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화.
그 오빠들을 조심해 136화
"오늘은 내가 깨우러 왔어. 어서 일어나세요."
루이제의 발랄한 목소리에 이어 차르륵, 옆쪽에서 커튼이 걷히는 소리가 들렸다.
맑은 아침 햇살이 침대 위로 내리쪼였다.
이상하다. 왠지 얼마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잠깐, 하지만 어젯밤에 루이제는 내 방에서 안 잤잖아?
그때쯤에는 나도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루이제에게 인사했다.
"루이제, 안녕. 좋은 아침이야."
잠결에 순간 헷갈렸지만 오늘 아침에 루이제가 나를 찾아온 건 이미 얘기가 되어 있던 일이었다.
그래. 오늘은 바로 내 결혼식 날이었다.
"응, 좋은 아침. 어제 설레서 잘 못 잤을 수도 있지만 이제 그만 일어나야 돼. 오늘 중요한 날이잖아."
루이제가 손뼉을 쳐서 바깥에 대기하고 있던 하녀들을 방으로 들였다.
그들은 나한테 다가와 얼굴에 따뜻한 물수건을 올려 주고 팔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목욕물에 향이 밸 동안 가볍게 마사지를 해드릴게요."
늘 이런 아침을 맞는 건 아니라, 나는 그 능수능란한 손길에 약간 어색하게 몸을 맡겼다.
"엄마도 금방 오신대."
"나 얼굴 안 부었어?"
"언니는. 매일 예쁘지만 오늘은 특히 더 예쁘니까 걱정 마세요."
루이제가 웃으면서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아를란타의 관례상 원래 결혼식 때는 같은 성별을 가진 가족이 아침부터 신랑 신부의 준비를 도와주며 행복을 빌어주는 게 보편적이었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에른스트에는 여자 어른이나 형제가 없었다.
그래서 아침 일찍부터 와준 루이제가 고마웠다. 잠시 후에 도착할 바스티에 부인도.
"루이제 사랑해."
날이 날이다 보니 마음이 찡해져서 충동적으로 고백하자 루이제가 까르르 웃으면서 맞장구쳐줬다.
"나도 사랑해, 하리 언니. 오늘 결혼식장에 내가 난입해도 이해해."
" '이 결혼 반대요!' 외치기라도 할거야?"
"응. '내가 바로 하리 에른스트의 진짜 애인이다!' 하고 외칠 거야."
루이제와 주거나 받거니 장난을 치는 동안 은근히 산란하던 마음이 편해졌다.
하녀들이 준비해 준 꽃잎 둥둥 떠 있는 향기로운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 나와,
치장하기 위한 방으로 옮기고 난 후에는 바스티에 부인까지 와서 합세했다.
"하리야, 좋은 아침이구나. 간밤에는 잘 잤니?"
"어서 오세요, 아주머니. 오늘 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얘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 결혼식인데 당연히 내가 와야지. 조금전에 유진하고도 인사하고 왔어."
"엄마, 혹시 오늘 결혼식 중간에 주인공이 바뀌어도 이해해. 내가 신부 데리고 사랑의 도피를 할지도 모르거든."
"응? 지금 루이제가 한 말은 또 뭐니?"
우리는 잠깐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본격적으로 결혼식 준비를 시작했다.
오늘 유진과 내 결혼식은 에른스트 저택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원래 후보로 예정된 장소는 전에 연회를 열었던 카젠타 홀을 비롯해서 몇 군데 있었지만 내가 여기서 하고 싶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에른스트는 우리 둘 다에게 의미 깊은 곳이었으니까.
사실은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가기 전에 유진에게 살짝 아침 인사라도 하고 오고 싶었는데,
바스티에 부인이 원래 결혼식 날에는 예식 전까지 신랑을 안 봐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거라며 강력히 말려서 그냥 포기했다.
루이제는 요즘 세상에 그게 무슨 촌스러운 얘기냐면서 구시렁거리다가 결국 바스티에 부인에게 '네가 뭘 알아!' 하는 구박과 함께
등짝을 한 대 얻어맞았다.
그렇게 한창 바쁠 때, 문밖에서 둘째와 셋째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루이제가 '올 것이 왔군!' 하는 얼굴로 문을 열고 소리쳤다.
"신부는 준비할 게 많으니까 다들 방해하지 말고 저리 가 있어! 특히 카벨 오빠!"
"내가 뭘! 난 그냥 하리한테 제일 처음 결혼 축하 덕담해 주고 싶어서······."
"그건 나랑 엄마가 이따 신부 방문 열기 전에 제일 처음 해줄 거니까, 카벨 오빠는 당장 에리히 오빠 따라가서
그 불어터진 붕어 눈이나 어떻게 좀 하셔."
