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화.
그 오빠들을 조심해 131화
앞으로 점점 더 힘들어질 거라니, 밖에서 다른 사람들이 멋모르고 떠는 소리처럼 결혼 상대자를 찾는 일을 말하는 것일까?
하지만 앞으로 몇 년이 더 지나도 하리를 원하는 사람은 사라지지 않을 터였다.
일단 바스티에에도 꽤 맹목적인 후보가 한 명 있었고.
아니면······.
유진은 혹시 결혼하려는 이유가 에른스트를 떠나고 싶어서냐고 물으려다가 말을 삼켰다.
'상대는 적당히 괜찮은 사람으로 오빠가 골라줬으면 좋겠는데.'
그린 듯이 미소 지은 하리의 얼굴이 여느 때처럼 티 없이 맑았다.
유진은 그런 그녀를 침묵한 채 얼마간 응시하다가 눈을 감았다.
'그래. 네 의견이 그렇다면.'
그리하여 진행된 혼사였다.
유진은 그 자신이 정략결혼의 대상으로 벨론티아를 골랐을 때보다 훨씬 더 공을 들여서 하리의 결혼 상대자를 탐색했다.
최종적인 선택은 하리에게 맡겼다.
결국 추리고 추린 몇 명의 후보 중에 그녀가 선택한 것은 요하네스 바스티에였다.
요하네스는 유진과도 상당히 오랫동안 교분을 쌓은 사이로, 객관적으로 봤을 때 좋은 남자라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이상하게 예전부터 요하네스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카벨마저도 결국 결투용 장갑을 물어뜯으며
하리의 남편감 중 그가 가장 낫다고 마지못해 인정했을 정도였으니.
"······형, 이제 그만 마셔! 도대체 몇 병이나 들이붓는 거야?"
"으흐흐헝! 하리야아아아······!"
마침내 에리히의 방 앞에 거의 다다라, 포효하는 울음소리가 유진의 고막을 찔렀다.
안쪽의 상황을 이미 상상하고도 남아서 유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택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깨우고 싶은 게 아니라면 소리 죽여, 카벨."
"유진 형!"
방에 들어가자마자 카벨과 에리히가 각기 다른 의미로 유진을 반겼다.
"마침 잘 왔어. 카벨 형 좀 내 방에서 치워줘."
에리히는 벌써 카벨에게 완전히 학을 뗀 모양이었다.
"어? 형이다. 혀어어엉······!"
그때, 두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카벨이 비틀거리면서 유진에게 다가와 엉겨 붙었다.
그런 그에게서는 술 냄새가 폴폴 진동을 했다.
어제도 카벨은 술을 마시고 진상을 부렸다.
그래도 오늘이 중요한 날이라는 자각은 있었는지 일찍 쉬러 들어간 하리를 귀찮게 하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혀어엉! 형도 내 마음 이해하지? 글쎄, 그 쪼그맣던 게 결혼을 한대에!"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물을 글썽이며 카벨이 외친 소리에 에리히가 그를 비웃었다.
"쪼그맣긴 뭐가. 지금 걔 나이가 형 결혼할 때보다 많은 건 알아?"
"나이 같은 게 무슨 상관이야! 아직도 요렇게, 요렇게, 내 반 토막만한 건 1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똑같구먼!"
카벨의 주사는 정말 성가셨다.
"에리히, 너도, 너도 결혼 하지 마 ! 그런 거 하지 말고 그냥 우리끼리 다 같이 살자아!"
그는 또 징징거리면서 에리히에게도 천 년의 독신을 권장했다.
"서른까지 결혼 안 하면 마법사 된다던데! 그냥 너도 마법사 하자! 앞으로 얼마 남지도 않았잖아아!"
이번에는 그 큰 덩치로 에리히에게 매달려 떼를 쓰는 모습이 웃기지도 않았다.
"하, 뭐라는 거야? 좋다고 헤벌쭉해서 우리 중에 제일 일찍 결혼한 사람이 할 소리야, 그게?"
"헉!"
하지만 에리히의 말에 카벨은 잠깐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그랬다. 형제 중 가장 먼저 결혼한 사람은 바로 카벨이었다.
순간 말문이 막힌 카벨이 어버버거렸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에리히가 빈정댔다.
"생각해 보니까 진짜 그러네. 매일 푼수처럼 짜증 날 정도로 결혼 예찬을 해대던 인간이 막상 동생 차례가 오니까
돌변해서 이렇게 진상을 부려? 완전 이기적이잖아, 이거. 배신자 주제에."
쿠쿠쿵!
배신자 주제에······.
배신자 주제······.
배신자······.
카벨은 큰 충격을 받아 동공을 흔들었다. 배신자라는 말이 귓가에서 천둥처럼 메아리쳤다.
"배, 배신자? 내가 배신자라고?"
"흥, 그럼 아니야? 맞잖아, 이 양심 없는 배신자야."
에리히가 그의 옷자락을 움켜쥔 카벨의 손을 매정하게 떼어내면서 콧방귀를 뀌었다.
바로 그 순간 카벨이 울부짖었다.
"으허허헝······! 맞아······! 난 배신자야! 천하에 쳐죽일 놈이야······!"
유진과 에리히는 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하기 시작한 그를 질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미안해······! 제일 먼저 결혼해서 미안해! 나 혼자만 행복해서 미안해애에에!"
이렇게 시끄럽게 오열하는 중에는 복도로 데리고 나갈 수도 없었기 때문에 결국은 카벨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우으, 으흑······."
"가자, 카벨. 네 방에 데려다줄게."
