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화.
그 오빠들을 조심해 132화
[ 외전 4. 두 사람을 위한 웨딩 벨이 울리면 ]
"······어나."
꿈결처럼 귓가에 울리는 소리에 나는 베개에 얼굴을 더 깊이 파묻었다.
창가에서 짹짹 새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침대는 포근하고 햇빛은 따뜻했다. 그래서 이대로 좀 더 자고 싶었다.
"일어나, 하리 언니!"
하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내가 더 깊이 잠들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으음······ 루이제?"
나를 깨운 사람은 루이제였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제 저녁에 루이제가 오랜만에 놀러 와서 내 방에서 같이 잤었지.
루이제가 모처럼 부린 어리광이라 나도 흔쾌히 그녀에게 방문을 열어주었다.
그러고 나서 밤늦게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재미있게 나누다가 어느 순간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루이제는 원래 베개에 머리만 베면 잠들어서 이런 식으로 같이 밤을 새운다거나 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어제는 단단히 마음먹고 왔는지, 루이제가 꽤 늦게까지 버텨서 생각보다 길게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간밤에는 유독 단잠을 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뭔가 되게 인상적인 꿈도 꾼 것 같았다.
그런데 무슨 내용이었는지 어째 생각이 잘 안 나네.
누군가 내 행복을 간절히 기원했던 것 같은 느낌만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뻑뻑한 눈을 비비면서 루이제에게 물었다.
"루이제, 왜 벌써 일어났어? 지금 몇 시야?"
"벌써가 아니야, 언니! 지금 시계 보니까 10시인데."
뭣?!
나는 깜짝 놀라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루이제도 지금 막 눈을 떴는지 나처럼 부스스한 모습이었다.
"진짜 10시야? 왜 아무도 깨우러 안 왔지?"
"모르겠어. 일단 하녀 부를게."
루이제가 설렁줄을 당기자 얼마 안돼서 세숫물을 든 하녀들이 방으로 들어왔다.
"일어나셨어요, 아가씨들."
"응, 좋은 아침이야."
······가 아니라!
난 반사적으로 인사한 뒤 급히 물었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안 깨웠어? 다들 기다리고 있는 거 아니야?"
"공작님께서 깨우지 말라고 하셨어요.
의상실 방문 시간도 아침 일찍 미리 연락해서 오후로 늦추었으니 걱정 말고 여유롭게 준비해도 괜찮다고 말씀하셨답니다."
웃음기 어린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마음이 좀 놓였다.
아, 예약 시간을 늦추었다니 다행이다. 하지만 역시 내가 늦잠을 자서 이렇게 된 거니까 겸연쩍긴 하네.
"그렇구나. 지금 다들 뭐 하고 있어?"
"공작님과 둘째 도련님은 외출하셨고, 셋째 도련님은 1층에 계세요."
다들 우리가 일어나기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게 아니라 셋 중에 둘은 다른 볼일을 보러 나갔다니 그나마 마음이 좀 편해졌다.
하지만 그래도 혼자 있는 에리히에게 일단은 얼굴을 한번 비쳐야 할 것 같아서 먼저 대충 세수만 하고 아래로 내려갔다.
"에리히."
"뭐야, 해가 중천에 떴는데 이제 나오네."
에리히는 혼자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미안, 기다렸어?"
"아니. 어제 둘이 같이 방에 들어갔을 때부터 이럴 줄 알았어."
오잉, 어떻게 알았지?
평소에 루이제랑 이런 식으로 늦잠을 잔적까지는 없었는데?
내 의문을 눈치챈 듯이 에리히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루이제가 거의 한 달 내내 얼마나 벼르고 있었는데. 다음에 놀러 오면 너랑 정말 밤새 같이 놀 거라고
매일 귀에 박힐 정도로 떠들어서, 어제 저녁에 갑자기 들이닥쳤을 때는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싶었지."
아하. 그제야 나는 상황을 이해했다.
왠지 그런 것 같기는 했지만 정말 밤샐 마음을 단단히 먹고 왔었구나, 루이제······.
아니, 그나저나.
지금 에리히 말이 굉장히 의미심장 하지 않은가?
루이제의 말을 거의 한 달 내내 매일같이 귀에 박힐 정도로 들었다니. 흐으응. 요거, 요거.
