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사카리아로 떠나기 전날 밤 샐리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녀는 비행 동안에는 잠을 잘 수가 없었고 이번 여행역시 비행시간이 상당히 길 것이기에 미리 잠을 자두고 싶었다. 취재를 나갈 때마다 늘 너무 긴장하곤 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똑같은 느낌이었다. 자신의 보호 본능은 가능한 한 그와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비명을 질러댔지만 한편으로는 라이와 여행을 한다는 생각에 두려움과 기대감이 서로 뒤섞여 흥분되기도 했다. 그건 마치 사납지만 아름다운호랑이를 보며 쓰다듬고 싶어지는 것과 비슷한 경우였다. 너무나 아름다운 그 짐승을 몹시 쓰다듬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물려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황 말이다.
그녀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시트 안에서 이리저리 뒤척이고 있었다. 그 때 마치 구원처럼 현관에서 벨이 울렸다. 기쁜 마음으로 침대를 빠져 나와 로브를 걸치며 현관으로 달려갔다. 현관에 도착한 그녀는 급히 멈춰 서서 물었다.
"누구세요?"
"크리스."
낮지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샐리는 당황해서 눈살을 찌푸렸다. 크리스? 여기 무슨 일이지? 의심의 여지없이 라이 때문이겠지만 최근에 출장이 몹시 잦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날 일찍 뉴욕으로 돌아왔다. 낮에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물었을 때만 해도 무척 좋아 보였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목소리는 마치 아프거나 아니면 죽을 것처럼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재빨리 여러 개의 각종 자물쇠들을 풀고 문을 열었다. 뉴욕이라는 대도시에 살기 위해서 다양한 자물쇠는 필수였다. 크리스가 문틀에 힘없이 기대어 서 있다가 찡그린 얼굴로 어렴풋이 그녀를 쳐다보며 몸을 똑바로 일으켰다.
"무슨 일이야?"
그녀가 재빨리 물었다. 그의 소매를 잡고 안으로 들인 후문을 닫고는 다시 복잡한 여러 개의 자물쇠를 잠그고 그에게로 돌아섰다. 그는 손을 주머니에 깊이 찔러 넣고서 괴로움에 절은 갈색 눈동자로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며 서 있었다.
샐리는 숨을 죽였다. 누군가가 죽은 걸까? 항상 첫 번째로 드는 생각, 가장근원적인 공포와 고통이 먼저 일고 있었다. 그녀가 손을 내밀자 그가 그녀의 가냘픈 손가락을 쥐어짜듯 움켜쥐었다.
"왜 그래?"
그녀가 부드럽게 물었다.
"크리스?"
"이렇게 심하게 아플 줄 몰랐어."
그가 신음했다. 그의 목소리는 너무 낮아서 그녀는 거의들을 수가 없었다.
"오, 맙소사. 샐리, 난 몰랐어."
"누군데?"
그녀가 자유로운 손으로 그의 팔을 다급하게 움켜잡으면서 물었다.
"크리스 미커, 지금 당장 누군지 말하지 않으면…."
그는 마치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무도 죽지 않았어. 나를 제외하면 말이야. 그녀가 나를 떠났어, 샐"
샐리는 입을 벌리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서야 그녀는 크리스가 예전에 그녀가 원했던 것과 같이 매일 밤 집에 오고, 아이를 낳고, 자식들이 커 가는 것을 지켜보는 평범한 배우자를 원하는 여자와 사랑에 빠져 있었음을 기억해 냈다. 분명 그 여자는 크리스가 취재 여행을 떠날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힘들었을 것이고 결국 크리스 와는 함께 살 수 없다고 결정했을 것이다. 현장 취재가 늘 위험한 것은 아니지만 특파원은 위험 수위가 높은 직업이었다.
그녀 역시 사랑하는 사람을 끊임없이 걱정해야만 하는 그 생활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라이를 그녀의 인생 밖으로 밀어내고 나서야 다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어떻게 해 줄까?"
그녀가 연민을 담아 물었다.
"어떻게 도와 줘야 할지 말해 봐."
"괜찮아질 거라고 말해 줘."
그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샐리, 나를 안아 줘. 제발 좀 안아 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그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필사적인 손길로 그녀를 잡아당겨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강하게 껴안았다. 온몸을 떨면서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는 그의 눈물로 그녀의 머리카락과 목덜미가 젖어들었다.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흐느낌이 흘러나오자 그녀는 그가 부탁한 대로 그를 안아 주었다. 그가 지금 어떤 느낌일지 너무 잘 알았다. 정말이지, 그가 무엇을 겪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녀도 라이 때문에 그렇게 울었었다. 마치 라이가 그녀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버려 그 고통으로 죽을 것 같은 아픔을 느끼면서.
"좋아질 거야"
그녀가 눈물로 흐릿해진 탁한 목소리로 약속했다.
"알아, 크리스. 나도 겪어 봐서 잘 알아."
그는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바닥에서 안아 올렸다. 그는 깊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다스리려고 애썼다.
"맙소사, 이보다 더 힘들지는 않겠지?"
그가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물으며 고개를 들었다. 눈물에 젖어 더욱 비참하고 슬퍼 보이는 그의 갈색 눈동자를 응시하고 있자니 그녀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잠시 후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소리 없는 절망의 키스를 했다. 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던 샐리는 그의 키스를 가만히 받아들였다. 성적인 이유 때문에 그녀에게 키스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인간과 살갗이 닿고 온기를 느끼며 그 속에서 위안을 얻고 싶다는 간절한 애원이었다. 항상 크리스를 좋아했던 그녀는 그 순간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라이에게 주었던 깊고 뜨거우며 항상 목마른 사랑이 아니었다. 심지어 남자와 여자 간의 사랑도 아니었다. 단순히 인간적으로, 그녀를 필요로 하는 상처받기 쉬운 인간으로서 사랑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누군가 그녀를 이런 식으로 간절히 필요로 한 적이 없었다. 적어도 라이가 그녀를 필요로 하지 않은 것은 확실했다.
크리스가 고개를 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나서 그녀의 얼굴에 이마를 맞대었다.
"뭘 할 수 있을까?"
