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다 하워드/신영장편 ◈
내가 당신을 용서할 수 있을까요?
자신을 향한 그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한 채 라이와 결혼한 샐리. 너무 다른 두 사람의 서툰 사랑은 불화를
키우게 되고 참지 못한 라이는 잔인한 말을 남긴 채 샐리를 떠난다. 7년 후 산산조각 났던 마음을 극복하고
유능한 기자로 살아가는 샐리 앞에 다시 나타난 라이는 그녀를 되찾고 싶다고 말하지만….
1장.
책상 위 전화가 시끄럽게 계속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요란한 전화벨 소리를 듣지 못한 듯 샐리는 모니터 화면만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숨을 쉬며 의자에서 일어난 브롬은 책상 위로 몸을 엎드려 건너편 샐리의 책상에 놓인 수화기를 들었다. 하지만 샐리는 미간을 찌푸린 채 키보드만 두드리고 있었다.
"샐! 당신 찾는 전화야."
브롬의 냉랭한 음성에 깜짝 놀란 듯 고개를 든 샐리는 브롬이 책상에 거의 누운 자세로 몸을 뻗어 그녀에게 수화기를 건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머! 브롬, 미안해. 전화벨 소리를 듣지 못했어."
그녀는 사과를 하며 브롬에게서 전화를 건네받았다. 다른 세상에 사는 것 아니냐고 자주 그에게서 놀림을 받았지만, 사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샐리가 기사 작성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를 거의 듣지 못하기 때문에 브롬은 자신의 전화를 받는 것 외에도 그녀에게 오는 전화를 십중팔구는 받아야 했다. 그는 다시 의자에 앉으며 웃음 지었다.
"그렉이야."
"전화 받았습니다."
샐리가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뉴스 편집장인 그렉 다우니는 특유의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애송이. 내 방으로 당장 오도록."
"네, 알았어요. 당장 가도록 하죠."
기쁨에 찬 목소리로 대답한 그녀는 활기차게 전화를 끊었다. 컴퓨터를 끄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며 브롬이 물었다.
"친구, 또 나가?"
"제발 그래야 할 텐데 말이야"
대답을 하며 샐리는 길게 하나로 땋은 머리를 어깨 뒤로 넘겼다. 해외로 취재 나가는 것이 너무 좋았다. 마치 그 일이 그녀의 삶에 일용할 양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만 해도 신이 났다. 다른 기자들은 시차 적응 때문에 힘들어할 때에도 샐리는 펄펄 날아다녔다. 그녀의 에너지 레벨과 유쾌한 웃음, 유머 감각은 고갈될 줄을 몰랐다. 그렉의 사무실로 날아갈 듯 뛰어가는 그녀의 심장은 치솟는 아드레날린의 작용으로 빠르게 쿵쾅거렸고, 전신엔 기대감으로 짜릿한 흥분이 퍼졌다.
열린 문에 노크를 했다. 그 소리에 고개를 든 그렉의 엄한 얼굴이 그녀를 보는 순간 미소로 부드러워졌다.
"달려온 건가?"
자리에서 일어서 그녀에게로 다가오며 그가 놀리듯 묻더니 그녀의 등 뒤로 문을 닫았다.
"방금 수화기를 내려놓은 것 같은데?"
"정상적인 속도예요."
샐리 역시 그를 따라 웃으며 대답했다. 짙푸른 눈동자가 웃음으로 반짝거리고, 뺨에는 보조개가 파였다. 그렉은 반짝거리는 그녀의 작은 얼굴을 내려다보다 잠시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러 아버지가 딸을 껴안듯 등을 토닥여 주더니 곧 그녀를 놓아주었다.
"맡기실 일이 뭐죠?"
기대에 찬 음성으로 그녀가 물었다.
"당장은 없는데?"
그가 의자로 돌아가며 대답했고, 실망 가득한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껄껄 웃었다.
"애송이 기자, 얼굴 펴라고. 어쨌든 좋은 소식은 있으니까. 올리베티 재단에 대해서 들어 본 적 있나?"
"아뇨"
샐리가 말하곤 인상을 찌푸렸다.
"들어 봤어야 하나요? 올리베티가 누구죠?"
"유럽의 자선 사업 기구야"
그렉이 말을 꺼내기 시작하자, 샐리가 기분 좋은 환호성을 질렀다.
"오호! 이제 감을 잡겠어요. 매년 여름 세계의 귀족들이 후원하는 대형 자선 무도회에 대한 거죠? 그렇죠?"
"맞아"
그렉이 확인해 주었다.
"내가 관심을 가질 만한 일이 있나요?"
