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하루하루가 그 자신의 존재를 시간 속에서 잊어가며 천천히 지나갔다. 태어난 곳으로 회귀하여 생명을 낳고, 죽으려 돌아가는 연어처럼 그녀도 자신이 태어나고 살았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뉴욕 주 북부의 조그만 마을.
그녀가 자라고, 라이를 만나 결혼했던 그곳으로 돌아갔다. 부모님이 남겨 주신 집은 낡은 채 휑하니 비어 있었고, 오랜 이웃사람들도 거의 유명을 달리하거나 이사를 가 버려서 그 조용한 거리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이 어느 집 아이들인지 그녀로선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곳은 여전히 그녀의 집이었다. 조그만 그 집에서 다시 기거하기 위해 그녀는 집 안을 정리하고 필요한 약간의 가구들을 사들여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치유의 마법을 행해 주기를 기다렸다.
처음에 그녀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고요했다. 배신과 상실감으로 그녀의 마음 자체가 마비되었기 때문이었다. 그와 같이 사는 것에 겨우 적응이 되었는데… 다시 혼자 지내는 밤의 보이지 않는 무게가 돌처럼 그녀를 짓눌렀다. 샐리는 날마다 그런 힘든 시간을 혼자 보내야 했다. 그녀는 전혀 생각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사실들을 똑바로 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러지 않았을까 또는 그랬더라면 하는 가정으로 자신을 미칠 것 같은 지경으로 몰아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마치 그가 죽어 버린 것처럼 지내기로 했다.
사실, 그것이 일어난 일의 전부일지도 몰랐다. 그녀는 마치 남편이 죽어 버린 것처럼 완전히 그를 잃어버렸다. 그녀의 삶은 완전히 비어 버렸고, 그녀는 홀로 남았다. 그는 그녀가 있는 곳에서 너무도 먼 유럽에 있었다. 그곳은 실상 또 다른 행성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자신이 혼자인 것도, 텅 빈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 날 그의 아기가 그녀의 뱃속에서 태동을 했고, 그녀는 그 조그맣게 꿈틀거리는 것 같은 느낌을 가만히 손으로 누르며 그녀의 몸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창조되는 것에 대한 경외감으로 감동했다. 라이의 아기, 그의 일부분. 다시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될지라도 이제 항상 그를 가까이서 느끼게 될 것이다. 그 생각은 찢어질 듯한 고통과 동시에 묘한 위안을 가져다주었다. 위협이며 약속이기도 했다.
마비된 느낌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어느 날 아침 새벽이 되기 전 아직 어둡고 고요한 시간에 깨어난 그녀는 자신이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아픔으로 온몸이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처음으로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베개에 얼굴을 통째로 묻고 흐느끼며 끝도 없이 그 날을 되새기면서,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녀의 잘못일까? 그녀의 무엇인가가 라이에게 그녀를 복종시키려는 도전이 되었고, 또 일단 그녀가 붙잡히자 관심을 잃어버리게 하는 걸까? 아니면 코럴이 말했듯이 그것이 라이의 본성일까? 그는 한 여자에게 도저히 충실할 수 없는 사람인 걸까? 그렇다면 그것은 중대한 인격적인 결함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라이의 성격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그를 설명하는데 여러 가지 말들 사용할 수 있었다. 오만하고, 쉽게 화를 내고, 고집스러웠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든 그 약점은 그의 본성에 속하지 않아 보였다. 그의 직업적인 고결함에 대해선 그녀 스스로 맹세를 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고결함은 단순히 한 분야에만 해당될 수 있는 품성이 아니었다. 고결함은 비록 그것이 그의 직업적인 분야에서 발휘된다고 해도 한 인간의 행동을 모든 면에서 관할하는 품성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의 바람기를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할 수 없다는 것이, 그리고 그런 질문을 자꾸 되새긴다는 것이 그녀의 마음을 온통 찢어 놓았다. 아기 때문에 그녀는 어떻게든 음식을 섭취해야 했지만 그녀는 점점 야위어가고 창백해졌다.
한밤중에 갑자기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베개는 온통 젖어 있었고, 너무 간절하게 라이가 곁에 있기를 원해서 도저히 잠을 다시 이룰 수가 없는 날이 계속되었다. 그런 때면 왜 자신이 바보처럼 도망을 쳤는지, 왜 코럴에게 쉽게 그녀의 자리를 양보했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 자리에 머무르지 못했지? 왜 그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지 못했지? 그가 바람을 펴서 그녀에게 상처를 입힌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를 사랑했고, 그의 곁에 그녀가 계속 머무른다고 해서 더 이상 아플 수도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가 옆에 있다는 위안이라도 있었을 테니까.
