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그 오빠들을 조심해 133화
이제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품이 나를 그 안에 숨 막힐 정도로 세게 가두었다.
"······숨만 쉬어도 예쁜데, 그런 예쁜 말까지 하면 나더러 어쩌라는 건지."
내 머리에 그의 고개가 툭 기대졌다.
"놔주기 싫게."
고막을 울리며 속삭여지는 낮은 목소리에 귀가 간지러웠다.
그리고 이어진 말에 나는 풋 웃으며 유진을 마주 끌어안았다.
"결혼식까지 너무 오래 남은 것 같아. 그냥 앞당길까?"
"지금도 최대한 빨리 잡은 거잖아. 여기서 더 앞당기면 당장 내일 결혼하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그것도 좋은데."
물론 나도 좋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유진도 이 이상 날짜를 당기는 건 무리라는 걸 알 테니 사실상 그냥 아쉬움에 하는 소리인 셈이었다.
우리는 누가 누가 더 세게 끌어안나 대회를 하듯이 잠깐 서로를 꽉꽉 껴안는 시간을 가졌다.
"하리야, 오빠 왔어!"
그새를 못 기다리고 카벨이 당장에라도 계단을 올라올 것처럼 우당탕탕 발소리를 냈다.
아이고, 저러다 진짜 페니 깨겠네.
"아, 진짜. 카벨 형, 내가 조용히 하랬지?"
"헉, 미안. 깜빡했어. 이제 진짜 조용히 할게. 이 정도로 작게 말하면 되나?"
"더 낮춰."
"이 정도?"
"형은 그냥 아예 입을 열지 마."
에리히가 또 카벨에게 야멸차게 뭐라고 한 소리 하는 것도 들렸다.
이제는 진짜 내려가야 할 시간이었다.
유진과 나는 웃으면서 같이 손을 맞잡고 모두가 있는 1층으로 향했다.
***
오늘은 아주 중요한 날이었다.
다름 아닌 내 웨딩드레스를 고르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얼마 전부터 몸매 관리를 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노력은 매일 수포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우리 집 삼형제가 '네가 뺄 살이 어디 있느냐'면서 끼니때마다 자꾸 나한테 이것저것 먹이려 들어서였다.
사실은 오늘 점심도 굶으려고 했는데, 여느 때처럼 내 노력은 장렬하게 실패했다.
심지어 오늘은 계속 서서 드레스를 갈아입어 보려면 체력이 축나지 않게 든든히 먹어야 한다면서 루이제까지 합세해 나한테 밥을 먹였다.
루이제, 너만은 믿었는데······!
많이 먹어서 배가 나온 상태로 웨딩드레스를 입어 보기는 싫었단 말이야!
가뜩이나 요즘 잘 먹어서 전보다 살이 오른 것 같은데.
다들 나한테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해줬지만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결국 의상실에 가는 시간이 점심 이후로 미뤄진 건 내가 늦잠을 잤기 때문이니 남 탓할 것도 없었다. 으흑.
내가 웨딩드레스를 맞출 곳은 역시 퀸 아라벨라 의상실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제는 과거처럼 아를란타에서 제일 인기 있어진 곳이라 이렇게 통째로 가게를 예약하려면 어마어마한 돈을 지불해야 했다.
한참 전부터 미리 약속을 잡아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그런데 고작 늦잠 때문에 예약 시간을 늦추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내가 정신 차리고 아침에 제때 일어났어야 하는 건데.
하지만 의상실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유진은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어차피 우리가 한 달 내내 빌렸으니까 아무 때나 가도 상관없지."
"뭐? 가게를 한 달 내내 빌렸다고?"
처음 듣는 소리라 순간 내가 잘못들었나 싶어 반문했다.
하지만 유진은 당연한 일이라는 듯이 담담한 태도였다.
"여유롭게 고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무엇보다도 네 마음에 들어야 하니까, 시간은 신경 쓰지 말고 천천히 살펴봐.
오늘 중에 다 보기 어려울 것 같으면 내일이나, 언제든 네가 오고 싶을 때 또 오면 되니까."
나는 잠깐 할 말을 잃었다.
웨딩드레스 하나 고르겠다고 가게를 한 달 내내 통째로 빌리다니, 이 무슨 권력 낭비, 돈 낭비랍니까?
가만, 혹시 지난 생에 내가 요하네스와 결혼할 때에도 이랬나?