샐리가 물었다.
"우리 미국에 귀족들이 있을 리가 없고, 오직 뜨겁고 뜨거운 피가 들끓는 평민들만이 있을 뿐이잖아요."
"관심을 가질 걸… 올해 그 무도회가 사카리아에서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되면 말이야"
그렉이 약 올리듯 천천히 말했다. 샐리의 얼굴이 활짝 밝아졌다.
"어머, 그렉! 마리나 델챔프?"
"그렇지"
그가 흐뭇한 표정으로 미쇼를 지었다.
"어때? 관심이 있지? 이건 말만 일이지 거저 주는 휴가라고. 멋지고 세련된 재무장관 부인과의 독점 인터뷰. 그리고 세계 최고의 부자들만이 참석하는 돈을 도배하듯 처바른 파티에 초대받고 매시간 월급을 받고 경비는 모두 회사에 청구하고 말이야. 뭘 더 원 하냐는 말이야"
"최고예요!"
그녀가 열광적으로 동의했다.
"언제죠?"
"다음 달 말"
그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자선 무도회에 입고 갈 의상이 없다면, 살 수 있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도 있으니 더 좋지?"
"지레짐작 하시지 마세요."
그녀가 코에 주름을 잡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옷장에 바지만 주르륵 걸려 있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드레스도 몇 벌 걸려 있다는 것을 알려 드리고 싶군요."
"그럼, 어디 좀 걸치고 돌아다녀 보시지."
그렉이 고집스럽게 말했다.
"어머, 보스, 그렇게 말씀하시면 곤란해요. 보스야말로 사건이 터지면 1분 내로 당장 현장으로 달려가라고 명령하곤 하잖아요. 유비무환의 정신을 안 배울 수가 없었다고요."
"그래,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 어떤 사건이라도 놓치기 싫어서 책상 밑에 늘 가방을 숨겨 놓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되받아 치는 그녀의 말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그렉이 대꾸했다.
"샐리, 이번엔 진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제대로 차려입어야 해. 사카리아는 아주 중요한 미국의 동맹국이고, 현재 그 나라의 북방 경계선 유전에서 나오는 석유 생산량은 엄청나. 마리나 델챔프가 미국인이고, 그녀의 남편이 국왕에게 직접적 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실세라는 것이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자네가 최고의 옷차림을 하고 그 자리에 있는 것도 절대로 나쁘진 않을 거야"
"음… 알았어요. 국무부에선 내가 그들의 편에 있다는 것을 안다면 정말 안심이 될 거예요."
그녀는 굉장히 진지하게 말했지만, 얼굴 표정을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상당한 노력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런 것에 속을 그렉이 아니었다.
"웃지 마."
그가 그녀에게 경고했다.
"워싱턴의 녀석들도 모두들 사카리아로 몰려들 거야. 국왕은 유전지대를 가짐으로 해서 생기는 힘과 이익을 잘 알고 있지. 남편에 대한 마리나의 영향력으로 사카리아가 친 서방 경향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모호한 상태고…. 이번 자선 무도회는 아랍 세계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대규모 행사니까, 방송국이고 신문사고 다 몰려들 거야. 물론 TV에선 말할 것도 없겠고 말이야. 라이든 베인즈가 국왕을 인터뷰할 거라는 이야기도 들었지. 아직 정확하게 확인된 소식은 아니지만…"
그렉은 의자의 등에 몸을 기댄 채 머리 뒤로 손을 깍지 끼며 말했다.
"참! 베인즈가 방송국을 그만둘 거라는 루머가 떠돌고 있어"
은 밝게 빛나던 샐리의 눈빛이 약간 흐려졌다
"그래요?"
"라이 베인즈가 방송에서 은퇴하는 날이 올 거라는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요."
그녀의 말투에서 뭔가 감을 잡은 듯 그렉이 그녀를 주시하며 물었다.
"라이든 베인즈를 알고 있어?"
그가 놀랍다는 듯이 물었다. 전혀 놀란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라이든 베인즈는 무자비할 정도로 냉정하게 사실에 입각한 인터뷰와 다큐멘터리 제작으로 이미 유명 인사였다. 샐리가 손꼽힐 정도의 기자가 된 것은 그다지 오래된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쾌 많은 수의 사람들과 벌써 안면을 트고 있는 민완기자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함께 자랐어요."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정확히 함께 자랐다고 하긴 그렇군요. 그가 연상이니까. 하지만 같은 마을 출신이에요."
"그러면 더 좋은 소식을 알려 주지."