그리고 아기가 그녀의 뱃속에서 자라는 기적을 같이 체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이른 새벽 시간엔 때때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짐을 챙겨서 유럽에 있는 라이에게로 달려가자고 결심도 해보곤 했다. 하지만 아침이 되고 나면 코럴과 그녀가 임신한아기에 대한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그녀 자신이 그에게 가는 것을 라이가 원치 않을 수도 있었고 코럴이 그의 곁에 있을 수도 있었다. 코럴은 그녀보다 훨씬 화려하고 라이가 갖고 있는 사회적 지위에 잘 어울리는 여자였다.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편은 절대 아니었지만, 살아가면서 두 번째로 그녀는 자신감을 잃었다. 두 번 모두 라이 때문이었다. 첫 번째의 경우, 결국 그녀는 홀로서기를 배웠으며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열심히 달렸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뿐이었다. 그보다 복잡한 것은 전혀 계획도 할 수 없었다. 먹고, 씻고, 잠자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나른하고 힘없는 상태는 임신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저 순간순간을 살아가는 것 외엔 전혀 사는 것에 흥미를 잃고 연명해 나가는 것에 대한 충분한 이유나 변명이 될 수는 없었다.
늦가을로 접어들면서 점점 겨울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지자, 그녀는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크리스마스가 돌아올 때마다 그녀는 늘 혼자 보내야 했었다. 이번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근처의 잡화점에서 사온 트리 장식품으로 만든 크리스마스트리를 보면서 내년엔 정말 크리스마스다운 크리스마스를 보내리라 결심했다. 그때쯤이면 아기는 9개월쯤 되었을 것이고 반짝이는 눈동자로 주변의 모든 것들에 호기심을 보일 때일 것이다. 나무를 장식하고 트리 앞에 잔뜩 선물들을 늘어놓으면 기어 다니는 아기에게는 얼마나 매혹적일까?
모호한 계획이었지만 라이를 떠난 뒤 처음으로 세운 계획이었다. 아기를 위해서 그녀는 우울한 침체 상태에서 벗어나야 했다. 또 그녀에게는 원고가 있었다. 에이전트에게 연락해서 출판에 대해 상의도 해야 하고, 다음 번 원고에 대한 작업을 시작하기도 해야 했다. 아기를 양육할 방법을 마련해야 했다. 라이는 무엇보다도 아기의 양육권 소유를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하지 않을 거라고 굳게 결심했다. 라이는 다른 아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겐 이 아기가 유일했다 절대로 자신의 아기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크리스마스 2주 전에야 겨우 결심이 선 샐리는 바바라 호프웰의 사무실에 전화를 했다. 격식을 차린 딱딱한 말투로 전화를 받은 바바라가 미처 입을 열기 전에 출판사를 찾는 일에 진전이 있었는지를 물었다.
"베인즈 부인!"
바바라가 비명을 지르듯 말했다.
"어디 있어요? 베인즈 씨는 거의 미칠 지경이 되었어요. 유럽에서 찍는 필름을 완성해야 하는데도, 쉬는 시간이면 늘 당신을 찾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다시 미국으로 오고 있단 말예요! 시내에 있는 거예요?"
"아뇨."
샐리가 대답했다. 라이가 그녀를 얼마나 힘들게 찾고 있는지를 듣고 싶지 않았다. 이상한 생각이었지만 그녀가 임신하고 있는 아기를 찾기 위해서라도 그녀를 찾으려는 노력을 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디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봐요. 상관없으시다면 제 원고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싶습니다. 출판하겠다는 곳을 아직 찾지 못했나요?"
"하지만…"
말을 꺼내려다 만 바바라는 마음을 바꿨다. 그리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아주 열렬히 관심을 보이는 출판사를 찾았어요. 베인즈 부인, 일정을 잡기 위해서라도 한 번 만나야 하는데요. 세부적인 계약 사항도 점검하셔야 하고요. 언제로 약속을 잡을까요?"
"뉴욕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당신이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상관없어요. 한번 만나뵐 수 있으면 좋겠어요. 시간하고 장소만 말씀해 주세요."
샐리는 망설였다. 지금 숨어 있는 이곳을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다른 장소에서 에이전트를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시간 계산을 해 보니 라이는 아직 한 달은 더 유럽에서 다큐멘터리를 찍어야 했다. 바바라는 라이가 시간이 날 때마다 뉴욕으로 돌아오곤 한다지만, 촬영 일정이 얼마나 빡빡하게 짜여 져 있는지를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바바라가 그에게 연락을 한다고 해도 일순간 모든 것을 팽개치고 달려올 수는 없을 것이다.