그때도 의상실을 미리 예약해 뒀으니 언제든 나 편할 때 드레스를 보러 가면 된다고 말했던 것 같긴 한데······.
혹시 그때도 사실은 한 달 내내 예약했다거나 그런 거 아냐?
갑자기 좀 수상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걸 지금의 그들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말이야.
게다가 결혼식 웨딩드레스를 보러 가는 길에 옛 남자와의 결혼 준비 과정을 되새김질하는 것도 뭔가 좀 아닌 것 같아서
지난 일은 그만 생각하기로 했다.
"언니! 진짜 엄청 예뻐!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아! 완전 여신님이야!"
어쨌든, 의상실에 도착해 나는 도감으로 미리 살펴봤던 웨딩드레스들을 직접 입어보았다.
루이제가 제일 먼저 호들갑을 떨며 격렬한 반응을 보여줬다.
이번 생에서는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는 게 처음이라 좀 낯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더군다나 그때보다 보는 사람도 많았고.
나는 슬쩍 유진을 쳐다봤다. 다른 사람보다 그의 반응이 제일 궁금했다.
"어때?"
"아."
유진은 꼭 혼자만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미동 없이 굳은 채 나를 보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비로소 현실로 돌아온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마침내 그가 천천히 입술을 열어 말해 주었다.
"예뻐. 굉장히."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는 눈이 오롯한 진심을 담고 있어서 나는 좀 부끄러워졌다.
"뭐······. 괜찮네. 나쁘지 않은데?"
에리히도 유진의 뒤를 이어 짤막하게 평했다. 하지만 이건 에리히 언어로는 거의 최상의 칭찬이었다.
그런데 어째 우리 집 둘째가 이상하게 조용한데?
그때 웬 울먹이는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
"하리 정말, 정말 예쁘······."
"뭐야, 형 울어?"
모두의 시선이 카벨에게 향했다.
그는 에리히의 말처럼 촉촉해진 눈을 글썽이며 나를 보고 있었다.
앗, 이건 데자뷔인가. 가, 갑자기 지난 생의 기억이 스쳐 지나가는데요?
"아니, 오늘이 결혼식도 아니고 그냥 웨딩드레스 좀 입어보는 것뿐인데 울긴 왜 울어?"
에리히가 황당하다는 듯이 카벨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카벨은 에리히의 입에서 나온 결혼식이란 말에 오히려 더 울컥한 눈치였다.
"크흡, 그, 그 조그맣던 애가 언제 벌써 이렇게 커서, 우흑, 결혼한다고 웨딩드레스도 입고······. 정말, 흡, 정말 나는······ 으, 으흐허엉······!"
그렁그렁한 눈으로 말을 잇던 카벨이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오빠!"
"카벨!"
"아, 형!"
덩치도 산만한 남자가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울면서 문을 박차고 나가는 모습은 모두의 뇌리에 깊게 각인될 정도로 참 인상적이었다.
"아유, 저 오빠 또 시작이네."
루이제가 쯧쯧 혀를 찼다.
아흑,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역시 좀 남사스럽구나, 둘째야.
지금 벌써 저러면 진짜 결혼식 때는 어떨지 모르겠네.
전날 밤새 술 먹고 울고는, 붕어같이 퉁퉁 부은 눈으로 결혼식장에 오는 거 아니야?
"카벨 형 진짜 밖에서는 좀 적당히 하지, 하여간 집안 망신 다 시킨다니까.
내가 나가볼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계속 고르고 있어."
에리히가 별 수 없다는 듯이 카벨을 달래러 나갔다.
"언니, 이번엔 이거 입어 봐."
나는 카벨이 신경 쓰였지만 루이제는 오히려 조용해져서 좋다며 나한테 이것저것을 입어 보라고 권했다.
의상실의 사람들도 거기에 가세해 다른 드레스를 더 추천해 줬다.
"신부님께서 워낙 아름다우셔서 뭐든 다 잘 어울릴 거예요. 특히 그 달빛 같은 고운 은발과 신비로운 보라색 눈동자가 굉장히 아름다우셔서······."
그들은 내가 뭘 하나 입어볼 때마다 굉장히 열렬한 찬사를 쏟아냈다.
처음에는 좀 부끄러웠지만 이것도 듣다 보니 익숙해지더라.
전부 립서비스의 달인들이라, 정말 진심인 것처럼 말해줘서 솔직히 기분도 좀 좋았다.