그가 물었지만 대답을 기대한 질문은 아니었다.
"얼마나 걸리면 괜찮아질까?"
그 질문에는 대답할 수 있었다.
"내가 다시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까진 두 달 정도 걸렸었어."
그녀의 말에 그가 움찔거렸다.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 내 인생에서 그보다 더 열심히 노력했던 적은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었어."
"그녀가 떠났다는 걸 믿을 수가 없어."
그가 신음했다.
"싸웠어?"
샐리가 그를 소파로 데려가 등을 기대고 앉게 했다. 그가 지친 듯이 고개를 이리저리 내저었다.
"싸우지 않았어. 심지어 최후통첩조차 없었지. 맙소사, 경고 정도는 해 주었을 법도 한데… 그녀가 내 마음을 산산조각 내고 싶었다면 한 방에 성공한 거야!"
샐리는 곁에 앉아서 가만히 그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마치 그 자리에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이름도 모르는 그 여인의 동기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크리스가 위험한 인생과 고난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동안 에이미는 그를 힘겹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죽는다면 그녀는 과연 미리 경고를 받을 수 있을까? 갑자기 그가 돌아오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해서 그녀의 고통이 덜 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남자들은 너무나 오만하고 이기적이었다.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 중 하나인 크리스 조차도 말이다 그녀가 큰 소리로 말했다.
"단지 당신이 할 수 없다고 다른 사람이 양보하기를 기대하지는 마. 당신들은 서로를 불행하게 만들었을 거야. 현실을 직시해. 헤어지는 게 더 나아"
"전에는 누구도 사랑한 적 없었어."
그가 절망적으로 말했다.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포기한다는 건 너무 힘들어."
"나도 그랬어, 그리고 난 선택조차 할 수 없었지. 그가 내 앞에서 집을 나가 버렸으니까"
크리스는 한숨을 내쉬며 카펫의 무의를 빤히 쳐다보았다. 샐리는 그의 얼굴에서 고민을 읽을 수 있었다. 거울에 반사된 빛처럼 세월의 흐름은 그의 평온한 마음을 비켜갔었다. 시간이 크리스 만은 먼발치에서 스쳐 지나간 듯 그는 언제나 나이보다 어려 보였다. 그런데 이제 그의 얼굴에서 소년 같은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의 이름은 에이미야."
그가 갑자기 말했다.
"조용하고 조금 수줍음을 타는 편이야. 복도에서 만날 때마다 내가 말을 걸어도 그냥 미소 짓는 것 외에 말을 주고받기까지 1년이나 걸려야 했어. 그러고 나서 함에 잠자리를 하기까지 또 1년이 걸렸고…"
그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의 입이 무섭게 굳어졌다.
"내가 한 말은 잊어. 난 보통 키스하거나 수다 떨지 않는데"
"벌써 잊었어."
샐리가 그를 안심시켰다.
"그녀에게 청혼했어?"
"처음에는 아니었어. 결코 결혼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거든, 샐. 당신처럼 독신주의자였지."
그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결혼에 대한 생각은 예고 없이 갑자기 찾아왔어. 내가 청혼하자 그녀는 울었어. 나를 사랑하지만 내 직업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하더군. 그리고 내가 직업을 바꾸면 결혼하겠다고 했어. 맙소사, 난 내 일을 사랑한다고! 그야말로 막다른 골목이지."
"그래서 그녀가 손을 뗐군."
샐리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또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어."
그가 스스로를 조롱하는 듯한 쓴웃음을 지었다.
"정시에 출퇴근하는 남자와 다른 게임을 하고 있더군. 오늘 밤, 나한테 올해 말쯤 그 남자와 결혼할거라고 말했어."
"당신을 떠보려는 속셈이 아닐까?"
크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진 않은 것 같아. 다이아몬드 약혼반지를 끼고 있었어."
잠시 조용히 앉아 있다가 샐리가 솔직히 말했다.
"당신이 선택해야지, 에이미 아니면 당신 일 중에서. 둘 다 가질 수는 없어. 당신한테 가장 중요한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는 잊어야 해."
"당신이 남자 대신 일을 선택할 때 당신은 그를 잊었어?"
크리스가 그녀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당신이 잘못 안 거야. 나야말로 에이미의 입장이었어. 당신 같은 입장이 아니었다고. 그는 나대신 자신의 직업을 선택했지."
샐리가 말했다.
"결코 그를 잊을 수는 없었지만 고맙게도 그 사람 없이도 잘 해나가고 있어."
크리스가 말할 때까지 그녀가 지나가듯 한 말로도 그에게 상당한 정보를 줬는지 깨닫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크리스가 구체적인 증거 없이도 그녀의 분위기와 생각을 감지할 수 있는 예민한 사람이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채 그녀를 쳐다보다가 그가 중얼거렸다.
"베인즈군, 그렇지? 그가 당신을 차 버린 남자군."
깜짝 놀란 그녀의 표정에 이미 답이 나와 있었지만 그녀는 잠시 후 용기를 내어 사실임을 인정했다.
"그래, 그 사람이야. 누군가를 버리고 떠날 때 아주 냉혹해질 수 있는 남자지."
"그는 바보야."
크리스가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돌아오기를 원하잖아, 아닌가?"
"영원히는 아니지."
샐리는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그저 잠시 즐기고 싶은 거야."
크리스는 마음속의 고통이 드러나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 표정을 감춘 그녀의 작은 얼굴을 살피면서 오랫동안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으리란 것이 분명해지자 그는 몸을 숙여 그녀에게 부드럽게 키스했다. 이번에 그가 그녀에게 위안을 주었다. 샐리는 눈을 감고 키스가 이어지도록 놔두었다. 반응하지도 않고 거절하지도 않고 시간이 흐르도록 놔두었고 그의 입술은 그녀의 입술 위에서 가볍게 움직였다. 열정도 없는, 친구로서의 이런 키스를 예전에는 결코 해 본 적이 없었다. 귀에 거슬리는 전화벨 소리가 들리자 크리스는 입술을 떼었다.
"잠시만…"
샐리가 손을 뻗어 노란색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전화를 받아든 그녀는 특유의 거 친 목소리가 들려오자 깜짝 놀랐다.
