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화.
그 오빠들을 조심해 138화
하지만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의사가 에른스트에 도착했을 때쯤에는 나도 마음 한구석에 '그래도 혹시?' 하는 의심이 아주 조금 들긴 했다.
따지고 보면, 정말 100퍼센트로 확실한 일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원래 세상만사란 것이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 조심한다고 해도,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안 일어날 일은 안 일어나고, 다 그런 것 아니겠나.
솔직히 그래서 나도 의사가 오는걸 필사적으로 말리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으아, 혹시는 뭐가 혹시야! 역시 아니었잖아······!"
퍽퍽!
의사가 가고 난 뒤, 나는 잠깐 혼자가 된 틈을 타서 응접실 소파에 있는 쿠션을 몇 번 때렸다.
의사의 진찰에 의하면, 요즘 결혼식 준비 때문에 지속적으로 받은 피로가 쌓인 데다, 전날에 밤을 거의 새워서 기력이 떨어진 것,
또 아침부터 계속된 공복 상태 등등의 이유로 발생한 일시적인 울렁증이었다.
의사는 수분과 영양을 충분히 섭취해 주고 적당한 휴식을 취하면 금방 괜찮아질 거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함께 있던 유진은 달리 아픈 곳이 있는 건 아니라 다행이라고 했지만 난 괜히 좀 뻘쭘해졌다.
그래서 이렇게 유진이 바깥의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쿠션에 민망함을 해소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똑똑.
"아가씨."
"들어와."
그러다 금방 하녀가 들어왔다.
"공작님이 피로연에는 다시 안 나와도 괜찮다고 하셨어요. 방으로 올라가서 쉬시겠어요? 옷 갈아입는 걸 도와드릴게요."
나는 거절하지 않고 그녀를 따라서 내 방으로 올라갔다.
솔직히 웨딩드레스만큼은 아니었지만 피로연 드레스도 실내에서 그냥 입고 있기에는 불편하긴 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결국 내 결백(?)은 입증되었지만,
하녀에게 들어보니 유진까지 나를 따라 자리를 비우고 난 뒤에 피로연장이 좀 시끄러워졌었나 보다.
원흉은 역시 카벨이었다!
'뭐?! 아기? 아기라고······?!'
그때쯤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을 들은 카벨이 경악해 외친 소리가 주변에 퍼졌던 것이다.
제 딴에는 내 걱정에 안절부절못하다가 놀라서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인 모양이던데······.
카벨, 이 눈치 없는 둘째 같으니······!
'조용히 말해, 형! 꼭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니까. 그냥 혹시 몰라서 의사한테 검사를 받아 본다는······.'
에리히가 카벨의 방정을 얼른 막으며 다시 설명해 줬다고 하지만 어디 둘째 목소리가 좀 크던가.
그래서 피로연장에 남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늘 에른스트에 경사가 겹치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알음알음 번졌다고 한다.
그래도 유진이 바로 상황을 수습한 덕분에 결혼식 피로연장이 또 다른 축하 장소가 되는 건 막을 수 있었다는데.
물론 둘째의 말을 듣고 그래도 혹시 하는 사람은 여전히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유진이 나서서 그냥 내가 결혼식 준비로 피곤해 몸이 잠깐 안좋아져 의사를 부른 거라고 하는데
거기다 대고 누가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의사도 생각보다 금방 돌아간 데다 또 이후에 다른 얘기도 없어서,
그때부터는 사람들도 그냥 카벨이 뭘 잘못 알았거나 본인들이 잘못 들었겠거니 생각하는 눈치였다.
나로서는 참 다행인 일이었다.
하마터면 그 많은 사람에게 있지도 않은 아이를 가지고 축하받을 뻔한 게 아닌가!
만약 그랬다가는 난 지금보다 열배, 스무 배는 더 창피해졌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신혼여행 계획도 원래대로 진행될 예정이었으니까.
솔직히 내가 진짜 아이를 가진 게 맞았다면 안정을 취해야 하니, 당장 먼 길을 떠나는 건 무리가 아니었겠는가.
"하리 언니, 미안!"
잠시 후, 루이제를 선두로 다른 사람들이 우르르 내 방에 찾아왔다.
가장 처음 내 헛구역질을 보고 오해한 루이제에 이어 바스티에 부인도 함께 나를 찾아와 멋쩍게 사과했다.