그렉이 의자에 더욱 편하게 등을 기대고 그녀를 다소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당분간은 비밀을 지켜 줘야 해. 아직까지 외부에 유포되면 안 되니깐. 우리 잡지사가 팔렸어. 새로운 발행인이 곧 올 거야."
샐리의 심장이 덜컹하고 내려앉았다. 좋은 소식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경연진의 교체는 때론 조직 하부의 인사이동이나 교체를 의미하기도 하니까. 그녀는 지금 맡고 있는 자신의 일이 너무 좋았다. '월드 인 리뷰'는 일류 시사 잡지였다. 그 동안 쌓아 온 명성이 허물어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새로운 대장이 누구래요?"
그녀가 비꼬인 어투로 물었다.
"그렇게 힌트를 줬는데 모르겠단 말이야?"
그가 오히려 놀란 듯 물었다.
"물론, 라이든 베인즈지. 그게 바로 사카리아 국왕과의 인터뷰가 불확실한 이유이기도 하고. 방송국에서 그를 붙잡아 두려고 메인 뉴스 앵커맨 자리를 제공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거절했다더군."
샐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새 대장이… 라이… 라이라고요!"
충격을 받은 듯 그녀는 말을 제대로 잇지를 못하다가 이윽고 말했다.
"맙소사. 그를 뉴스 현장에서 끌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정말이에요? 라이는 그 무엇보다도, 정말 그 어느 것보다도 기자라는 직업을 사랑하는 사람인데…"
샐리는 입 밖으로 나을 번한 이야기에 하마터면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라이는 기자라는 직업을 나를 사랑했던 것보다 더욱 사랑했었죠! 그렇게 대놓고 이야기를 했더라면 그렉의 표정은 어땠을까? 어쨌든 이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그녀가 맡을 일들이 하수구로 물이 빠져 나가듯 사라질 것 같았다.
"내가 알고 있기로는…"
그렉이 그녀의 말이 잠시 멈추었던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담배 연기를 빨아들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앞으로 5년 정도는 몇 편정도 더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기로 방송국과 계약을 맺은 모양이더군. 그 일 외에는 현장에서 빠져 나을 모양이던데? 아마 질린 모양이지"
"질렸다고요?"
샐리가 생각 자체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중얼거렸다.
"기자에 말인가요?"
"너무 오래 정상의 자리에 있었어."
그렉이 대답했다.
" 어쩌면 결혼하고 싶어졌을 수도 있고. 나이가 들면 안정을 찾고 싶어지니까. 자식이 몇 명 있다고 해도 전혀 이상을 없을 나이지"
"서른여섯 살이에요."
샐리가 정상을 되찾으려 하며 말했다.
"라이가 가정에 안주한다니… 생각만 해도 너무 웃기네요."
"솔직히, 나는 그가 우리 잡지사에 오게 되어서 무척 기뻐. 그와 일하는 것에 대한 기대가 아주 크단 말이야. 그 남자는 우리 분야에선 천재적인 재능을 갖고 있잖아. 흠, 이 소식을 들으면 나처럼 좋아할 줄 알았는데… 무슨 일이야? 크리스마스 파티가 완전히 엉망이 된 것 같은 표정이잖아. 왜 그러지?"
"그냥… 놀랐을 뿐이에요."
그녀가 대답했다.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생각을 전혀 해 본 적이 없어서… 언제 일반에게 공표되죠?"
"다음 주. 그가 왔을 때 자네도 이곳에 있었으면 하는데… 어때?"
"아뇨. 고맙지만 됐어요."
그녀는 거절하곤 곧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곧 보게 될 텐데요, 뭐"
몇 분 후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온 샐리는 마치 배라도 한대 걷어차인 것 같은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동료들을 피해휴게실로 숨어든 그녀는 소파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라이! 많고 많은 잡지사 중에 왜 하필이면 월드 인 리뷰지에 온 거지? 지금처럼 좋아할 만한 일을, 다른 곳에서 찾기란 정말 힘들 텐데. 아마 불가능하겠지. 라이가 그녀를 해고할 것 이라기보다는 그녀가 그와 같이 일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인생에서 나가 버린 것은 라이였고, 그런 그를 위한 자리 따위가 그녀의 인생에 있을 턱이 멀었다. 직업적인 만남뿐이라고 해도 절대로 그와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그렉이 또 무슨 말을 했었지? 라이가 결혼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큰 소리로 소리 내서 웃을 뻔했다. 라이는 이미 그녀와 결혼한 상태였다. 7년 동안 별거 중이고, TV에서만 그를 봤다고 해도. 그리고 그들의 결혼이 깨진 것은 라이가 절대로 가정에 안주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샐리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일어나서 인상을 됐다. 지금 걱정해 봤자 일에 지장을 줄 뿐이다. 그러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직업관이 확고한 그녀였다. 오늘 밤에 계획을 세워도 충분했다.