"알았어요."
그녀는 내키지 않았지만 동의하고 바바라에게 주소를 알려 주었다. 목요일에 바바라가 그녀가 살고 있는 집으로 방문하기로 약속을 정했다. 바로 이틀 뒤의 일이라 샐리는 라이가 그녀가 숨어 있는 곳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라 더욱 확신했다. 바바라를 만나면 절대로 라이에게 말하지 말라는 약속을 받을 참이었다. 전화로 그런 부탁을 하지 않은 것은 바바라의 사무실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듣거나 아는 게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 날 밤 그녀는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녀가 쉴 수 있는 유일한 곳을 드러내는 실수를 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언제나처럼 라이가 그녀보다 한 발자국 앞서 있다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긴장이 되어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가정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전화를 했던 때에 라이가 만일 뉴욕에 있었다면? 아니 그보다도 그녀가 전화했을 때 바바라의 사무실에 있어서 지금 이 곳으로 향하고 있다면? 아침에 일어나서 현관에 당도한 그를 보게 된다면? 무슨 말을 그에게 할지? 무슨 할 말이 있을지?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자 그녀는 눈앞에 떠오른 라이의 얼굴을 지우려 눈을 감았다. 아픔이 날카롭게 그녀의 가슴을 찌를 듯 찾아들자 그녀는 옆으로 누워 큰소리로 흐느꼈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삼켜 보려고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이렇게 사랑하는데…"
그녀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 그 사실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에게서 떨어져 있는 매일이 영원처럼 길게만 느껴졌다. 갑자기 혼자 있는 외로움에 지쳐 버린 샐리는 자신이 그에게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의 강인한정신과 육체, 그의 존재가 주는 안정감이 그리웠다. 그의 사랑을 가질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가 그리웠다 그들의 아기를 낳을 때 그가 옆에서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으면 싶었다. 그의 다른 아기들도 갖고 싶었다. 코럴과 코럴이 임신하고 있을 다른 아기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라이에 대한 사랑이 분노마저 덮어 버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를 필요로 하는 자신을 깨달았다. 그와 계속 살기를 원한다면 있는 그대로의 그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새벽이 올 때쯤에야 겨우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몇 시간 후 잠에서 깨어 밖을 봤을 때, 밖에는 차가운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잿빛을 떤 하늘은 어둠침침했고 거리엔 인적도 끊어져 사람의 그림자도 없었다. 아직 겨울이 온 것은 아니었지만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해서,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는 나무들이 늘고 있었다. 일어나서 할 일도 없었지만 그녀는 다음 번 책을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이번 책은 좀 더 어려운 작업이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처음 책은 부분적으로 자신의 경험에 바탕을 둔 것이 많아 상대적으로 쉬웠다. 하지만 이번 책은 전적으로 그녀의 상상에 기반을 둔 내용이 될 것이다.
오후에 접어들며 비는 그쳤지만 기온이 뚝 떨어졌고 W의 기상 캐스터 말로는 다시 저녁부터 비가 내릴 것이고 기온하강에 따라 그 비는 새벽이 되면 눈으로 변할 것이라고 했다. 샐리는 화면 속의 기상캐스터를 향해 인상을 썼다. 도로 사정이 악화되면 바바라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될 테고 자신은 음울할 정도로 실망할 것이다. 주변 세상에 대한 그녀의 관심이 다시 돌아오면서 그녀는 다시 살아가는 일에 대해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실내에서 한 시간 정도 서성거리다 보니 너무 지겨워진 나머지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밖은 춥고 축축했지만 속보로 걷는 것이 머릿속에 잔뜩 낀 거미줄을 제거해 줄 것 같았다. 게다가 산책 후 피로는 그 날 밤 숙면을 가능하게 할지도 몰랐다. 그 뿐 아니라 규칙적인 운동을 하라고 했던 것은 의사라고 그녀는 자기합리화를 했다. 산책이야말로 모든 것의 해답 같았다.
몸을 따스하게 둘둘 감싸고 무릎까지 오는 부츠를 신고머리엔 귀까지 덮이는 검은 모피 모자를 둘러썼다. 두터운 코트를 단단히 챙겨 입고 머플러로 목을 감싼 채 얼어붙을 듯 차가운 밖으로 나가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점차 빨라지는 움직임에 따라 몸이 따뜻해지기 시작했고 그녀는 인적이 드문 거리를 혼자 만끽했다. 거의 해질 무렵이라 꾸물거리는 하늘은 더욱 어둡게만 보였다 나무에서 거리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와 거리에 울려 퍼지는 그녀의 부츠 소리가 전부였다. 그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몸을 떨었다.