"짐은 다 쌌어?"
"물론이죠."
그가 그런 사소한 것조차 검사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에 모욕감을 느끼면서 그녀가 분명하게 말했다. 도대체 그는 그녀가 윌 한다고 생각한 걸까? 짐도 싸지 않고 마지막까지 뭉그적거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기분이 상하기도 하고, 심술을 부리고 싶어서 그녀는 덧붙여 말했다.
"그냥 크리스 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그녀는 전화선을 통해서도 침묵이 점점 깊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점점 더 커지는 라이의 분노도 전해졌다.
"그가 거기 있어?"
그 말은 거의 그의 입에서 폭발하듯이 터져 나왔다. 샐리는 그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으르렁대며 이빨을 드러낸 데다, 광대뼈는 분노로 팽팽하게 긴장해서 사나운 모습일 것이다. 회색 눈동자는 붉은 섬광을 번쩍이며 냉혹하게 변했을 것이다 다소 불안하기는 했지만 즐거웠다.
"물론 여기 있죠."
그녀가 위험한 장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대답했다. 만일 라이가 자제하지 못하고 분노를 터뜨리면 그녀가 윌 할 수 있을까? 크리스에게 괜한 문젯거리를 만들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라이로 인해 그녀는 이성적인행동은 접고 위험을 무릅썼다.
"단지 당신이 손가락을 튕긴다고 해서 내가 친구를 포기하는 사람 같아요?"
그의 목소리가 낮게, 너무 낮아서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게 으르렁거렸다.
"내가 지금 뭔가 튕긴다면 그건 내 손가락이 아니야. 샐리, 그를 당장 내보내!"
그녀가 즉시 반발했다.
"싫어요."
"지금 당장!"
그가 속삭였다.
"아니면 내가 가겠어. 농담이 아니야, 베이비. 그를 우선 보내. 그리고 다시 돌아와서 그를 보냈다고 말해."
너무나 화가 나서 그녀는 수화기를 테이블 위에 던져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크리스에게 말하는 내용을 라이가 듣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크리스에게 손을 내밀어 어리둥절해 있는 그를 현관 쪽으로 데려갔다. 그리고는 발꿈치를 들어 그에게 부드럽게 키스하며 말했다.
"미안해."
그녀가 중얼거렸다.
"당신을 내보내라고 난리도 아냐. 아니면 가만있지 않겠대."
잠시 크리스는 예전처럼 한쪽 눈썹을 놀리듯이 들어 올리면서 말했다.
"심각하게 들리는 걸. 샐리, 아무래도 당신이 너무 많은 이야기를 빠뜨린 것 같은데."
"그렇긴 하지만 이미 오래 전에 재로 변해 버린 과거를 들추고 싶진 않아. 당신은 괜찮아?"
그녀가 걱정이 완연한 목소리로 묻자 그가 재빨리 그녀를 껴안았다.
"물론이지. 단지 말한 것만으로도 도움이 췄어. 키스한건 더 많은 도움이 됐고."
그가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그야말로 뻗을 정도로 충격 받긴 했지만, 그녀를 포기하지 않을 거야. 다른 남자와 결혼할 거라고 말하면서 울더군. 그러니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지?"
샐리도 마주 웃어 주었다.
"가망 없어 보이지는 않네."
그가 한 손가락으로 그녀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사카리아에서 좋은 시간 보내."
그가 놀리자 그녀가 그를 향해 혀를 쏙 내밀었다. 그가 돌아간 후에 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을 잠그고 돌아와 그녀를 기다리며 놓여 있는 수화기를 불길한 물건이라도 되는 양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몇 분 동안 그가 기다리게 놔둘까도 생각해 봤지만 그건 마치 쓴 약을 먹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먹는 것이 빨리 끝낼 수 있는 법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녀는 수화기를 잡아챘다. 그리고 딱딱거리며 말했다.
"자, 보냈어요!"
"뭐 하느라 이렇게 오래 걸렸지?"
그가 야단치듯 물었다.
"작별 인사로 키스하느라고요!"
그녀가 화가 나서 쏘아붙였다.
"그리고 지금 난 당신한테도 작별 인사를 할 참이에요!"
"끊지 마 "
그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미커가 집에 도착할 만한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전화를 할 거야. 집에 있는지 확인해야 하니까. 당신을 위해서라도 그가 곧바로 집에 돌아가기를 기도하라고."
"당신의 심술궂은 행동이 점점 지겨워지네요."
그녀는 경멸하듯 비난을 퍼부은 후에 소리 나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침실로 걸어가서 다시 울리기 시작하는 전화기의 코드를 뽑아버렸다. 라이 베인즈에게 해 주고 싶은 행동들을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서 아파트 이곳저곳의 전등을 끄고 다녔다. 그러고 나서 침대에 누워 다시 한 번 잠을 청했다. 좀 전까지 잠자는 것이 힘들었을 뿐이지만 이제는 불가능했다. 점점 더 화가 나기 시작했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위선자가 될 수 있는 걸까? 자신은 샐리의 눈앞에서 코럴과 떠들썩하게 연애해도 되고, 샐리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건가? 그녀가 크리스와 연애를 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라이의 이중적인 생각이 문제인 것이다.
그 후에 그녀의 생각은 사카리아 여행으로 옮겨갔다. 오늘 밤이 지나면 라이는 그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요구해 대기 시작할 것이고 그것은 아마도 저항하기 힘들 정도의 유혹일 것이다.
순간 그 어떤 상황에서든 결국 그의 유혹에 무릎을 꿇고 함께 침대로 향했던 과거가 떠올랐다.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된 후 그가 처음으로 키스했던 장소가 유혹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그의 사무실이었던 게 샐리에게는 행운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유혹을 멈출 수 없었을 테니까 비록 고통스러운 진실이었지만 스스로를 속일 수는 없었다. 그러기엔 샐리가 너무 정직했다. 라이를 사랑하기도 했지만 만약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육체적으로 여전히 그를 원했다. 오직 그녀의 자존심과 다시 상처받을 수 있다는 뿌리 깊은 두려움이 그녀가 그에게 굴복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그녀는 결국 자정이 넘어서야 잠들 수 있었다. 하지만 사카리아로 가는 첫 번째 경유지인 파리 행 비행기는 아침 이른 시각에 있었다. 공항 터미널에서 라이를 만나기 위해 아파트를 나서는 그녀의 얼굴은 피곤에 지친 나머지 창백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가능한 그와 거리를 유지하고 전날 밤 그의 질투심에 그녀가 당황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위한 두 가지 이유에서 가능한 사무적이 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시작부터 바로 그 태도는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자신 쪽으로 걸어오는 그녀를 보고 라이는 일어서서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커다란 토드 백을 그녀의 팔에서 받아 들고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에 짧고 따뜻한 키스를 했다.