하지만 솔직히 그들에게 사과받을 일은 아니었다.
나도 입으로는 절대 아니라고 했지만 내심 속으로는 설마 하는 생각을 조금 가지고 있었으니까 말이지.
에리히는 그럴 줄 알았다며 김이 샌 눈치였고, 가장 크게 놀랐던 카벨은 어쩐지 안심한 건지 실망한 건지 모를 이상한 얼굴로 버벅거렸다.
참, 들어보니 데이지 템페르토는 함께 제도로 올라온 하녀가 갑자기 아파서 피로연이 시작하기 직전에 급하게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말도 없이 가서 미안하다고 그녀가 내게 전해 달랬다며, 카벨이 뒤늦게 생각난 듯이 알려주었다.
그래도 어쩌다 보니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만나기로 둘이 약속 비스무리한 걸 잡았다고 하는데······.
그걸 듣고 나는 별것도 아닌 일로 의사를 불러 창피했던 마음이 좀 뻥 뚫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와, 드디어 우리 카벨에게도 연애의 계절이 돌아온 건가? 그런 건가?
왠지 유진과 나도 결혼하고, 또 에리히도 루이제와 잘 되어 가는 것 같아서, 혼자만 외롭게 있는 둘째에게 더 신경이 쓰였었는데.
좋아, 이제는 정말 마음 놓고 신혼 여행을 갈 수 있겠어.
"하리, 몸은 정말 괜찮아?"
결국 정신없던 피로연 자리까지 다 정리되고 이제 정말 저택을 떠날 일만 남았을 때, 유진이 방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물리고 나한테 다가왔다.
"응, 쉬었더니 멀쩡해졌어."
오히려 오늘 하루 중에 가장 쌩쌩재졌다고 해도 될 것 같았다.
유진도 오늘 하루 종일 입었던 격식 있는 옷을 벗고, 나처럼 여행을 가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였다.
나는 은근히 좀 아쉬워졌다.
유진의 턱시도 입은 모습, 더 보고 싶었는데, 피로연 때 나하고 맞춰 입었던 정장도 결국 오래 못 봤고.
아니, 물론 지금도 멋있지만요. 사실 유진이 뭘 입어도 안 근사한 적은 없긴 하지만.
이건 꼭 내 남자라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정말이다!
"그럼 다행이고. 아까보다 얼굴이 괜찮아 보이긴 하는데."
그때, 나한테 다가온 유진이 잠깐 내 안색을 살피는 듯하다가 고개를 앞으로 기울였다.
앗, 그러고 보니까 오늘 이렇게 조용한 곳에서 단둘이 있는 건 처음이네.
물론 이제부터는 계속 둘만 있을거지만, 그래도 역시 반갑긴 했다.
다가오는 유진의 얼굴을 보고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하지만 내가 생각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다음 순간 툭, 하고 이마가 닿았다.
다시 눈을 번쩍 뜨자 가까이에 있는 유진과 눈이 마주쳤다.
"아까는 미열이 좀 있는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정말 지금은 괜찮네."
······뭐야. 열 재려고 그런 거야?
"어, 응. 괜찮다니까······."
나 혼자 설레발 친 게 머쓱해져서 먼저 고개를 슬쩍 뒤로 빼고 맞닿았던 이마를 괜히 손으로 문질렀다.
그때, 앞에서 부스러지는 듯한 낮은 웃음소리가 얕게 울렸다.
무심코 시선을 움직이자, 유진과 다시 눈이 마주쳤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뭘 생각하고 눈을 감은 거야? 귀엽게."
으아······! 들켰잖아!
그렇지 않아도 아까 일로 창피하던 것도 아직 남아 있던 터라, 나는 금세 얼굴이 홧홧해져서 카벨이라도 되는 것처럼 유치하게 우겨댔다.
"내가, 내가 뭘! 난 아무 생각도 안 했다, 뭐······ 읍."
그런 나한테 유진이 이번에는 정말 입을 맞췄다.
난 약간 심술이 나서 유진을 밀어내려는 것처럼 주먹을 쥐고 그의 팔과 가슴을 콩콩 때렸다.
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너무나 미약한 손짓이었다. 사실 그를 정말 밀어낼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기 때문이다.
유진도 그걸 아는지, 그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맞닿은 입술을 타고 나한테까지 전해져 왔다.