단순한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따뜻한 집 안에서 편하고 안전하게 있을 수 있는데 왜 바보처럼 이렇게 추운데 나와서 걷고 있을까? 그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면서 왜 라이에게서 도망을 쳤을까? 어리석으니까. 그녀는 자신을 스스로 나무라면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리석고, 또 어리석고, 또 어리석었다. 게다가 자존심마저도 없었다. 코럴에게 거저 가지라고 자신의 성역을 내어 주다니 아마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바보일 것이다! 날씨가 괜찮아지는 대로 곧장 유럽을 향해 떠날 것이다. 만일 코럴이 라이와 함께 있다면 그녀는 그 잘난 여자의 금발을 모두 다 뽑아 놓으리라고 결심했다. 라이도 온전히 가만두지는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는 샐리의 눈에서 전투 의지가 반짝였다. 그에게 해 줄 말은 많고 많았지만 그래도 그를 지킬 작정이었다. 어찌되었건 간에 그와 별거하고 있던 7년의 세월이 그녀에게 가르쳐 준 것은 라이가 그녀에겐 유일한 남자라는 사실이 아니었던가? 더욱 빨리 걸음을 옮기면서 그녀는 모퉁이를 돌아 집이 보이는 곳으로 나왔다.
자신의 계획에 깊이 몰두한 나머지처음엔 집 앞에 택시가 서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운전사에게 돈을 지불하는 키 큰 남자를 보고서야 그녀의 시선이 택시에 머물렀다. 그녀는 걸음을 그대로 멈추었고, 검은 머리의 그 남자를 본 순간 그녀의 심장이 멈췄다. 택시가 빨간 미등을 깜빡이며 빠져 나가기 시작해도 그 남자는 여행 가방을 젖은 인도에 놓은 채, 마치 최면에라도 걸린 듯 뚫어지게 집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집엔 전혀 불이 켜져 있지 않아서 마치 빈 것처럼 보였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갑자기 가슴이 너무 아팠다. 집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할까?
"라이"
그녀는 속삭이며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부츠 소리가 그의 주의를 끌었고 그의 머리가 마치 야생동물이 위험을 감지한 듯 재빠르게 돌아갔다. 그는 잠시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못했지만 곧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언제나처럼 그는 변함이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미소를 짓지 않기 위해서 꽤 치열한 노력이 필요했다. 그 남자에겐 자기 회의 같은 것은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잘못되었을 때도 그 남자는 자신만만했다. 그가 점점 다가와서 둘 사이에 1미터쯤 거리를 두고 멈춰 섰을 때 그녀는 고통스런 신음을 흘리지 않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야윈 얼굴에 고통의 흔적이 너무도 선명했다. 강철 같은 눈동자가 빛나고 있는 눈 밑은 검게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고 입가에는 전에 없던 주름이 보였다. 그는 더할 수 없이 피곤해 보였다. 음울한 그의 얼굴 표정이 온통 피로를 호소하고 있었다. 체중이 많이 줄었는지 광대뼈가 지나치게 도드라져 보였다. 그는 코트의 주머니에 손을 깊이 찔러 넣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 없는 눈이 그녀의 작고 섬세한 얼굴과 코트 밑으로 동그랗게 부푼 배를 살폈다. 샐리는 몸을 던져 그의 품에 안기고 싶은 열망으로 덜덜 떨렸지만 그의 팔은 그녀를 향해 열려 있지 않았고 그녀는 그가 그를 원하지 않을 거라는 갑작스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렇다면 그는 왜 여기에 와 있는 건지?
"그녀가 거짓말을 했어"
그가 건조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전보다 더욱 거칠어져 쇳소리가 났다. 다음 말을 내뱉는 그의 입술은 크게 열리지도 않았지만 그는 토해내듯 말을 이었다.
"샐리, 당신이 없으면 죽을 것 같아. 제발 내게로 돌아와 줘."
믿을 수 없는 기쁨이 그녀의 혈관 속에서 치솟았다. 그녀는 일순 자신을 다잡기 위해서 눈을 감아야 했다.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고 표정 없던 눈빛엔 절망적인 애원의 빛이 가득했다. 그의 입술은 마치 최악의 답을 기대하는 듯 굳게 닫혀 있었다.
"돌아가려 했어요."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그녀의 음성은 기쁨으로 떨리기까지 했다.
"날씨가 괜찮아지는 대로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려고 막 결심을 했었어요."