"잘 잤어?"
그가 어두운 회색 눈동자로 그녀의 온몸을 훑으면서 중얼거렸다.
"드레스를 입은 당신 모습이 좋아. 좀 더 자주 드레스를 입어야겠어."
결국 그는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무시하려는 걸까? 그녀도 같은 행동을 할 작정이었지만 그가 기선을 제압했다는 생각에 울컥 짜증이 치밀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자신의 감정을 무시하고 그를 차갑게 힐끗 쳐다보았다.
"사카리아 사람들이 바지보다는 드레스를 더 선호할 것 같아서요."
여행할 때는 주로 편안하고 유용한 바지를 입지만 이번에는 취재 현장의 특성을 고려해서 오로지 드레스만 챙겨왔다. 비행을 위해서는 가벼운 베이지 색의 소매 없는 드레스를 선택했다. 목선이 깊이 파였지만 드레스에 어울리는 긴소매 재킷이 있었다. 지금 그녀는 그 재킷을 입고 있었다. 뉴욕 여름의 뜨거운 열기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른 아칭에 종종 추위를 느꼈고 에어컨이 가동되고 있는 공항과 기내는 그녀에겐 언제나 너무 추웠다.
이번 여행을 위해서 평소에는 늘 평범하게 하나로 땋아 내렸던 머리 모양도 뒤통수에 머리칼을 감아 올려 단정하게 고정시키는 스타일로 바꾸었다. 길이 때문에 다양한 헤어스타일을 할 수는 없었지만 공식적인 모임에는 항상 업스타일을 고수했다.
"나도 드레스를 더 좋아해."
그가 그녀의 팔을 잡으면서 의견을 말했다.
"당신은 굉장히 멋진 다리를 가지고 있고, 난 그걸 보는 게 좋아. 예전에도 드레스를 많이 입었었던 걸로 기억하는 데…"
내 기억에도 그렇군요. 라고 샐리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럭저럭 그에게는 일반적인 답변을 들려주었다.
"일을 시작하면서 내가 하는 일에는 바지가 더 적합하다는 걸 알게 됐죠."
그리고 대화의 주제를 바꾸면서 그녀가 물었다.
"티켓은요?"
"이미 모두 처리했어."
그가 그녀를 안심시켰다.
"탑승하기 전에 커피 한 잔 마시겠어?"
"고맙지만 됐어요. 여행하는 동안에는 커피를 마시지 않아요. "
그녀는 내키지 않았지만 설명을 덧붙이며 의자에 앉았다. 라이가 그녀의 반대편 의자에 앉았다. 반짝이는 그의 회색눈동자가 그녀가 소파를 선택하지 않은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무시하고 이른 아침 여행객들의 행렬을 보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 그들이 타야 할 비행기의 탑승이 5분 정도 지연되면서 라이가 초조해할 때쯤 장내 스피커에서 그들의 비행기 번호를 부르면서 탑승을 알렸다. 그가 일어서서 그녀의 팔을 잡고는 갑자기 그녀를 향해 묘한 미소를 지었다.
"하이힐을 신고 있었군."
그가 말했다.
"키가 내 턱까지 오는 걸…. 거의"
"또한 위험스러운 무기도 되죠."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그래? 그래서 내게도 그 무기를 사용할 생각이야?"
그렇게 물은 라이는 그녀가 채 입을 열어 대답을 하기도전에 고개를 숙여 거칠고 굶주린 키스를 건넸다.
"라이, 제발!"
샐리는 그가 그녀를 만질 때마다 이는 격렬한 반응들을 애써 감추며 저항했다.
"사람들 앞이잖아요!"
"단둘이 있을 때보다는 사람들 앞에 있을 때 당신을 만질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은 것 같더라고. 그래서 그 기회를 이용할 작정이야."
그가 예고하듯이 중얼거렸다.
"일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녀가 그를 비난했다.
"그 사실을 기억하세요. 기자라는 사람들이 사람들 앞에서 품위 없게 행동하면 잡지의 평판이 어떻게 되겠어요?"
"여기 있는 누구도 당신이 월드 인 리뷰지의 기자라는 걸 모를 텐데?"
그가 싱글거리면서 반박했다.
"게다가 내가 당신 보스잖아? 그런 내가 괜찮다는데 무슨 상관이야?"
"당신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교양 있는 시민이고 싶어요. 그리고 거칠게 다뤄지는 걸 전혀 좋아하지 않아요! 이번 비행기에 탈건가요, 말 건가요?"
"결코 놓칠 수 없지."
느릿느릿 말하는 그의 말에서 숨겨진 의미를 포착한 샐리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라이는 이번 취재 여행 동안 화해를 할 생각인 게 명백해 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와는 반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생각이었다. 마리나가 결코 그녀의 부탁을 외면하지 않으리란 건 확실했고, 그녀가 그를 피해 사라진 걸 안 라이의 얼굴을 상상하니 갑자기 즐거워졌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긴 시간 동안 그와 함께 비행기 안에 있어야 했고 그 사실이 전혀 즐겁지 않았다. 그녀를 신경을 긁어대는 그가 옆에 있는 것도 문제였지만, 최상의 조건에서 여행한다고 해도 그녀는 비행기 안처럼 밀폐된 공간에 있는 것이 늘 불편했었다. 이륙하고 1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그녀는 몇몇 잡지들을 대충 넘겨대다가, 또 소설을 읽으려고 시도하기도 하고 다시 낱말 찾기 퍼즐을 선택했다. 그러다가 그것도 그만두고 다시 책을 읽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때 라이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긴장을 풀어."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등을 문지르면서 그가 충고했다. 하지만 그 행동 때문에 그녀는 오히려 더욱 긴장되고 말았다.