처음에는 장난처럼 얕던 입맞춤이 점점 깊고 진해졌다.
"하아······."
유진이 내 입술을 아프지 않게 깨물며 떨어졌을 때, 어느새 나는 침대에 몸을 파묻고 있었다.
그 위로 겹쳐진 유진의 온기가 오늘따라 뜨거웠다.
잠깐 입술을 뗐던 유진이 나한테 다시 키스했다.
"으음, 잠깐만······."
내가 숨차 하는 것을 알고 또 조금 쉴 틈을 주기는 했지만 그 후에는 더 짙게 입술이 겹쳐졌다.
나중에 완전히 키스가 끝난 후에, 유진이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속삭였다.
"꼭 꿈같아.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건가."
그의 말처럼, 내 눈앞에는 벅찬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일렁이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눈을 감았다 뜨면 전부 다 사라져 있는 게 아닌가 두려울 정도로 행복한데."
사실은 나도 유진과 비슷한 마음이었다.
그래서 유진의 목을 꽉 끌어안고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 진짜 오늘 결혼했어."
만약 이게 정말 다 꿈이었다고 하면 신이라도 용서하지 않겠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뒤이어 유진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그런데 나 있잖아."
그 순간 맞닿은 몸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좀 빨리 엄마가 되고 싶나 봐."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던 유진이 고개를 들었다.
지난번 신혼여행에 대해 얘기했을 때처럼 내가 이런 말을 할 줄 몰랐나 보다.
"······그래? 난 좀 천천히 갖고 싶었는데."
그는 아까처럼 가까이에서 나와 눈을 맞대 왔다. 그의 손이 내 얼굴을 부드럽게 쓸었다.
"너도 아직 어리고, 또 이제 막 결혼했으니까 같이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서."
혹시 내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오해를 부를 만한 말을 할까 그가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는 게 느껴졌다.
물론 유진이 나를 배려해 주고 있다는 걸 나도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아까 의사가 아니라고 해서 안심했어?"
마주한 얼굴에 약간 고민하는 흔적이 나타났다.
"정말 솔직하게?"
"솔직하게."
유진이 잠깐 입을 다물고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가 얕은 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반반이야. 우리가 좀 더 준비되었을 때 찾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니란 걸 알고 마음이 놓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조차 깜짝 놀랄 정도로 아쉽기도 했어."
그런 뒤 유진이 다소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아까 카벨 얼굴에 드러난 표정처럼."
큽,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우리는 아까 봤던 둘째의 얼굴을 떠올리며 같이 웃었다.
"사실은 나도 그랬어."
내 마음도 유진과 비슷했다.
지금 당장은 나도 준비가 덜 되어 있어 완벽한 엄마가 될 자신이 아직 없었다.
"나도 당장 지금을 얘기하는 건 아니야. 내년이나 내후년쯤에······."
하지만 머지않은 후일에는 유진과 나를 닮은 아이들이 에른스트에서 뛰놀았으면 좋겠다.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겠네."
유진도 나와 비슷한 상상을 했는지, 눈매를 부드럽게 휘며 웃었다.
"그래.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그렇게 조금씩 점점 더 행복해지자."
이어서 속삭인 그가 나한테 다시 달콤하게 키스했다.
시간이 되도록 방에서 나오지 않는 우리를 다른 사람들이 찾아와, 밖에서 문을 두드릴 때까지.
다가올 미래를 상상하는 것도 물론 행복한 일이었지만, 일단 오늘은 우리의 결혼 첫날이었다.
그러니 지금 당장은 신혼여행을 즐길 때였다.
그렇게 신혼여행지인 남쪽 섬으로 향하던 중,
선박에서 짐 가방을 정리하다가 내가 따로 챙겨온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를 유진에게 들켜 당황한 건 바로 그날 늦은 밤의 이야기.
그때 오묘한 얼굴로 웃던 유진이 정말 나 몰래 사놨던 웨딩드레스들을 꺼내 원할 때마다 마음대로 골라 입으라며 내게 준 것은
남쪽 섬의 별장에 도착한 후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에른스트에 모두가 기대해 마지않던 사랑스러운 축복의 아이가 찾아온 것은 좀 더 훗날의 일.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이기에, 언제까지나 따뜻하고 다정할 아름다운 봄날이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