그의 전신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내어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녀도 그에게 막 걸음을 옮겼고, 그의 강한 팔이 그녀를 숨도 쉬지 못할 정도의 강한 힘으로 안았다. 그녀는 팔을 그의 목에 돌리고 행복의 눈물을 흘리면서 절실하게 그에게 매달렸다. 그녀의 입술을 한숨에 삼킬 듯 빨아들인 그는 그들이 마침내 함께하게 된 것을 확인이라도 하듯 더욱 깊이 그녀의 입술에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완전히 땅에서 들어 올려 키스를 하며 천천히 그녀를 빙빙 돌렸다. 어느 순간인가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쏟아져 내리는 비를 올려다 볼 즈음에 그들은 완전히 젖어 있었다. 샐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바보 같아요!"
그녀가 소리쳤다.
"빗속에서 이렇게 서 있지 말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게 어때요?"
"당신, 감기 걸리면 안 될 텐데"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듯 라이가 그녀를 내려놓고 인도에 놓인 가방을 집어 들었다.
"어서 들어가서 몸을 말린 후에 이야기를 하지"
그는 그녀가 먼저 뜨거운 물로 목욕하라고 고집을 부린 뒤 자신도 마른 옷으로 갈아입었다 욕실에서 샐리가 나왔을 때 라이는 뜨거운 커피를 끓여 놓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컵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음, 너무 좋아요."
뜨거운 커피를 마시자 뜨거운 샤워를 한 뒤에 더워지기 시작한 몸이 뼛속까지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라이는 테이블 곁의 의자에 앉아 목 뒤를 손으로 주물렀다.
"깨어 있으려면 커피가 필요했어."
그가 지친 듯 말했다. 샐리가 바라본 그의 얼굴은 피곤에 절어 있었다. 심장이 고통스럽게 욱신거렸다.
"미안해요."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그는 피로를 떨치려는 듯 손을 이리저리 저었고, 그들 사이에 침묵이 길어졌다. 마치 다시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개인적인 감정을 말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는 듯했다. 샐리는 컵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크리스가 떠났어."
라이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갑자기 말했다. 그녀의 머리가 획 올라갔다.
"떠났다고요?"
그녀가 멍하니 그의 말을 되풀이했다.
"사직했어. 그렉이 내게 말해 줬어. 빌어먹을, 언제 일인지도 모르겠어. 모든 것이 다 헝클어진 영상 같아. 하지만 그는 사직했고, 다른 도시로 이사 간다고 했다더군."
잠시 샐리는 크리스와 에이미가 합쳤기를 희망해 봤다. 가정에 안주하기 위해 사표를 썼다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크리스의 경우에 일이 그렇게 풀린 것 같지는 않았다. 자신도 라이를 거의 영원히 잃어버릴 뻔했던 것을 생각하자 살이 베 인 것처럼 아팠다. 서둘러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는 화제를 바꿔다.
"바바라가 전화해 준 거예요?"
"즉시"
그가 인정했다.
"이번 일로 그녀에게 진짜 신세를 졌어. 뉴욕에 첫 비행기로 오느라고 일정은 온통 엉망으로 얽히고 말았지. 어쨌든 모두들 내가 미쳐가고 있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잠시 쉴 시간이라도 생기면 작은 개천 건너듯 대서양을 왕복을 했으니… 진짜 미쳐 버리는 줄 알았어."
그가 음울하게 인정했다.
"당신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고, 잘 있는지도 모르겠고. 그 악랄한 계집이 한 이야기를 믿고 떠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허먼 부인이 코럴이 이야기한 것을 전해 주던가요?"
코럴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제대로 라이에게 전해졌는지가 궁금해서 샐리가 물었다. 희망이 거품처럼 부풀어 올랐다. 코럴이 거짓말을 했다고 그가 말했다. 죄를 지은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지도 않았다.
"단어 하나,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말이지. 폭포처럼 눈물을 쏟아내며 말하더군."
라이가 으르렁거렸다. 그는 갑자기 손을 뻗어 샐리의 손을 잡아 그의 손 안에 가뒀다.
"그녀가 거짓말을 한 거야"
그가 다시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더욱 낮고 거칠게 변했다.
"정말 그 사실을 믿어 줘야 해. 코럴이 임신을 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절대로 아버지가 아니야. 맹세할 수 있어. 그녀와 섹스를 해 본 적이 전혀 없었으니까. 비록 일을 만들려고 유혹하거나 몸을 던지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절대로 그녀와 섹스를 한 적은 없어"
그의 말은 그녀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는 진실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믿을 수 없어서 반문했다.
"정말 해 본 적이 없어요? 절대로?"
그의 뺨이 붉어졌다.