"긴 비행이 될 건데, 몹시 긴장해 있군. 사카리아는 둘째 치고 파리에 도착하기 전에 지쳐 버리겠어."
"난 비행에 맞는 체질이 아니에요."
그녀가 시인했다.
"게다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데는 소질이 없어요."
벌써 지루했고. 지난 며칠 동안 작업했던 원고가 그리웠다. 하지만 원고를 잃어버릴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집에 남겨 놓고 왔다.
"잠을 자도록 해 봐"
그가 충고했다.
"피곤해 보여.
""비행기 안에서는 잠도 못 자요."
그녀가 애처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이 신경 쓰이고 내가 잠을 자는 동안 기장이 알아서 비행기를 잘 운항할 거라고 생각할 만큼 파일럿을 신뢰하지도 않거든요."
"난 당신이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지 몰랐어."
그의 말에 그녀가 화를 냈다.
"무서워하는 게 아니에요. 신경이 쓰이는 거죠. 그건 다른 거라고요. 난 언제나 비행기로 다녀요. 아니, 다녔었죠. 그리고 넋이 나갈 만큼 위험한 지역에 있었어도 멀쩡하게 살아서 돌아왔어요. 솔직히 난 그런 상황을 즐겼어요. 사실은 몇 번 비행 수업을 듣기도 했었죠. 그런데 계속할 시간이 없었어요."
"바쁘게 살았군."
그가 모한 음성으로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가 헤어진 후에 또 무슨 일을 했지?"
그는 별로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지 않았지만 그녀는 갑자기 자신이 꽤 많은 것을 이뤘다는 생각에 자부심을 느꼈다. 적어도 라이만을 그리워하며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6개 국어를 말할 수 있고, 그 중 3개 국어는 유창해요."
그녀가 냉정하게 열거했다.
"사격도 꽤 훌륭하게 해내는 편이고, 말을 타면 적어도 떨어지지는 않죠. 그밖에 여러 가지들을 시도했는데… 요리, 바느질 같은 것은 포기했죠. 얼마나 지루한지를 금방 깨달았거든요. 더 궁금한 것 있어요?"
"됐어"
짤막하게 대답하는 그의 입술은 곧 웃음이라도 터뜨릴 것처럼 즐거움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렉이 그렇게 위험천만한 곳에 당신을 여러 번 보냈던 이유를 이제는 알겠군. 아마 그에게 보내달라고 협박했을 테지"
"그렉이 협박당할 사람 같아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사람이에요."
샐리가 자신의 편집장을 옹호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아마 자신이 현장에서 직접 뛰었을 거예요."
"왜 현장에서 일하지 않는 거지? 최고의 기자 중 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말이야. 갑자기 현장을 떠났었지. 이유는 못 들었어."
"남미 어디에선가 꽤 심하게 총상을 입었어요."
샐리가 설명했다.
"그리고 그렉이 회복 기간에 접어들었을 때, 부인을 심장마비로 잃었죠. 꽤나 충격이었어요. 아무런 경고도 없이 갑자기 부인이 세상을 떠났으니까. 아들 하나 딸 하나, 그렇게 아이들이 둘 있었는데, 여자애가 엄마의 죽음을 인정하는 게 힘들었나 봐요. 그래서 그렉이 아이들을 위해 집에 머물기로 결정했죠."
"힘들었겠군."
라이가 말했다.
"그 일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를 하지 않아요."
"하지만 당신에게는 말하잖아?"
그가 날카롭게 말했다.
"그냥 사소한 짜 투리 이야기들이죠. 말했듯이 그는 그 일에 대해서는 별로 말이 없는 편이에요."
"현장 기자는 가족이 필요 없지. 예전에 포니 익스프레스라는 운송 회사가 고아 출신의 가정이 없는 운전사를 구한다고 광고했었지. 난 때때로 그건 기자들에게도 역시 해당된다고 생각해."
"맞아요."
그녀가 그를 쳐다보지 않고 날카롭게 말했다.
"내가 지금 그 어떤 구속도 원하지 않은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죠."
"하지만 당신은 더 이상 기자가 아니야."
그가 중얼거렸다 그의 긴 손가락이 그녀의 손을 단단하게 조였다.
"이번 일이 당신의 마지막 일이라고 생각하라고. 그 후에 당신의 지위는 라이든 베인즈의 부인이 될 거니까."
샐리는 그에게서 재빨리 손을 빼내고 창 밖에 펼쳐져 있는 구름을 내다보았다.
"날 해고할 거예요?"
그녀가 화가 나서 물었다.
"당신이 계속 날 밀어붙이면 그렇게 할 거야. 뭐 매일 밤 돌아와 나와 함께 집에 있을 정도로만 일한다면 상관없지만. 물론, 아이들이 생기면 애들이 어릴 때는 집에서 아이들을 양육했으면 해"
그녀는 화가 나서 더욱 짙어진 푸른 눈동자로 그를 쳐다보았다.
"난 당신과 살지 않을 거예요."
그녀가 격렬하게 말했다.
"당신과 함께 살 수 없어요. 그러면 난 반쯤은 죽은 사람이 될 거예요. 다시 가정주부가 된다는 생각만으로도 구역질이 나요."
그의 표정이 무섭게 변했다.
"당신이 그렇게 믿고 있다면 당신은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거야. 많은 것이 변했지만 아이들에 대한 당신의 감정은 변하지 않았을 걸. 당신이 우리 아들을 임신했을 때 당신이 어땠는지 난 기억…"
"닥쳐요"
그녀가 격렬하게 분노를 터뜨렸다. 죽은 아이의 기억에 대한 고통을 다스리기 위해 애쓰면서 세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으로 파고들었다.
"내 아이에 대해서 말하지 말란 말이에요."
비록 7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아이를 잃은 고통은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채 생생했다. 아마 평생 동안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숨이 끊어진 그 작은 생명 때문에 눈물 흘리게 될 것이다.
"내 아들이기도 해."
라이가 말했다.