요즘 들어 부쩍 둘이 자주 같이 어울려 다니는 것 같더니만, 우리 눈을 피해서 거의 매일 만났었단 말이야?
"잠깐. 뭐야, 그 요상한 눈초리는?"
눈치 빠른 셋째가 내 시선을 알아차리고 눈을 슬그머니 치켜떴다.
"너 또 이상한 생각하는 거지?"
"아니? 아닌데?"
"아,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거 아니라고. 그냥 쟤가 심심하다고 몇 번 찾아와서 같이 좀 어울려 준거야."
"흐흥,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러네."
에리히가 신경질을 부리는 척했지만 진짜는 아니었다.
나는 그걸 느끼고 비죽 새어 나가려는 웃음을 참았다. 여기서 내가 진짜 히죽거리면, 저 새침한 성격에 괜히 성질을 낼지도 몰랐으니까.
나는 이쯤 하기로 하고 에리히에게 일정이 늦춰진 것을 사과했다.
"어쨌든 늦잠 자서 미안."
"됐어. 오히려 카벨 형은 신났던데."
그러자 에리히가 퉁명스러운 어투로 지나가듯이 말했다.
"자기만 오전 근무 있어서 억울했는데, 오후로 시간이 미뤄져서 아예 처음부터 같이 드레스 고를 수 있어서 좋다고 아까 팔랑거리면서 나갔어.
카벨 형 징징거리는 소리 안 들어도 돼서 잘 됐잖아?"
이 녀석, 아닌 척하면서 내가 신경쓸까 봐 배려해 주는 것 좀 보게.
마음이 절로 따뜻해져서 에리히를 보고 웃었다.
"그래, 카벨 오빠 오면 같이 점심먹고 나가면 되겠다. 페니는 지금 자?"
"어. 새벽에 잠들어서 아직 안 일어났어."
"그럼 너도 밤새운 거야?"
"아니, 조금은 잤어. 그리고 지금 별로 안 졸리니까 괜찮아."
페니는 이제 고령이라 몸이 안 좋을 때가 부쩍 늘어났다.
에리히는 의사를 포함한 전문가의 손길이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의 손에 페니를 맡기지 않고 직접 돌봤다.
그래서 덩달아 에리히의 생활도 불규칙해진 상태였다.
어쩐지 아침부터 커피를 마시고 있더라니.
페니의 건강이 안 좋은 날이 많아지면서 나는 페니뿐 아니라 에리히도 걱정이 되었다.
에리히가 페니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 그럼 조용히 해야겠다. 페니 안 깨게."
하지만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우렁찬 목소리가 귀청을 울렸다.
"나 내려왔어! 다들 기다렸지?"
"야, 페니 자니까 조용히 해."
씩씩하게 외치며 나타난 루이제에게 에리히가 힐난했다. 루이제는 아차 하며 얼른 소리를 낮추었다.
"페니 또 아파? 어제는 괜찮아 보였는데?"
"아픈 건 아니고, 그냥 자는 시간이 불규칙해져서 그래."
"나 페니 주려고 간식 엄청 많이 가져왔는데. 혹시 주면 안 되려나?"
"하나 정도는 괜찮으니까 이따 일어나면 주든가."
에리히가 성가시지만 특별히 봐주겠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에리히가 외부인 중에 페니에게 직접 간식을 주도록 허락해 주는 건 루이제가 유일했다.
"그럼 잠깐 둘이 있어. 나도 옷 갈아입고 내려올게."
일단 나는 에리히를 보러 잠깐 내려온 것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을 남겨두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다시 방에서 나왔을 때는 유진이 돌아와 있었다.
"어? 오빠 왔네."
"하리."
에리히와 루이제가 있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려고 했는데, 그 전에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 유진과 먼저 마주쳤다.
"내가 지금 내려가려고 했는데."
"애들한테 네가 일어났다고 들어서 먼저 인사하려고 올라왔어. 잘 잤어?"
눈이 마주치자마자 유진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지며 그의 입매에 미소가 걸렸다.
"응. 오빠는 어디 갔다 오는 거야?"
"로웬그린이 내가 직접 확인해야 할 일이 있다고 불러서 잠깐 다녀왔는데,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었어."
"그래? 오후에는 시간 괜찮아? 내가 늦잠을 자는 바람에."