"응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렸는지도 모르겠어. 그녀와 잠자리하는 것에 내가 전혀 흥미가 없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나 봐. 내가 결혼한 유부남이고 내 아내 외의 여자에게 전혀 끌리지 않는다고 말해도 믿지를 않더라고."
그가 그녀를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샐리는 그의 시선을 받고 얼굴을 붉혔다. 그의 손이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쥐었다.
"당신을 그래서 더 미워했던 것 같아"
그가 계속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그녀를 거절한 것과 그녀보다 당신을 좋아한다는 것, 그런 것들을 이유로 우리 사이를 갈라놓고 당신에게 상처를 주려고 했었나 봐. 어쩌면 당신에게 그렇게까지 하지 않을 계획이었을 거야. 적어도 처음에 집에 왔을 때는 말이야. 그리고 정말 아기를 임신했다면 아마 낙태 비용을 달라고 왔었을 거야. 알겠지만, 모델에게 임신은 독약과도 같이 치명적이지. 그리고 코럴이 아이를 좋아하는 타입도 아니고"
샐리는 헉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라이, 정말 돈을 주려는 건가요?"
"아니"
그가 진심으로 부정했다.
"그때, 허먼 부인이 그녀가 한 일을 이야기해 줬을 때는 아예 코럴을 죽여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어."
"하지만… 코럴은 돈을 많이 버는 일류 모델 아닌가요?"
"세상이 하는 말을 다 믿지는 말아."
그가 중얼거렸다.
"너무 사치스럽게 살았어. 그리고 라스베가스에서 꽤 돈을 잃었고… 도박을 좋아하지만, 잘하지도 못하고, 운도 없지"
그가 차갑게 말했다.
"하지만 그 여자에게 흥미가 없다면 왜 그녀와 데이트를 했어요?"
샐리가 물었다. 그거야말로 라이가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 중에서 가장 큰 모순처럼 보였다. 그와 코럴은 늘 가십 란에 오르내리는 한 쌍이었다. 그리고 단순히 손만 잡고 다렸다고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왜냐면 그 여자를 좋아했어."
그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샐리, 내가 바람피우지 않았다는 증거를 요구하지는 마. 사실 그것은 증명해 줄 수 없는 것이야. 하지만 코럴은 절대로 나의 정부였던 적이 없어. 당신을 다시 만나기 전에도 결코 아니었어."
"당신 말을 무조건 신뢰하라는 말인가요?"
샐리가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바로 그거야."
그도 딱딱하게 대답했다.
"당신이 다른 남자들과 관계가 없었다는 것을 내가 그냥 믿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당신도 증명할 수는 없잖아."
샐리는 식탁보를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리곤 그가 잡고 있지 않은 손으로 식탁보의 무의를 문질렀다.
"다른 남자에겐 전혀 흥미가 안 생기더군요."
그에게 사적인 비밀을 드러내는 것 같은 기분에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인정했다.
"데이트도 해 본 적이 없었죠."
"그리고 당신이야말로 내가 8년 동안 유일하게 관계를 가진 여자라면 믿겠어?"
그가 성마른 목소리로 다소 짜증스럽게 대답하며 그녀의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좁은 주방 안을 불안하게 서성댔다.
"내가 바보 같이 느껴지더군. 왜 어린 토끼 새끼 같은 당신이 그렇게 내게 깊은 낙인을 남겼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았어. 내 일에 관한 문제로 다른 여자들이 당신처럼 징징거리고 괴롭혔다면, 아마 그 자리에서 끝장을 냈을 거야. 하지만 당신에게 나는 계속 돌아갔었지. 당신이 어서 빨리 자라서 내가 일을 필요로 하는 남자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말이야. 당신도 흥분과 위험에 중독된 것 같다고 했지. 바로 나도 똑같은 케이스지. 위험에 중독된 마니아"
말을 잠시 멈췄던 그가 불현듯 말했다.
"당신을 영원히 떠나려는 생각은 없었어. 그냥 당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지. 내게 돌아와 달라고 당신이 애걸할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더군. 마치 내가 전혀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당신 삶을 계속해 나갔지. 내가 생활비로 보내는 돈까지도 거절하고 말이야. 일에 미쳐서 살았지. 당신을 잊어 주겠다고 스스로에게 맹세했어. 때론 거의 그랬지. 다른 여자들과 함께 있는 것을 즐기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상황이 복잡해져서 끝까지 갈 상태가 되면… 그냥 그럴 수가 없더라고. 그게 너무 화가 났어. 하지만 늘 우리들의 관계를 기억하면 절대로 그저 괜찮은 정도로는 참을 수가 없었지."