"정말로요?"
그녀가 반문했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이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도록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당신은 내가 아이를 낳을 때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죠. 임신해 있는 동안에도 거의 집에 있지 않았어요. 당신이 한 게 있다면 단지 생물학적으로 그 아이의 아버지였다는 것뿐이에요. 그 외에는 나만의 아이예요."
그녀가 죽은 아들이 떠오르자 금방이라도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애써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아이의 울음소리도 듣지 못했고 새로운 세계에 태어나 낯선 그곳을 제대로 돌아보지도 못한 아기였다. 하지만 수개월의 마법 같은 임신 기간 동안 그녀는 아이가 발로 차고 그녀의 배 안에서 뒤집는 움직임들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는 그녀에게 실재했던 생명이었고 이름도 있었다. 그녀는 어째서인지 그 아기가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아이의 이름을 데이비드 라이든 베인즈 라고 지었었다.
라이의 손가락이 너무나 단단하게 그녀의 손목을 그러쥐어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고통으로 몸을 움츠렸다.
"나 역시 그 아이를 원했어."
라이는 이를 갈며 말한 후에야 그녀의 손목을 놔주었다. 그 후로는 둘 사이에 침묵만이 감돌았을 뿐이었다.
파리에서는 잠시 머물 시간도 없었다. 샐리는 분명 그렉이 이 일정을 잡았을 거라고 추측했다. 그는 항상 할 수 있는 한 빡빡하게 일정을 짰기 때문에 첫 번째 비행기가 조금이라도 늦으면 다음 비행기를 놓치곤 했었다. 그들의 연결비행기가 방송으로 호명될 때 그녀와 라이는 간신히 세관검사를 받았고, 연결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 뛰어야 했다. 파리를 출발한 지 7시간이 지나서야 그들이 탄 비행기가 사카리아의 수도 칼리디아에 있는 매우 현대적인 제트기 신축비행장에 착륙했다. 시차 때문에 그들의 육체가 밤이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을 때 사카리아는 한낮이었다.
피곤함과 장시간의 비행 덕에 그들 사이의 떠다니는 어색하고 거북한 느낌은 사라지고 없었다. 활주로를 가로질러 낮고 길게 뻗어 있는 터미널을 걷는 동안 라이가 그녀의 팔을 잡았지만 샐리는 저항하지 않았다. 살갗이 타들어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숨이 막힐 것 같은 열기여서 사실 라이의 도움이 고맙기도 했다.
"괜찮은 호텔이었으면 좋겠군."
라이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지금 당장 느낌으로는 잠을 잘 수 있을 정도만 좋으면 상관이 없을 듯싶어."
그녀도 그 기분을 알았다. 시차는 단순히 잠자는 시간이 없어졌다는 것 이상으로 나빴다. 그건 사람을 완전히 기진맥진하게 했다. 확실히 잠을 잘 수만 있다면 라이와 싸우고 싶지도 않았다.
영어를 쓸 수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지만 몇몇 사카리아 사람들이 불어를 했고, 샐리와 라이 둘 다 불어가 유창했다. 거친 불어를 하고 눈에 띄게 찌그러진 르노 자동차를 탄 택시 운전사가 그들을 호텔로 태워 주었다. 운전사는 칼리디아가 서양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꽤 많은 유럽 사람들이 왔고, 미국 사람들도 꽤 왔다고 했다. 그 중에는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걸로 봐선 아무래도 왕이 미국 TV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는 무척 수다스러운 데다, 자국에 대한 사랑이 대단한사람이었다. 강렬한 햇빛으로 인해 하얗게 색이 바랜 고대건축물들 옆에 서 있는 반짝이는 새 빌딩들을 자부심 넘치는 동작으로 가리켰다. 사카리아는 대부분의 개발 도상국가들이 그렇듯 옛것과 새것이 흥미롭게 뒤섞인 곳이었다. 번쩍이는 메르세데스 리무진들과 당나귀들이 같은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사막을 여행할 때는 낙타를 이용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머리 위로 황실 항공 사령부의 늘씬한 유선형의 제트기가 굉음과 함께 하늘에 구름의 흔적을 남기며 날아다녔다.
국왕은 옥스퍼드에서 교육을 받았고 유럽 문화를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변화나 혁신에 대한 저항감을 갖고 있었다. 사카리아는 새로운 나라가 아니었다. 모하메드 시절까지 역사가 거슬러 올라가고 현재의 알 마흐디 가문은 5백 년 동안 왕권을 지켜왔다. 현대화에 대한 논의가 있을 때마다 깊이 뿌리내린 전통을 고려해야만 했고 대부분 사카리아 사람들의 삶은 예전과 똑같이 흘러갔다 모터를 단 운송수단은 훌륭했지만 사카리아 사람들은 그런 것이 없이도 계속 살아갈 수 있었고, 갑자기 자동차가 없어진다 해도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제트기 비행장은 너무 시끄러웠고, 비행장 가까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낯선 일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커다란 새 병원은 자존심의 근원이었고 아이들은 새로운 학교에 입학하고 싶어 했다.
이런 현대화의 업적을 이룬 사람이 자인 압둘 이븐 라시드, 사카리아의 재정장관이자 왕과 더불어 가장 영향력 있는 남자로 마리나 델챔프가 결혼한 사람이었다. 그는 종족특유의 검은 눈동자를 가진 어둡고 매 같은 남자였는데, 유럽에서 대학을 다닐 때는 국제적인 플레이보이이기도 했다. 샐리는 그가 마리나와 사랑에 빠졌는지 아니면 전형적인 금발 미녀에게 매력을 느낀 것인지 궁금했다. 자인 압둘 이븐라시드는 마리나의 매력적인 외모뿐만 아니라 그녀의 성격과 인격까지도 소중하게 여기는 걸까?
서로 문화가 다른 두 사람이 만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걱정이 되기도 했다. 동양과 서양이라는 문화 차이가 너무 컸다. 편지도 가끔 주고받았었고 만난 적도 그리 많지 않았지만 샐리는 마리나를 진실한 친구라고 생각했고 그녀가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녀는 자신의 그런 걱정거리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배경을 보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래서 택시운전사가 불어로 말을 했을 때는 깜짝 놀랐다.