크흠,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법이니까 말이지.
"역시 그냥 보는 거랑 직접 입어보는 거랑은 또 다르네. 의외로 이게 더 낫지 않아?"
"응, 이게 더 화사해 보이네. 그런데 이 부분은 이게 더 나은 것 같은데, 이렇게 둘이 합치면 어때?"
생각보다 마음에 드는 게 많아서 하나만 고르기가 까다로웠다.
유진의 의상은 먼저 내 드레스를 고른 다음에 거기에 어울리게 맞춤 제작하기로 했다.
그래서 유진에게도 물었더니······.
"전부 다 예뻐."
정말 진지한 얼굴로 고민하다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하나만 고르지 못하겠는데 그냥 다 살까?"
아, 아니. 웨딩드레스를 수십 벌 사서 뭘 어쩌려고요······.
"결혼식은 한 번인데 이걸 다 사서 언제 입어?"
피로연 드레스라면 또 몰라도, 웨딩드레스는 식장에 들어갔다 나올때나 입는 거 아닌가.
그러자 유진이 또 잠깐 무언가를 생각하는 얼굴로 나를 보다가, 상체를 숙여 내 귀에 대고 나한테만 들릴 정도의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랑 둘이 있을 때 입으면 되지."
나는 움찔했다.
둘이 있을 때······?
그, 그거 왠지 순수한 의미가 아닌 것처럼 들리는데?
그냥 내가 혼자 오해하는 거겠지? 하하, 아무래도 빨강빨강한 책을 너무 많이 봤나 봐······.
"신혼여행 때 입어도 되고."
"신혼여행 때 이런 걸 어디서 입으라고······."
그러자 유진이 왜 입을 데가 없냐는 듯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말했다.
"침실이라든가."
끼악!
나는 얼굴이 홧홧해지는 걸 느끼며 유진의 팔을 찰싹 때렸다.
엷은 웃음이 담긴 그의 눈을 보니 역시 장난이었던 것 같긴 한데.
그래도 그렇지! 신성한 웨딩드레스를 두고 그런, 그런 야시꾸리한 발언이라니!
그런데······.
나도 정말 내가 이럴 줄 몰랐지만 상상해 봤더니 왠지 좀 혹하긴 해서 괜히 더 얼굴이 뜨끈거렸다.
말도 안 돼. 나 사실은 이런 취향 이었어?
하지만 침실에서 유진이 내 웨딩드레스를 벗기는 상상을 하면······.
악, 으악! 난 몰라. 안돼, 그만 생각해!
"하리 드레스 아직 안 골랐지? 나도 같이 볼 거야······!"
다행히 그때 카벨이 들이닥쳐서 살았다.
그 뒤에는 에리히도 함께였다.
밖에서 충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들어온 듯, 카벨의 얼굴에 더는 눈물방울이 달려 있지 않아다.
하지만 벅벅 문지를 듯이 벌게진 눈가를 보면, 누구나 그가 울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터였다.
"카벨, 어서 와."
"카벨 오빠, 기다리고 있었어."
유진과 나는 함께 그를 반겨 주었다.
카벨을 기다리느라 아직 웨딩드레스를 최종 결정하지 않고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빨리 와. 웨딩드레스 같이 골라야지."
그러자 카벨이 또 울컥한 듯 와락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눈에 힘을 빡 주고 눈물을 참아냈다.
"에리히도 이리 와."
에리히는 카벨을 달래느라 녹초가 된 듯, 폭 한숨을 내쉬며 뒤에서 카벨의 등을 밀었다.
"언니가 에른스트 말고 다른 데로 시집갔으면 진짜 장난 아니었겠다. 멀리 가는 것도 아닌데 저러네."
다가온 루이제가 헛웃음을 흘리면서 속닥거렸다. 나도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진짜. 예전이랑 달리 지금은 결혼해도 에른스트에 계속 있을 텐데 이러네.
그때는 지금보다 다들 나이도 더 들었었고, 또 둘째가 먼저 결혼했었는데 지금은 그것도 아니라 더 이러는 건가?
어쨌든, 역시 카벨은 카벨다웠다.
이후에도 몇 번인가 고비가 온 모양이었지만 카벨이 얼굴에 온 힘을 주며 눈물을 참아내서 우리는 또 그를 달래느라 진을 빼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게 소란하지만 다정한 하루가 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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