샐리는 벼락에라도 맞은 듯 깜짝 놀라서 그를 바라봤고 그는 그녀가 뭔가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처럼 그녀를 쏘아봤다.
"돈은 많이 벌었지."
그가 목소리는 난폭하게 느껴질 정도로 거칠었다.
"정말 돈을 많이 벌었어. 주식을 샀는데 갑자기 부자가 되어 있더군. 이야기를 끌어내기 위해 사람들에게 곤란을 자처할 필요도 없고, 총알에 맞아 부상을 당하게 되자 위험에 스릴을 느끼는 것도 반감이 되더군. 매일 밤 같은 침대에서 잠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그리고 그 침대에 여자랑 같이 누워야 한다면 그 여자는 당신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지. 그래서 잡지사를 사들이고 당신을 찾으려고 했는데, 당신은 살던 집을 오래 전에 떠났다고 하더군. 당신이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
"나를 찾으려고 했었어요?"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긴 시간 동안 라이도 그녀를 완전히 잊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 이번에는 요? 이번에도 나를 찾으려고 했나요?"
"당신을 찾는 것이 이젠 거의 버릇이 된 것 같아"
그가 농담하듯 말했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심각했다.
"이곳을 찾아볼 생각은 정말 못 했는데. 당신이 기자로서 재취업을 하지 않았나 싶어서 주요 일간지며 잡지들을 찾아보았지. 일이 없어서 지겨워 죽겠다고 하도 여러 번 불평을 해대서 당신이 다시 일로 돌아갔을 거라고 생각했어."
"지겨울 거라고 생각했었죠."
그녀가 인정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어요. 작업할 원고도 있었고 무엇보다 당신이 곁에 있었으니까."
그의 얼굴이 이상할 정도로 밝아졌다.
"아… 당신은 정말 굉장한 싸움꾼이야. 그거 알아?"
그가 조롱하듯 말했다. 그는 장난기 없는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이길 리가 없어요."
그녀가 부정했다.
"당신 잡지사에서 일했잖아요. 당신이야말로 모든 에이스 카드를 쥔 셈이었죠."
"그렇게 말하지 마."
그가 거칠게 말했다.
"그 길게 땋은 머리가 그 작고 귀여운 엉덩이 위로 흔들릴 때마다 거기를 한 대씩 차이는 것 같았다고. 당신 얼굴을 보지도 못한 상태에서부터 당신을 원했어. 내가 막 아내를 찾으려고 결심을 했는데, 그때서야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다니 참 악랄한 농담이라고 생각했어. 몇 번 제대로도 아니고 흘깃 스치듯 봤어도 나는 당신을 갖고 싶었지. 그리고 복도에서 당신과 마주치고 당신의 정체를 알아버렸지. 꼬마 요정 같았던 아내가 마녀처럼 매혹적인 여자로 변했더라고. 그 커다란 눈을 빼고는 도저히 알아볼 수 없게 변해 버린 여자가 바로 내 아내였어. 게다가 내게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을 단도직입적으로 표현하더군. 8년을 다른 여자를 돌아볼 수도 없게 내 감각에 낙인을 찍고선 내게 관심이 없다고 했지!"
"물론 관심이 있었죠!"
그녀가 끼어들며 그를 마주 보기 위해 일어섰다. 긴장으로 몸이 떨렸지만 그가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계속 믿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당신에게 또다시 나에게 상처 줄 기회를 주긴 싫었어요. 당신이 나를 처음에 버리고 떠났을 때, 나는 거의 죽을 뻔했어요. 나는 내 자신을 보호하려고 했을 뿐이에요. 도저히 견디지 못할 것을 알았고, 당신에게서 나를 보호해야 했어요. 자신에게조차도 당신에 대한 감정은 완전히 극복했다고 믿게 만들었죠. 하지만 소용없었어요."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을 끝내곤 바닥의 타일을 내려다봤다. 그는 깊이 떨리는 숨을 들이쉬었다. "유유상종이 라더니…"
그는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우리는 마치 야생의 동물들처럼 조심성이 많고 독립적이야.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하지. 고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샐리, 나는 진짜 변했어. 이제 철이 들었다고 해야 하나… 흥분을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더욱 당신이 필요해. 아, 말로 표현하기가 정말 힘들군."
그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상처 입을 지도 모르는데 자신의 마음을 여는 것은 어려운 일일 거야. 사랑은 사람을 약하게 만들고,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인정하는 것엔 깊은 신뢰가 우선되어야 하지 왜 다른 사람들은 되돌아오지 않을 사랑을 숨기기 위해 노력하는 거지? 난 당신을 사랑해. 당신은 나를 갈기갈기 찢기도 하고, 그야말로 나를 완전히 잃을 수 있게도 해. 그리고 어디선가는 믿음이 시작되어야 해. 사라, 내가 먼저 행동하게 해 줘 당신을 사랑해."