"칼리디아 호텔입니다. 새로 지은 훌륭한 호텔이죠. 마음에 드실 겁니다."
라이의 어깨 너머로 쳐다본 호텔이 샐리는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일렬로 조심스럽게 가꾼 나무들이 호텔의 삼면을 둘러싸고 있었으며 나무 너머로는 높은 담이 있었다. 초현대식 건축물은 아니었다. 대신 호텔이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내부도 현대적인 편의 시설들이 갖추어져 있을 테지. 그녀는 진심으로 그러기를 바랐다. 하지만 외관은 연대를 추측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건물 윤곽은 깨끗하면서 난잡하지 않았고 오목하게 들어간 창문과 하얗게 반짝이는 대리석으로 지어져 있었다.
라이를 계속 따라가면서 샐리는 그녀가 자신의 짐과 라이의 짐이 따로 있다는 것을 설명하려고 했을 때 무시당했다는 것을 알았다. 서양 제복을 입은 검은 눈의 젊은 남자는 오로지 라이에게만 시선을 주었고 심지어 그녀를 힐끗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프런트에서도 같은 취급을 받아야만 했다. 젊은 남자가 그들의 짐을 가지고 사라졌고 라이는 방 열쇠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들이 프런트에서 몇 발자국 떨어졌을 때 샐리가 라이의 팔을 잡았다.
"혼자 방을 쓰고 싶어요."
그녀가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미안해. 내가 부부로 예약을 했기 때문에 이슬람 남자에게 다른 방을 달라고 설득하는 건 힘들 거야."
그가 명백한 만족감을 가지고 그녀에게 알려 주었다.
"당신도 이 취재 여행을 왔을 때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예상하고 있었잖아."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당신을 이해시킬 수 있는 거죠?"
그녀가 좌절감에 말을 꺼내자 그가 짧게 끊었다.
"나중에. 여기는 공개적으로 논쟁을 할 만한 장소가 아니야. 괜히 힘 빼지 말고… 내가 원하는 건 어서 샤워를 하고 몇 시간 자는 거야. 날 믿어, 당장은 안전할 테니."
그를 믿지 않았지만 그녀의 짐을 찾아야만 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탔고 그는 4층 버튼을 눌렀다. 피곤했기 때문인지 방은 감탄할 정도로 아늑하고 매력적이었다. 그녀는 짐을 가져다준 젊은 남자에게 라이가 팁을 주는 것도 가까스로 눈치 챘다. 실제로는 하나의 큰 방이었지만 정면 거실과 뒷부분의 침실, 이렇게 두 개 구역이 아랍 특유의 문양 스크린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발코니는 방 길이만큼 길었고 그곳에는 두껍게 솜을 넣은 쿠션이 놓인 버들가지로 엮은 의자 두 개와 안락의자가 놓여 있었다. 두개의 의자 사이에는 작은 티 테이블이 있었고 발코니에 들어서자 밑에 야자수 나무가 있는 넓은 수영장이 보였다. 샐리는 여자들도 수영장을 사용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방으로 되돌아와서 그녀는 소파 스타일의 침대를 살펴보았고, 침대를 장식하고 있는 다양한 색깔의 많은 쿠션에 미소를 지었다. 모자이크 문양의 마루에는 터키산으로 보이는 러그로 덮여 있었는데 아마도 수제품이라기보다는 대량 생산되는 제품이겠지만 효과는 대단했다. 취재를 다니면서 머물렀던 호텔들 중에서 이곳이 최고인 것 같았다. 음식이 끔찍할 수도 있고, 서비스의 수준이 바닥을 길수도 있지만 그녀는 이미 방의 분위기에 반해 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돌리다 라이의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과 마주쳤다. 순간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그가 재킷을 벗자 하얀 셔츠를 입은 팽팽한 어깨가 드러났고 그의 태도에서 그가 그녀의 모든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샤워하겠어?"
그가 말했다.
"난 인터뷰 준비가 잘 되고 있는지 확인 좀 해 봐야겠어."
짐 가방을 움켜쥐고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라이가 기다리는 것이 바로 자신의 그런 행동임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속여야만 했고 아직은 어떻게 할지 결론을 내리지 않은 없었다. 게다가 목욕이라는 말만 들어도 너무 행복했다.
"좋아요."
그녀가 지친 목소리로 동의하고 가방을 들고 침실 오른쪽으로 열려있는 욕실로 들어가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피곤했지만 욕실을 보자 금방 즐거워졌다. 검은 타일로 덮인 욕조와 모자이크, 값진 보석 같은 색깔은 터키의 하렘에 온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그녀는 옷을 벗고 축축한 속옷을 벗은 후에 땀에 젖어 끈적거리는 피부에 와 닿는 서늘한 기운에 긴 만족의 한숨을 내쉬었다. 크리스털 수도꼭지를 열어 커다란 욕조에 물을 받았다. 그리고 탄성을 지르며 차가운 물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가 목욕하는 것을 돕기 위해, 흥미진진한 술탄과의 다가올 밤을 위해 향기로운 오일로 그녀의 육체를 준비시키려고 기다리고 있는 하인을 가진 상상하며 물을 튀겼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라면 아마 자신은 미쳐 버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술탄이 없어도 충분히 걱정스러운 현실로 돌아왔다. 그녀는 욕조를 나와 타월로 몸을 닦았다. 그러고 나서 무엇을 입을지 심사숙고했다. 만일 그녀가 외출용 옷으로 갈아입는다면 라이는 매처럼 세심하고 날카롭게 그녀를 주시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면전에서 나이트가운을 입고 돌아다닐 생각은 전혀 없었다. 결국 그녀는 사파이어처럼 푸른색 카프탄을 입고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빗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너무 피곤한 나머지 머리카락을 땋을 힘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풀어놓기로 했다. 흩어져 있는 옷을 모아 욕실을 정리한 후에 문을 열고 가방을 든 채 밖으로 나왔다.