그날 밤, 저녁 식사 대신이랄 수 있는 자몽을 대충 먹으면서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그녀의 얼굴이 점점 밝아졌다. 솔직히 라이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 가능성이 더 컸다.
7년 동안 그녀는 정말 많이 변했다. 사람이 아예 달라진 것처럼 체중이 확 줄었고 머리 스타일도 바꾸었다. 이름까지도 달라졌으니까. 게다가 그녀의 회사처럼 대형 시사 잡지사의 발행인이 일개 기자들과 어깨를 맞대며 일할 리 만무했다. 몇 주 간이고 외부에 일을 하러 가게 되면 그의 얼굴을 볼 시간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해외로 나가게 되면 장기 출장이 일상다반사였다.
그의 기자들 중 한 사람이 별거 중인 자신의 아내라고 해서 그다지 상관할 라이도 아니었다. 7년은 긴 시간이고, 그동안 그들은 전혀 연락을 하지 않고 지냈다. 그들의 헤어짐은 그 자체로 끝, 마침표였으며 절대적이었다. 두 사람 중 누구도 이혼 신청을 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 다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였을 뿐이었다. 전적으로 다른 길을 걸어갔고, 각자의 삶을 살다보니, 그들이 결혼했던 시간이 오히려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졌다. 결혼의 결과물이라고 해 봐야 샐리 자신의 극단적인 변화뿐이었다 라이가 그녀를 알아차린다고 해도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일을 계속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그럴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아 보였다. 자신의 일에 프로인 그녀였고, 라이 역시 일과 사생활을 구분하지 못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누구보다 그녀가 너무 잘 아는 사실이었다. 그녀가 일을 잘 처리하고 그의 생활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개인적인 관치에 대해서 아주 조그만 힌트도 누설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끝난 것처럼, 라이에게도 그들의 결혼은 이미 완전히 끝난 일일 테니까.
TV에서 그를 보거나 하지 않으면 라이에 대한 생각을 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제 그의 존재가 그녀의 삶속에 다시 등장했다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가 다시 그녀의 인생에 드리우고 있었다. 라이. 샐리는 어둠 속에서 천장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그의 얼굴을 떠올려 보려고 애를 썼다 그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다. 지난 7년 동안 그의 얼굴을 수도 없이 여러 번 TV에서 보았기 때문이었다. 처음 방송에 나오는 그를 보았을 때는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실제로 몸이 아프기도 했고, 토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그의 얼굴이 화면에 나오면 TV를 끄거나 채널을 다른 곳으로 돌린 적도 많았다.
하지만 점점 그런 반응들은 사라졌고 결국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녀의 사고와 이성이 그런 강렬한 슬픔에 대하여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어체계로 바뀌었고, 결국 부서진 삶의 조각들을 모아서 재생하게 만들었다. 무감각은 곧 단단한 결심으로 변했고, 단단한 결심은 무관심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라이 없이도 사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어리석을 정도로 불안해하고 보잘것없던 그 어린 소녀를 생각하면서 샐리는 그 소녀가 마치 낯선 이방인처럼 여겨졌다. 동정을 받을 만했지만, 오래 슬픔을 느낄 가치는 없는 그런 어린 소녀. 라이가 그녀를 떠난 것이 놀랍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녀에게 그가 처음 매력을 느꼈던 것이 이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라이 베인즈처럼 활동적이고 정력이 넘치는 남자가 왜 사라 제롬처럼 보잘것없고 초라한 소녀와 결혼하기를 원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지금의 샐리처럼 모든 것을 감당할 용기를 가지지도 않았고 활기도 없었다. 조용하고 통통하며 타인의 영향을 받기 쉬운 소녀, 사라 제롬.