"내 눈이 뭐! 내 눈이 뭐 어때서······!"
"거봐, 형. 내가 지금 한창 바쁠테니까 눈 붓기나 가라앉히자고 했잖아."
쿵!
곧장 문이 닫히고, 루이제가 돌아왔다.
"카벨 오빠 눈 부었어?"
"응, 언니 결혼한다고 진짜 밤새 울었나 봐."
"카벨답구나."
루이제는 완전히 학을 뗀 눈치였지만 바스티에 부인은 귀엽다는 듯이 후후 웃었다.
나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작게 웃었다.
하여간에 우리 둘째는. 결혼한다고 내가 어디 가는 것도 아닌데 정말 못 말린다니까.
"저러다 하리 언니 신혼여행까지 따라간다고 하는 거 아냐?"
설마 카벨이 진짜 그러지는 않겠지만 루이제가 저런 생각을 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정도로 우리 둘째는 극성맞은 부분이 있었으니까.
그래도 금방 밖이 조용해진 걸 보니까, 에리히가 카벨을 데리고 갔나보다.
저 두사람도 각자 단장하랴, 유진에게 가보랴, 거기에 이어 곧 들어오기 시작할 손님들을 맞이하랴, 그리 한가하지 않을 텐데.
물론 나도 바빴다.
오전 시간은 살면서 겪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지나간 것 같았다.
내 치장을 도와주는 사람들도 몇 명이나 달라붙어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공들여 꾸며주었다.
"세상에, 정말 예쁘구나, 하리야."
"언니, 진짜 나랑 결혼할래?"
웨딩드레스를 입고 완전히 치장을 끝마친 나는 내가 봐도 만족스러울 정도로 예뻤다.
왠지 감개무량해져서 나는 거울을 빤히 쳐다보았다.
오늘이 내 결혼식이라니. 왠지 믿기지가 않았다.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한다. 아니, 너희는 분명 행복하게 잘 살 거야."
신부 대기실로 옮겨 가기 전에 바스티에 부인이 내 손을 꼭 붙잡고 따뜻한 축사를 전해주었다.
그녀도 감상적인 마음이 드는지, 나를 보는 눈이 젖어 있었다.
"감사해요, 아주머니."
나도 덩달아 눈이 촉촉해지는 것을 느꼈다.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왠지 말이 잘 안 나와서 결국은 그 한마디밖에 전하지 못했다.
사실 바스티에에는 참 고맙고 미안한 게 많았다.
전 에른스트 부부가 갑작스럽게 타계하고 나서, 우리를 애정과 신의로 돌봐준 바스티에의 마음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엄마, 하리 언니 울리면 안 돼. 화장 다시 해야 한단 말이야."
루이제가 지금은 절대 울면 안 된다면서 서둘러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하지만 그러면서 루이제도 오래전부터 나를 친언니처럼 생각하고 있었다고, 꼭 행복하게 살라고 덕담해줘서 마음을 찡해지게 만들었다.
"하리야!"
방문을 열자마자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기다렸다는 듯이 카벨이 들이닥쳤다.
그는 오랜만에 멀끔하게 꾸민 차림새였다.
바스티에 부인과 루이제는 우리 남매들끼리의 시간을 위해 조용히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런데 둘째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치장한 나를 보자마자 자리에 우뚝 멈추어서는,
더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무어라 말을 더 잇지도 못한 채 표정만 오락가락 이상하게 변화시켰다.
그런 그를 향해 나는 웃어 보였다.
"카벨 오빠, 나 축하 안 해줄 거야?"
그제야 카벨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 뜨리고서 나한테 가까이 다가왔다.
"겨, 결혼 축하해. 으흡······."
하지만 결국 눈물을 삼키는 데 실패했는지, 카벨이 울먹이면서 말했다.
"진짜, 세상에서 제일, 제일 행복해져야 돼······. 크흡, 누구든 네 눈에 눈물 빼면······ 형이라 해도 내가, 우흑······.
용서하지 않을······ 크으흑! 흐, 으헝······!"
나는 결국 산만한 덩치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기 시작한 카벨을 안아 주었다.
"고마워, 카벨 오빠. 나 행복하게 살게."
"카벨 형, 진짜······. 이런 날 꼭 그렇게 눈물 바람을 해야겠어?"
그때 막 안으로 들어온 에리히가 나를 부여잡고 있는 카벨을 보고 기함해 달려왔다.
"아니, 기분은 알겠는데 일단 좀 떨어져 봐. 하리가 형 눈물 콧물로 범벅된 웨딩드레스 입고 사람들 앞에 나가면 좋겠냐고."
"크흐, 허헝······. 아니야, 으흡, 그러면 안 되지! 훌쩍."
에리히의 말에 정신을 차린 카벨이 서둘러 나한테서 떨어졌다.