그녀가 마치 여기에서 한동안 머물 것처럼 행동하려고 애쓰면서 소지품을 치우는 동안 라이는 전화를 하면서 거의 그녀 쪽을 보지 않았고 있었다. 샐리는 몽롱하게 몰려오는 잠에 대한 유혹을 물리치기 위해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라이가 몇몇 사람들과 나누는 통화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잠시 후에 그가 전화기 송화구 부분을 손으로 막고 그녀에게 말했다.
"가서 잠을 좀 자지? 얼마나 오래 걸릴지 모르겠는데"
그녀는 자러 가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본능과 이성 모두 그래서는 안 된다고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지켜보고 있는 상태에서 이 방을 빠져 나갈 수도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너무나 피곤했다. 장시간 기내에 앉아 있었기 때문인지 온몸이 쿡쿡 쑤셨다. 그녀는 라이가 전화를 끝낼 때까지 딱 몇 분만 잠시 눈을 붙일 생각이었다. 소리에 매우 민감했던 그녀였으니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분명 그가 욕실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리면 잠에서 깰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발코니 창의 커튼을 내리고 방을 어둑어둑하게 만들고 나서 황홀경에 한숨을 쉬며 침대 위의 배게 사이로 기어갔다. 그녀는 쑤시는 다리를 쭉 펴고 누워 얼굴을 베개에 기댄 채 바로 잠이 들었다. 그녀는 누군가가중얼거리는 소리에 얼마 후 잠에서 깼다.
"조금 비켜 봐"
이에 그녀는 옆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따뜻한 육체를 위해 공간을 만들어 주려고 옆으로 굴렀다. 무의식중에도 희미하게나마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너무나 편안했다. 곧 규칙적이고 낮은 에어컨 소리가 그녀를 다시 꿈속으로 끌어들였다. 무엇보다도 시차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방 안은 어두웠고, 도대체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것인지… 잠으로 몽롱한 상태에서 그녀는 욕실 밖으로 나오고 있는 희미한 형상을 쳐다보았다.
"누구세요?"
잠의 흔적이 남아 있는 불분명한 목소리가 혼란스러운 기색을 띤 채 물었다. 그녀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라이야"
벨벳 같은 목소리로 그 사람이 대답했다.
"깨웠다면 미안해. 물마시고 있는데 당신도 마시겠어?"
그것은 천국의 소리처럼 들렸고 그녀는 한숨지으며 좋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침대에서 일어나 앉기 위해서 애를 쓰기 시작했다. 차가운 물 컵이 손에 쥐어 쥐자 단숨에 물을 마신 후에 그에게 컵을 돌려주었다. 그가 컵을 갖다놓으러 가자 그녀는 베개에 누웠다. 불도 켜지 않았는데 부딪히지도 않고 잘도 돌아다니는군. 밤눈이 엄청 밝은가 보네…. 침대가 다시 한쪽이 기울어졌다. 그때서야 그녀는 자신의 계획이 생각났다. 그녀는 라이 몰래 살짝 빠져 나갈 계획 이었다! 그녀의 심장이 공포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잠깐만…"
그녀는 갑작스러운 공포로 숨을 헐떡거리며 그를 밀치기 위해서 손을 뻗었고 그녀의 손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육체에 부딪혔다. 놀라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도 잊은 샐리는 엉겁결에 소리쳤다.
"당신 아무것도 안 입었잖아요!"
어둠 속에서 그가 웃음을 터뜨렸고 그녀와 마주보기 위해서 몸을 돌렸다. 그의 묵직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으며 그녀의 무익한 저항을 물리치고 그에게로 끌어당겼다.
"항상 다 벗고 잤었는데…. 기억 안나?"
그가 짓궂게 놀리면서 입술로 그녀의 관자놀이를 가볍게 쓸었다. 그녀는 숨을 멈추고 강하고 따뜻한 육체의 압박에 떨기 시작했다. 그의 남성적인 체취가 그녀의 코를 채우면서 감각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에게 몸을 밀착시키며 그가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 두려는 욕구와 필사적으로 싸우면서 그녀는 그를 밀어내기 위해 그의 가슴에 손을 갖다 대었다.
"샐리"
그가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어둠속에서 그녀의 입술을 찾자 신음과 함께 팔을 올려 그의 목에 감고 매달렸다. 그에게 저항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그와 싸워야 하는 충분한 이유들이 있음에도 다시 그 황홀한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는 유혹에 무릎을 꿇은 채 그를 밀어내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도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을 지나 눈을 가로질러 얼굴의 윤곽선을 따라 산발적인 키스를 흩뿌리고 있는 그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카프탄의지퍼를 내리고 어깨에서부터 옷을 벗겨 허리까지 끌어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의 떨리는 손이 그가 벗겨 낸 후 부풀어 오른 그녀의 가슴을 부드럽게 탐험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찌 할 바를 모른 채 얼굴을 그의 어깨에 묻고 그가 일깨운 강한 욕망에 몸서리치면서 그가 멈추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만일 그가 멈춘다면 그 자리에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카프탄을 완전히 벗겨내 옆으로 내던지는 동안 그녀는 겨우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의 단단한 어깨를 움켜잡고 샐리가 미약하게 웅얼거리며 말했다.
"라이… 이러지 말아요. 우린 이러면 안 돼요."
"당신은 내 아내야"
라이는 간단한 말로 그녀의 저항은 무시하며 다시 그녀를 안고는 그 위로 자신의 몸을 기대었다. 그녀는 그 거칠면서도 달콤한 접촉에 숨을 헐떡였고, 정열적이고 자극적인 그의 입술은 그녀의 이유와 저항을 삼켜 버렸다. 그녀는 다시 그에게 정신없이 매달렸다.
별거했던 시간들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들의 육체는 오래 전에 그랬던 것처럼 서로에게 너무나 친숙했다. 그가 일으킨 열정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린 그녀는 그가 자유롭게 만들어 준 정열을 되돌릴 뿐이었다. 라이는 결코 부드러운 연인은 아니었다. 강렬하고 자극적이며 거칠었다. 그런 점이 오히려 그녀를 흥분시켰고 그녀는 그의 정열적인 초대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과 똑같았다. 아니, 훨씬 더 좋았다 그는 그녀의 이성과 걱정을 모두 삼켜 버리고 그를 제외한 그 어떤 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세계로 그녀를 데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