그렇게 아무에게나 영향을 받기 실운 그녀였기 때문에, 그의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가 원할 때면 그의 생활에 참견하지 않고 조용히 뒤로 물러나 있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까? 혹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따뜻한 가정과 음식을 제공할 수 있는 누군가를 원했기 때문에 그녀를 원했던 걸까? 그랬다면 그는 실망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쉽게 영향을 받는 사라였지만, 그의 직업에 관해서는 절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라는 그녀의 남편이 매일 밤 집에 돌아오기를 원했다. 혁명의 현장, 마약이 오고가는 범죄의 소굴, 실제로 전쟁이 행해지고 있는 곳에서 기사를 얻기 위해서 매번 비행기를 타고 움직여야 하는 우발적인 상황, 시도 때도 없이 벌어지는 각국의 사건 현장은 라이든 베인즈의 삶의 핵심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녀는 그가 떠날 때마다 매번 떠나지 말라고 울부짖고 소리치면서 그를 귀찮게 굴었고, 매번 떠났던 그가 시체로 돌아오는 것은 아닌지 전전긍긍 했다 그녀는 그를 꼭 붙들고만 싶었다. 왜냐하면 그를 통해서만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삶은 라이가 참을 수 있는 생활이 아니었고, 1년 후 라이는 그녀의 곁에서 떠났다. 그 후 그에게선 아무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가 전화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당신이 내게 충분할 정도로 성숙한 여인이 되었다고 생각되면, 그때 당신이 전화해'
그게 바로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깊은 상처를 주었던 냉소적인 그 말. 그 말속에서 라이가 얼마나 그녀를 혐오하고 있는지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삶을 변화시킨 것도 바로 그 말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샐리는 잠이 완전히 달아나 버렸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리고는 베개를 말아서 품에 안고는 몸을 잔뜩 웅크렸다. 그래. 어쩌면 오늘 밤이야말로 그 오래된 기억들을 모두 파헤쳐서 완전히 털어 버려야 할 시간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얼마 후면 아주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남편을 봐야 할지도 모르니까.
샐리가 기억할 수 있는 한, 그들은 꽤 오래 서로를 알고 지냈다. 라이의 고모가 제롬 가족의 바로 옆집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이는 그 고모가 제일 좋아하는 조카였고, 그 때문에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그 집을 방문하는 것은 의례적인 일이었다. 라이가 취직이 된 후로는 그 전처럼 자주 찾지 못했지만, 그래도 시간이 되는 대로 자주 방문하곤 했다. 그 무렵 그는 점점 기자로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하였고, 뉴욕의 방송국과 계약까지 맺게 되었다. 때때로 그는 두 집 사이에 있는 흰 울타리를 훌쩍 넘어와서 샐리의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또 샐리나 그녀의 어머니가 옆에 같이 있을 때는 말을 걸기도 했고, 샐리가 너무 빨리 자라는 것 아니냐고 놀리기도 했다.
샐리가 막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샐리의 부모님이 자동차 사고로 돌아가셨다. 그녀는 부모님의 유산인 그 조그만 집에서 혼자 살게 되었다. 집의 장기 할부는 모두 끝난 상태였고, 사고 후 지급된 보험금이 제법 목돈이어서 직업을 찾고 싶어질 때까지는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는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멍하게 지내며 앞으로 그녀 혼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두려움과 외로움에 떨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라이의 고모와 점점 가까워지게 되었다 하지만 샐리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두 달도 채 안 되어 라이의 고모마저 돌아가셨고, 그 장례식을 치루기 위해 라이가 돌아왔다.
막 스물여덟 살이 된 라이는 지독할 정도로 잘생긴데다가 숨을 앗아갈 정도의 아찔한 매력을 가진 남자였다. 용기로 단단히 무장한 그 남자는 번뜩이는 재능으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었으며, 막 최고의 뉴스 전문 방송국의 해외 특파원이 된 상태였다.
장례식 다음 날, 그는 샐리에게 전화를 걸어서 저녁을 같이 하자고 했다. 샐리는 그가 지겨워할 거라고 생각했다. 화려하고 짜릿한 흥분으로 가득 찬 삶을 살고 있는 그가 거울 속에서 보이는 아름답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그녀를 보면 지루해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의 샐리는 그다지 밉상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자그마한 키에 다소 통통한 편이었으니까. 짙은 갈색의 짧은 머리 스타일도 그녀의 통통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라이 베인즈는 그녀에게 데이트를 청했고, 그녀는 허락했다. 그렇게 섹시한 남자와 외출할 것을 생각만 해도 그녀의 심장은 미칠 듯이 쿵쾅거렸다.
라이는 세련된 성인이었다. 집에 데려다 주면서 그녀의 집 앞에서 키스를 했다고 해도, 그것은 별 의미 없는 의례적인 작별 인사였을 것이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들어 올려 그를 마주보게 했다. 순간 모든 감각이 쏟아져나을 것만 같았다. 어떻게 감정을 감추거나 조절해야 할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그에게 녹아들 듯 무너진 채, 삼킬 듯이 파고드는 그에게 자신의 작은 입술을 허락했을 뿐이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고개를 든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다시 데이트 신청을 했다.