과연 그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었다. 하지만 에리히의 걱정처럼 내 드레스에 묻지는 않았다.
크흠, 내가 여령껏 카벨의 머리통을 잘 끌어안았기 때문이지.
"얼굴이 그래 가지고 손님들 맞을 수는 있을지 모르겠네."
"흑, 크흥······. 난 결혼식 전까지 하리 옆에 있을 거야!"
"그럼 일단 그 얼굴이나 좀 닦고 와."
카벨은 한시라도 내 옆을 떠나기 싫은 눈치였지만 그래도 제 꼴이 심상치 않다는 건 느꼈는지 얼굴을 가리고 후다닥 방을 뛰쳐나갔다.
언제나 그랬지만, 카벨이 떠난 자리는 꼭 폭풍이 한바탕 휩쓸고 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카벨처럼 오늘따라 예쁘게 꾸민 에리히를 보며 웃었다.
"오늘 멋있다, 에리히. 유진 오빠한테는 다녀왔어?"
"어, 조금 전에 다녀왔어. 카벨 형은 나보다 먼저 갔었던 것 같고."
짤막하게 대답한 에리히가 잠깐 입술을 다물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결국 이런 날이 오네."
이윽고 지나가듯이 내뱉어진 그의 목소리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녹아 있었다.
그러다 곧 에리히의 얼굴에 가느다란 미소가 그려졌다.
"오늘 예쁘다. 형이랑 같이 오래오래 행복해."
지금까지 본 에리히의 미소 중에 가장 예쁜 미소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들어 본 그의 말 중에 가장 따뜻한 진심이 느껴지는 말이기도 했다.
"고마워, 에리히."
잠깐 목이 막혀서 쉽게 말문을 못 열다가, 이내 나도 그를 따라 웃으며 화답했다.
"그런데 거기에 너랑 카벨 오빠도 넣어야지. 우리 다 결혼하고 나이가 들어도 같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지낼 거잖아."
"이런 날에는 우리 안 껴줘도 돼."
우리는 일부러 장난스럽게 한마디씩을 주고받았다.
카벨이 돌아오고 나서 에리히는 다시 유진에게 갔다.
바깥은 어느새 시간이 되어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한 손님들로 다소 시끌벅적했다.
둘째는 아예 손님들에게 관심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나한테 찰싹 달라붙어 있었고, 유진과 에리히가 지금쯤 그들을 맞고 있을 터였다.
바스티에 부인과 루이제가 가볍게 배를 채우라며 간식거리를 가져왔지만 긴장해서 그런지 먹히지 않아서 그냥 물만 좀 마셨다.
"하리 언니, 이제 시간 다 됐어."
마침내 신부 대기실을 나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카벨은 한 발 앞서 루이제가 질질 끌고 나갔다.
"어서 와, 하리."
문이 열리자마자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유진이 나를 데리러 왔다.
나와 마찬가지로 결혼식 예복을 입은 그는 좀 낯선 모습이었다.
물론 이전 생에 로자벨라와 결혼할때도 이와 비슷한 예복을 입긴 했었지만······.
솔직히 그날 결혼하는 유진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던 것 같다.
당시에는 나도 내 감정을 잘 몰라서, 끝까지 내가 주는 결혼 선물을 받기 싫다며 정 없이 거리를 두는 그에게 마음이 상해
그런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하지만 지금은 그때 왜 유진을 똑바로 볼 수 없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과거의 날에는 결코 찾아볼 수 없었던 다정한 미소를 입가에 그리며 나를 보는 유진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오늘 정말 예쁘다. 물론 그러지 않은 날이 없었지만."
나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해졌다.
"유진 오빠도 오늘 진짜 멋있어. 나한테 잘 보이려고 그렇게 예쁘게 꾸몄어?"
"응. 네 눈에 근사해 보이고 싶어서."
"영광이네요, 유진 에른스트 공작님."
"저야말로 이렇게 아름다운 신부를 맞을 수 있어 영광입니다. 하리 에른스트 양."
내가 먼저 장난을 걸자 유진이 흔쾌히 호응해 줬다.
사실 이건 비밀인데, 어젯밤에는 혹시 또 잠들었다 눈을 뜨면 다시 과거로 돌아가 있을까 봐 밤에 쉽게 눈을 붙이지 못했다.
물론 오늘이 내 결혼식이라고 생각하니까 두근거려서 못 잔 것도 있지만.
그런데 이렇게 결혼식 당일이 되어 유진을 앞에 두고 있으니, 감회가 남달랐다.
유진이 눈매를 휘어 부드럽게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도 그를 따라 미소 지으면서 기꺼이 나를 위해 준비된 손을 붙잡았다.
"가자, 하리."
"응."
오늘은 내 결혼식.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부가 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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