통 기차와 배 안에서 흔들리며 보냈다 보스턴에서 앨바니까지는
기차를 탔고, 버펄로까지는 좁은 강을 따라 운행하는 작은 짐배를 탔다. 그런 다음, 호수를
운항하는 증기선으로 갈아타고 시카고에 도착했다.
1854년에 만들어진 이 도시는, 저지대여서 그런지 부두에서 호텔까지 나무 판자를 깔아 놓은
넓은 도로 말고는 온통 진흙투성이였다. 진창인 도시를 벗어나자, 애나와 제임스는 줄곧 거
친 황야 속을 달리는 털털이 마차에 시달려야 했다.
역마차를 타고 인디애나 주의 갤리너에 도착하기까지 꼬박 1주일이 걸렸다. 극성스러운 모기
와 뜨거운 날씨에 시달리느라, 걸핏하면 출현하는 소몰이꾼들의 행렬이 피워 대는 먼지와 악
취로 인해 역마차에 탄 승객들은 모두 지칠 대로 지쳐 버렸다. 갤리너에서 또다시 증기선을
타고 세인트 폴에 도착한 두 남매는, 이번에는 세인트 앤터니 폴스까지 소몰이 트레일러의
신세를 져야했다.
번화한 보스턴과 비교하면, 그들이 지나온 토시의 행색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초라한 모습
이었다. 나뭇결이 그대로 드러난 조야한 건물에는 페인트칠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그나마
도시라고 이름을 내건 곳이 그런 지경인데, 장래의 남편감을 만나기로 되어 있는 롱 프레리
라는 작은 마을은 도대체 얼마나 더 형편없을까 걱정스러웠다.
꼬박 한 달 동안, 애나는 끝간 데 없는 대지나 뱃전을 스치는 물결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생
각에 잠기곤 했다. 그리고 자신의 셀 수도 없는 거짓말을 알아차린 순간 칼 린드스트롬이 어
떻게 반응할지, 두려움에 떨었다. 그녀는 신경이 있는 대로 곤두서다 못해 산산조각이 나는
것 같았다. 어쩌다가 이렇게 터무니없는 계획을 세웠는지,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오기 시작했
다.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탄로 날 거짓말은 우선 제임스에 대한 것이었다. 애나는 자신이 책임져
야 할 동생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장래의 남편감에게 단 한마디도 내비친 적이 없었다. 예비
신부가 어린 동생을 데리고 가야 한다는 사실을 털어놓았을 때, 그 남자가 어떤 반응을 보
일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애나가 속인 사실은 그녀의 나이였다. 칼 린드스트롬은 경험이 많고 성숙한 여성
을 원한다고 신문 광고에 밝혔었다. 자신이 실제의 나이대로 열일곱 살이라고 고백했다간,성
숙하기는 커녕 젖비린내가 난다고 생각할 것 같았다. 그래서 애나는 칼 린드스트롬과 동갑인
스물다섯 살이라고 자신의 나이를 속였다 스물다섯 살 정도면, 남자가 원하는 대로 개척지
에서 함께 가정을 꾸려 나갈 정도로 현실적인 경험이 많으리라고 나름대로 계산한 결과였다.
애나 레어든은 자신의 피부가 조금 쭈글거리고 눈가엔 보기 싫은 주름이 잡혀 있었으면 좋겠
다고, 그것도 아니면 허리에 두루뭉실 살집이라도 올라 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열일곱 살
보다 나이 들어 보일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좋았다. 그녀를 만나게 되면, 남자는 단번에 진
상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뭐라고 말할까? 동생을 데리고 당장 보스턴으로 꺼져 버리라고 할까? 그렇
지만 무슨 돈으로 돌아간단 말인가?
그들에겐 돌아갈 여비가 없었다.
린드스트롬이 우리 두 사람을 막막한 이 황야에 내팽개치고 가버리면 어쩌지?
애나는 린드스트롬 몰래 제임스를 미네소타로 데려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꼭 한 번 부정한
짓을 저질렀다. 동생의 여비를 마련해야 했던 것이다. 그 순간의 기억이 떠오르자 그녀는 몸
서리를 쳤고, 위에 경련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어! 절대로 하지 않을 거야!
애나와 동생의 안위는 이제 순전히 린드스트롬이라는 남자의 손아귀에 달려 있었다. 어쩌면
린드스트롬 역시 몇 가지 거짓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애나의 불편한 심사가
조금 누그러졌다. 그의 편지에 적혀 있던 내용이 모두 정말로 신뢰할 수 있는지는 두고 봐
야 알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집과 생활 형편, 그리고 농장을 가꾸겠다는 미래의
계획에 대해서 소상히 알려왔다. 그러나 애나가 걱정스러워하는 점은, 그가 자기 자신에 대
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달리 할말이 없을 정도로 평범한 사람이
기 때문이겠지만…… .
그가 보낸 편지의 내용은 시종 일관 그저 미네소타, 미네소타 타령이었다. 고향을 떠나와 정
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그래서 영어가 서투르다는 점에 대해 이해를 구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칼 린드스트롬은 개인의 신상에 대한 얘기 대신에 주로 개척지로의 이민과 정착을 독
려하는 신문 기사를 인용해서 적어 보냈다.
미네소타는 단순한 평지가 아닙니다. 이곳은 조금 거칠긴 해도, 어느 것 하나 부족할 게 없
는 풍족한 삶이 보장되어 있지요. 땔감은 물론 집을 지을 재료로 쓰일 만한 나무들도 많습니
다 근처의 숲속과 대평원에는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종류의 야생 열매들이 자라나고 있
습니다. 호수와 개울에는 물고기가 가득 헤엄쳐 다닙니다. 장엄한 숲과 비옥한 평원이 있고,
하늘 빛깔의 호수와 개울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과 아름다운 자연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칼이 편지에 묘사한 풍경은 그의 고향인 스웨덴의 모습과 아주 흡사했다. 갑작스런 인구의
증가로 인해 스웨덴에는 농사를 지을 땅이 모자랐다. 미네소타를 최적의 이민지로 소개하는
신문 기사에서 칼은 자신이 사랑하는 고향, 스칸과 너무도 흡사한 느낌을 받았고, 미네소타
가 자신을 향해 손짓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과감하게 대서양을 건넜다. 처음엔 그의 형제 자매들도 곧 뒤를 따라 대서양을
건널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지만, 형제 자매는 고사하고 그의 외로움을 달래 줄 만한 이웃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미네소타에 대한 칼의 설명을 제임스가 처음 읽어 주었을 때, 애나는 목가적인 시골 풍경을
확연히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칼 린드스트롬 자신에 대한 설명에는 굉장히 인색한 편이
었다.
스웨덴 출신이라는 점, 그리고 금발 머리에 푸른 눈동자를 가졌으며 몸집이 상당히 큰 편이
라고 설명한 것이 자기 소개의 전부였다. 자신의 외모에 대해서 그는 '우유를 게워 낼 정도
로 못생긴 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적었다.
제임스가 그 구절을 읽었을 때, 애나와 제임스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칼 린드스
트롬이라는 남자가 제법 유머 감각을 지닌 모양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와의 첫 상면이 가까
워질수록 애나는 제발 그가 유머 감각과 이해심이 많은 남자이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불안감을 떨쳐 버리기 위해 애나는 칼 린드스트롬이 어떤 남자 일까를 마음속에 그려보기 시
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