'사라' 라고 부르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오랜 시간동안의 외로움과 고통이 밀려 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을 들어 그를 마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을 언제나 사랑했어요. 너무 상처받아서 도망을 쳤죠. 악의에 찬 코럴의 말 때문에 나는 거의 정신을 잃을 뻔했어요. 하지만 당신을 보내기엔 내가 너무 당신을 사랑해요. 이제 그 사실을 인정하겠어요. 당신을 그녀에게 보낼 수는 없었어요. 라이 베인즈, 당신을 쫓아가는 중이었다고요. 당신의 충실한 파수꾼이 되겠어요!"
"제발 계속해 줘."
그가 더욱 그녀를 꼭 껴안으며 말했다. 샐리는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고 그의 팔이 단단히 그녀를 안는 것이 느껴졌다. 눈물을 멈출 수가 없어서 그의 목에 대고 그대로 울어야 했다. 눈물은 눈에서부터 뺨으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다. 그의 키스는 굶주린 듯 난폭했고 손도 그녀의 가볍게 부푼 배 위를 서성였다. 욕망이 그녀의 안에서 활활 타올랐다. 그는 그녀를 안아 올려 침실로 향했다. 그 침실은 순결한 신부였던 샐리를 라이가 처음으로 데려갔던 장소였고, 순진했던 그녀를 황홀한 감각으로 인도해서 사랑해 주었던 곳이었다. 그때와 똑같은 부드러움으로 그는 그녀를 안았다. 그는 부드럽지만 열정적이었고, 그녀는 수줍음을 던져 버리고 그에게 반응을 보였다. 욕망의 불길이 어느 정도 잦아들자 그녀는 졸린 듯이 침대의 엉킨 시트 속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그의 검은 머리칼은 그녀의 어깨에 찰싹 붙은 채 그녀를 압박했고 그의 입술은 졸린 듯이 그녀의 부푼 가슴을 입으로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몸을 어루만졌다.
"괜찮아? 이렇게 사랑을 나누어도 아기에겐 별 탈이 없을까?"
"괜찮아요."
그녀가 그를 안심시키고 그의 목 주변에 있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아무리 그를 만져도 전혀 질리지가않았다. 그의 곁에 누워 있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그는 고된 여행과 뜨거운 사랑의 행위 뒤에 완전히 지쳐 떨어졌다. 그는 거의 잠이 들었으면서도 졸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을 묶어 두고 싶은 생각은 없어 그저 매일 밤 내 곁으로 날아오기만 하면 돼."
"당신의 사랑이 나를 묶어 두지는 못할 거예요"
그녀가 그의 이마에 키스하며 대답했다. 말을 해 놓고 나서야 자신도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독립적인 생활이 사라질 것이 두려웠던 그녀의 걱정은? 하지만 솔직히 그녀가 두려워한 것은 고립된 생활이라기보다는 다시 상처받는 것이었다. 라이의 사랑은 더욱 높은 곳으로 도약하기 위한 받침대이자 도약대가 되었다. 그 높은 곳은 그녀가 한 번도 전에 도달해 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안심이 된 그녀는 더욱 충만한 자유를 느꼈다. 그는 그녀를 붙잡아 두지 않았다. 그녀에게 그의 힘을 더해 줬을 뿐이었다.
"당신에겐 재능이 있어."
그가 속삭였다.
"대단한 재능이지. 달링, 그것을 사용해. 할 수 있는 한 당신을 돕겠어. 당신의 날개를 꺾어 버리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어. 당신을 다시 찾았을 때, 당신과 다시 사랑에 빠져버렸지. 당신은 너무 아름답게 자랐고, 성숙했어, 나는 당신이 근처에만 와도 미칠 것 같았고, 헤어져 있는 동안에는 욕구불만으로 미칠 지경이었지."
샐리는 어둠 속에서 미소 지었다. 그들이 오래 전에 다투었던 코스들이 잘 먹혀든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잠이 들었다. 그녀도그의 사랑 속에서 만족하고 안심을 하며 잠이 들 수 있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서로에 대한 그들의 욕구가 영원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를 붙들어 주고 그녀를 끌어당기는 끈을 그에게서 느꼈지만 지금까지 라이 역시 그것을 느끼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아직 이혼을 하지 않은 이유였고, 라이가 이혼을 하려고 애쓰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그들은 서로에게 속한 사람들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