그녀의 순결을 지켜준 것은 오직 그의 자제력뿐이었다. 샐리는 그의 매력에 한없이 끌려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고, 정신없이 그를 향한 사랑에 빠져들었지만, 그가 갑자기 결혼하자고 청혼을 하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그녀를 침대로 데려갈 거라고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청혼은 생각지도 못했던 그녀였기에 그저 감사하며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그 다음 주에 결혼했다.
6일간의 황홀한 허니문이 이어지는 동안 그녀는 감각의 천국에 있었다. 그는 더할 수 없이 훌륭한 연인이었다. 그녀의 미숙함을 참을성 있게 풀어주며 열정의 순간에도 한없이 부드러웠다. 조그맣고 조용하기만 한 그의 어린 아내가 그렇게까지 정열적으로 반응을 보이는 것에 놀라고 감탄한 듯 그는 결혼 초기 며칠간은 침대를 거의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전화가 왔다. 무슨 일인지 그녀가 미처 알기도 전에 라이는 이미 옷가지들을 여행 가방에 던져 넣고 서둘러 그녀에게 키스를 하며 '전화할게, 베이비'라는 말만 남기곤 나가 버렸다.
2주 동안 그는 떠나 있었고, 저녁 뉴스를 보고서야 그녀는 그가 혁명이 일어나 정부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살해된 남미의 어느 국가에 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떠나 있는 동안, 그녀는 내내 울며 잠이 들었고, 음식을 볼 때마다 욕지기가 올라와서 거의 먹지도 못했다 라이가 위험한 곳에 있다는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부모님을 잃어버린 악몽 뒤에 겨우 발견한 사람이었으며, 그를 너무도 사랑했던 것이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간다면 그녀는 도저히 참아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는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샐리는 그를 보자마자 두려움과 분노로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댔다. 그도 질세라 험한 말을 해댔다 싸우고 난 뒤 그들은 이틀 동안이나 전혀 말도 하지 않고 지냈다. 그런 그들을 다시 재결합시켜준 것은 섹스였다. 조그만 몸집의 그녀가 보여주는 야성적인 정열과 완벽한 몰입에 그 또한 그녀와 같은 열정으로 그녀를 탐했다 싸운 후에 섹스로 화해하는 것은 결국 그들의 결혼 생활의 방식이 되어 버렸고, 그는 점점 더 오래 집에서 떠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을 하게 되었다.
그녀가 임신한 것에 대해서도 그들은 싸움을 했다. 라이는 그녀가 그를 집에 묶어두기 위해 임신을 했다며 냉혹하게 몰아세웠다. 그가 이런 상황에서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물론이고, 직업을 바꿀 생각도 전혀 없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샐리는 자신을 위해 변명을 할 생각도하지 않았다. 고의로 임신을 했다는 것보다 자신이 피임을 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도 못할 정도로 어수룩하고 멍청하다는 것이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피임에 대해선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었다. 만일 라이가 그런 순진과 무지를 눈치 챈다면 왠지 자신을 혐오할 것 같았다.
6개월 째 임신에 접어들었을 때, 라이는 아프리카의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두 나라 간의 분쟁을 취재하러 갔다가 부상을 당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거의 죽을 번한 뒤라면 제정신이 돌아오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돌아왔을 때 그에게 화를 내거나 징징거리지 않았다. 영원히 그가 그녀와 함께 집에 머물러 주리라는 생각만 해도 그녀는 날아갈 것 같았다. 하지만 1개월도 채 되지 않았을 때, 부상이 완전히 회복되지도 않은 몸으로 그는 다시 다른 취재 차 해외로 나갔다. 그녀가 조산의 위험이 있어 병원에 입원했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해외에 체류하고 있었다. 방송국에서 그에게 긴급히 연락을 취해 그가 집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그녀는 병원에서 퇴원을 했고, 사산이 된 그들의 아들을 땅 속에 묻은 후였다.
그녀가 육체적인 부분이나마 출산 후유증에서 회복이 될 때까지 그는 그녀 옆에 머물렀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를 잃은 슬픔과 그런 위기 상황에 그가 옆에 없었다는 것에 대한 원망만이 가득했다. 그가 다시 집을 떠났을 때, 그들 사이에는 그야말로 냉랭했고 침묵만 존재할 뿐이었다. 어쩌면 그때 라이가 얼마나 그녀에게 무심해졌는지 깨달았어야 했다. 라이가 그 다음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그가 그렇게 쉽게 그녀를 버리고 갔다는 것에 대한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식료품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라이는 거실 소파에 누워 있었고 미행 가방은 문 옆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의 얼굴은 피곤으로 지쳐 있었지만 그녀를 훑어보는 그의 눈동자만은 여전히 카리스마가 넘치는 날카로웠다. 그는 뭔가 기다리고 있었다.