미안한 마음에 말하자 유진이 웃으며 내 뺨을 손으로 감쌌다.
그가 인사하듯이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너한테 줄 시간은 언제든 많아."
앗.
나는 설탕을 바른 것처럼 달달한 그 말을 듣고 괜히 좀 쑥스러워졌다.
"게다가 오늘은 특히 중요한 날이니까 당연히 나도 같이 있어야지."
가슴이 간질거리면서 그렇지 않아도 괜찮던 기분이 확 좋아졌다.
그래서 그를 보고 웃자 유진도 그런 나를 내려다보면서 같이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 갑자기 뭔가가 번뜩 스쳐 지나갔다.
어? 뭔가가 생각날 듯 말 듯한데?
"오빠, 잠깐만 가만히 있어 봐."
나는 양손으로 유진의 얼굴을 붙잡고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왜 그래?"
느닷없는 내 행동에 유진이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 내 손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는 않고 그냥 내가 바라는대로 가만히 있어 주었다.
나는 유진의 얼굴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왠지 어젯밤 꿈에서 오빠를 본 것 같아서."
그러자 유진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 무슨 꿈이었는데?"
"사실 내용은 잘 생각이 안 나는데 어쨌든 오빠가 나온 건 확실한 것 같아."
조금 전 유진의 얼굴을 정면에서 마주하는 순간 느낌이 빡 왔다.
원래 꿈 하나 가지고 이렇게 길게 곱씹는 성격은 아닌데, 왠지 어제 꾼 꿈은 자꾸만 생각이 났다.
나는 장난스럽게 유진의 가슴을 꾹 찔렀다.
"혹시 나한테 숨기고 있는 거 있으면 말해. 사실은 오빠가 나한테 엄청나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내 꿈에까지 찾아온 거 아니야?"
유진도 나를 따라 픽 웃으면서 그를 찌른 내 손을 감쌌다.
"아니면 밤에 그렇게 꿈까지 꿀 정도로 내가 보고 싶었거나."
"아닌데?"
"아니야?"
"음, 사실 아닌 건 아니야."
나는 비밀이라는 듯이 그에게 고개를 기울여 작게 속살거렸다.
웃음기 어린 유진의 입술이 맞잡은 내 손에 내려앉았다.
"역시 결혼하면 한동안 루이제를 포함해서 다른 손님은 받지 말아야겠어."
"뭐야, 다른 사람한테 하루도 날 뺏기기 싫다는 거야?"
"몰랐어?"
유진이 장난스럽게 속삭이며 내 위로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막 입술이 닿으려고 했을 때, 아래층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이요옵, 나 왔어! 다들 날 기다렸지!"
"카벨 형! 페니 자니까 조용히 좀 해."
"헉, 페니 또 아파?"
"아픈 건 아니고······. 아, 잠깐. 뭐야? 이 상황 바로 조금 전에도 겪었던 것 같은데?"
우리 집 둘째가 돌아왔나 보다.
아래에서 카벨과 에리히, 그리고 루이제가 나누는 대화 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왔다.
"진짜 형이랑 루이제랑 사실 출생의 비밀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말투도 그렇고, 왜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닮아가는 것 같지?"
"무슨 소리야! 카벨 오빠가 내 흉내 내는 거야."
"엥? 뭔 소리야? 내가 널 흉내 내긴 왜 흉내 내! 네가 멋진 날 따라하는 거겠지!"
유진과 나는 동시에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얕은 것을 내뱉었다.
"내려가 봐야겠네."
"그러게."
유진이 나한테 한번 짧게 입을 맞춘 뒤 고개를 들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있잖아. 역시 신혼여행은 좀 멀리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러면서 살그머니 꺼낸 말에 유진이 멈칫했다.
숨을 죽이고 나를 내려다보는 얼굴을 보니 내가 이런 말을 할 줄 몰랐던 모양이다.
나는 괜히 쑥스러워서 그의 시선을 피해 큼큼 헛기침했다.
"섭섭해할 수도 있으니까 카벨 오빠나 에리히한테는 비밀이야."
유진이 걸음을 멈춘 채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있어서, 내가 먼저 그를 잡아당겼다.
"앗!"
하지만 다음 순간 맞닿은 손이 끌어당겨져 나는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고 말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유진에게 꽉 끌어안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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