미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을 주어 담을 수도 없이 그녀는 그가 이기적인 행동을 비난했다. 그리고 그녀가 겪어야 했던 고통, 아픔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도 없는 냉혈한이라고 퍼부었다.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다른 직업을 찾아야 하지 않느냐고, 그렇게 간절하게 그의 힘이 필요할 때 옆에 있었어야 하지 않느냐고 퍼붓는 도중에 라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대로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는 문을 열고 걸어 나가면서 무서울 정도의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이 내게 충분할 정도로 성숙한 여인이 되었다고 생각되면, 그때 당신이 전화해."
그 이후로는 그를 보지 못했다. 처음에 그녀는 완전히 절망에 빠졌다. 한참 동안 울기만 했다. 그리고 전화가 울릴 때마다 달려가기 바빴다. 매주 생활비로 쓰라는 듯 수표가 도착하기 시작했지만 머1시지는 전혀 동봉되어 있지 않았다. 남편으로서의 의무로 그녀를 부양이야 하겠지만 그녀를 만나거나 이야기하는 것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듯했다. 그녀는 그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아니었다. 라이 없는 그녀의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없었기에 절망에 빠져 허우적대던 샐리는 라이를 되찾기 위해 그에게 어울릴 만한 여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미친 듯이 노력했다.
가까운 대학교에 등록을 하고 좀 더 세련된 여자로 변하기 위한 지식을 습득했다. 외국어 수업도 신청하고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수공예 관련 강좌들도 들었다. 수줍은 성격을 고치기 위해 억지로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직업도 구했다. 비록 지역의 신문사무국의 사무직으로 급여는 작았지만 어쨌든 그녀의 첫 직장이었고 시작이었다. 매주 받는 급여는 처음엔 인정하기 어려울 정도의 적은 금액이었지만, 점점 금액이 쌓이면서 은행 잔고는 늘어갔고 뭔가 자립한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언어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그녀는 외국어 수업에서 수석이었다. 단어 구사와 언어에 대한 자신의 적성을 알게 된 그녀는 곧 문예 창작 수업에 등록했다. 작문 수업을 받는 데 전념하기 위해 수공예 과정은 포기를 할 수밖에 없었지만, 글 쓰는 것에 대한 그녀의 흥미는 점점 커져서 그림을 그리거나 손으로 물건을 만드는 것은 쉽게 그만둘 수 있었다.
눈덩이가 굴러가듯 그녀의 이런 여러 가지 활동들은 점점 폭이 넓어지고 깊이도 깊어져서 결국 여가 시간이라곤 전혀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일단 친구들을 사귀고 어울리기 시작하자 그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신이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천천히 그녀는 자신을 가두고 있던 조개껍질에서 빠져 나오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활동을 하다 보니 식사를 규칙적으로 하는 것을 잊기 일쑤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군살들이 눈 녹듯 사라지기 시작했고, 결국 옷을 모두 새로 구입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다소 뚱뚱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체격에서거의 뼈가 드러날 정도의 마른 체형으로 변해 버렸고, 통통한 볼의 살이 빠지면서 광대뼈가 도드라졌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이국적인 미녀로 변해 갔다. 동그란 턱살이 없어지며, 원래도 컸던 그녀의 푸른 눈은 더욱 크게 강조가 되었고, 조각한 듯 도드라진 광대뼈 덕분에 그녀의 얼굴은 동양적인 분위기를 띠었다. 살이 쪘을 때도 그녀는 나름대로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살이 빠지면서 그녀는 사람들이 돌아볼 정도로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인이 되었다.
고전적인 미인은 아니지만 이국적인 분위기 때문에 더욱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손질할 시간이 없는 덕에 점점 자라게 된 머리카락을 거치적거리지 않게 뒤로 질끈 동여매고 다니기 시작했고, 풀었을 때는 삼단 같은 머리칼이 그녀의 등줄기를 타고 폭포처럼 흘러내려 허리까지 출렁거렸다.
신체적인 변화와 더불어 그녀의 태도도 바뀌었다. 확고한 자신감은 생겼고, 좀 더 열린 사고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날카로운 지성과 유머러스한 위트를 가지고 있었던 그녀는 사람들로 둘려 쌓인 인기인이 되었다. 이렇게 그녀 스스로인생을 즐길 수 있게 되자 라이에 대한 생각도 점점 덜하게 되었다.
별거 기간이 1년쯤 되었을 때 그녀는 자신이 비로소 성숙한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자신의 마음도 그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주일마다의 도착하던 라이의 수표에서 그의 사인을 보던 그녀는 그를 생각만 해도 찢어질 것처럼 아팠던 고통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뿐 아니었다. 만일 라이가 그녀에게 돌아오고, 그래서 현재의 흥미로운 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에 대한 생각도 해 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 그녀 자신을 다듬어 라이 베인즈에 어울리는 성숙한 여인이 되고 나니, 막상 그녀 자신이 그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그를 통해 삶을 살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제는 그녀 자신의 삶이 있으니까.
마치 감옥에서 풀려난 것 같았다. 자신에게도 자립할 수 있고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모든 것이 황홀하게 변했다 독립은 달콤한 현기증을 불러일으키는 와인처럼 그녀를 잠식했고, 그녀는 독립의 맛에 깊이 취했고 흥분했다. 이제야 그녀는 라이가 왜 그녀보다 일을 우선으로 생각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라이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도 아찔한 흥분에 중독이 되었다. 솔직히 별 재미도 없던 그녀와 함께 살았던 라이가 이상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커다란 안도감으로 그녀는 라이의 수표를 그가 일하는 회사의 주소로 다시 돌려보내며, 그녀에게 직업이 생겨 스스로 먹고 살 수 있으므로 생각해 준 것은 고맙지만 더 이상 그의 지원이 필요하지 않다는 정중하면서도 간단한 메시지를 동봉했다. 그것이 그들 사이에 마지막으로 이루어졌던 의사 표현이었다. 라이가 그녀의 메시지에 대한 답신을 하지 않았으므로 일방적인 의사표현이었지만… 어쨌든 수표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그리고 샐리의 인생에 운명이라고 해도 좋을 사건이 일어났다. 그녀가 운전해서 가고 있던 교각이 붕괴되었던 것이다. 다행히 그녀의 자동차는 물속으로 빠지지 않을 정도로 떨어져 있었지만, 그녀 뒤의 몇 번째 인가의 차는 그런 운이 없었다. 무슨 일을 하는지 의식도 하지 못한 채 그녀는 생존자들의 구출을 돕고 있었고,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인터뷰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 현장이 마무리된 후, 그녀는 자신의 일하던 신문사의 사무실로 갔고, 자신의 생생한 목격담도 포함하여 인터뷰 기사를 작성해 편집자에게로 가져갔다. 그것은 곧 1면을 장식하는 특종이 되었다. 드디어 기자로서의 새로운 직함을 갖게 된 것이었다.
이제 스물여섯 살이 된 그녀는 학위를 기지고 있으며 지명도가 높은 주간 뉴스 잡지의 기자라는 직업을 갖고 있다. 물론 새로운 경험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과 열망도 전혀 시들지 않았다. 이제는 라이가 위험을 무릅쓰고도 그의 직업을 그만둘 수 없는 이유를 너무도 잘 이해했다. 그녀 또한 심장이 미칠 듯이 두근거리는 강렬한 흥분과 위험을 즐기고 있었다. 지상에서 반군들이 자동 소총으로 하늘을 향해 미친 듯이 총알을 난사하는 가운데 헬리콥터에서 뛰어내리는 스릴이나, 단 한 개의 엔진만이 작동을 하는 비행기에서 탈출하는 흥분, 어려운 작업을 수행했을 때의 성취감을 대신해 줄 만한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는 다른 그 무엇에서도 그런 기분을 찾을 수가 없었다. 예전에 살았던 집은 세를 주고 뉴욕 시내의 방이 2개 있는 아파트를 얻어 살고 있지만, 그곳은 잠시 휴식을 취하는 장소에 불과했다. 화분이나 애완동물 또한 전혀 기르지 않았다. 지구의반대편에 가서 일하고 있는 그녀를 대신해서 과연 그 누가 그 생물들을 돌봐 줄 것이란 말인가? 또한 한 장소에 오래 머무른 적이 없었으므로 낭만적인 연애사건과는 전혀 관계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친구들과 동료들만은 그녀주위에 가득했다.
단연코 아니었다. 마침내 잠에 빠져들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졸린 머리로 회상하며 그녀 인생에 라이를 다시 되찾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녀가 즐기고 있는 현재의 생활에 라이는 불협화음을 일으킬 뿐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면…. 그가 설령 그녀를 알아차린다 해도, 그녀가 하는 일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지난 7년간 그녀에 대해서 생각해 본적도 없는 사람이 아니었던가. 이제 와서 굳이 시작할 이유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