결혼한 뒤 근처에 있는 다른 저택을 구해 분가한 카벨이었지만 그래도 아직 에른스트에는 그의 방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리야아아······ 훌쩍."
유진은 바닥에 널브러진 카벨을 둘러업다시피 부축했다.
"진짜······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져야 돼애에······."
거의 질질 끌려서 에리히의 방을 나가는 도중에도 그는 계속 훌쩍였다.
유진은 자꾸만 밑으로 흘러내리는 카벨을 다시 어깨에 들쳐 메며 쯧 혀를 찼다.
"어제보다 심한 것 같은데 ,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나하고는 한 병만 나눠 마셨는데, 이미 여기 왔을 때부터 취해 있었어. 내 방에도 술 냄새 밴 것 좀 봐."
에리히가 투덜거렸다.
"술······ 술! 내 술 어디 있어?"
유진은 그 와중에도 또 술을 찾는 카벨에게 서늘히 경고했다.
"카벨. 그쯤 하고 이제 그만 잠이나 자. 술에 찌들어서 내일 하리 결혼식을 망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유진 형 말이 맞아. 내일 형 몰골이 영 못 봐줄 꼴이면 결혼식장에는 내가 하리 손잡고 입장할 테니까 그런 줄 알라고."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그 소리는 들었는지, 카벨이 '그건 안 돼에에!' 하고 몸부림쳤다.
"너도 쉬어, 에리히. 카벨 상대하느라 고생 많았다."
"형도······."
방 앞에서 에리히는 무어라 다른 말을 더 할 것처럼 유진의 얼굴을 응시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그 이상 첨언하지 않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잘 자, 유진 형. 왠지 오늘 밤은 다른 때보다 길 것 같지만."
유진도 가느다랗게 웃는 에리히를 잠깐 마주 보다가 잔상 같은 미소를 어렴풋이 지어 보인 뒤 돌아섰다.
카벨을 데려다준 유진은 이후 적막한 복도를 걸어 그의 방으로 향했다.
마지막까지 주정을 부리던 사람을 놓고 오자 가까스로 주변이 조용해졌다.
달칵.
이윽고 방문을 닫고 선 유진은 깊은 침묵에 휩싸여 낮은 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피곤한 하루였다. 하지만 좀처럼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일단 그는 겉옷을 벗고 답답하게 목을 옥죄고 있는 타이를 끌어내렸다. 그러다 문득 손에 낯선 향기가 엷게 배 있는 것을 깨달았다.
'아. 로웬그린의 선물을 마차에 두고 내렸군.'
하지만 이미 하리도 잠든 뒤였고, 물건은 내일 예식 전이나 후에 전해주어도 될 테니.
"······."
잠시 후 유진의 걸음이 장식장 쪽으로 옮겨졌다.
그는 거기에서 술을 꺼냈다. 카벨만큼 진탕 취할 마음은 없었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술을 마셔야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유진, 너는 장남이니 동생들을 항상 잘 보살펴야 한다. 우리가 없을 때는 네가 그 아이들의 아버지나 마찬가지니까.'
그렇게 혼자 술잔을 기울이다가 문득 어릴 때 듣던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달그락.
유진은 술잔을 들고 방을 나섰다.
그가 간 곳은 선대 에른스트 부부, 즉 부모님의 방이었다.
아무도 사용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선대 에른스트 부부의 방은 예전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유진이 걸음을 멈춘 곳은 익숙한 초상화 앞이었다.
지금 유진의 나이가 서른둘.
전대 에른스트 공작이 죽었을 때와 비슷한 나이였다.
문득 기분이 묘해져서 유진은 앞으로 손을 뻗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피부에 닿은 그림의 감촉은 온기 한 점 없이 서늘했다.
그림 속의 부모님은 그들이 갓 결혼했을 때의 모습이라 지금의 유진보다도 어려 보였다.
오늘따라 그 사실이 공연히 좀 이상하게 느껴졌다.
'나는 잘했을까?'
죽은 부모님의 기대대로, 과연 그는 지금까지 잘해온 것일까.
불현듯 유진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아니, 잘하지 못했다.
그저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만으로도 힘겨워서, 주위를 돌아볼 여력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부모님의 사후 위태로워진 가문을 잘 이끌지도 못했고, 동생들을 잘 돌보지도 못했다.
특히 하리에게는 미안한 게 너무도 많았다.
과거를 돌아볼 때마다 짙은 후회가 안개처럼 시야를 가렸다.
지금의 유진과 비슷한 나이에 죽으며 그의 부모님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때는 너무 어려 몰랐지만 이제 유진은 그들의 죽음이 사고가 아니란 사실을 알았다.
후에 기이함을 느끼고 긴 시간을 들여 파헤친 진실은 생각보다 뼈아팠다.
등신, 천치같이 아무것도 모른 채 그동안 가증스러운 살인자들과 얼굴을 맞대고 웃었다는 사실에 속에서 비릿한 쓴 물이 올라왔다.
하여 유진은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잔인한 방법으로 그들에게 복수할 생각이었다.
오늘까지 유진이 살의를 억누르며 인내해 온 이유 중 하나인 하리의 결혼식도 이제 곧 끝날 터였으니.
유진의 손을 떠난 빈 술잔이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졌다.
슬슬 술기운이 올라오는 탓인지 공기가 조금 답답하게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창밖에서 눈송이처럼 떨어져 내리는 꽃잎이 시야에 들어왔다.
유진은 그 광경을 물끄러미 보다가 창가로 다가갔다.
살랑.
창문을 열자 바깥의 나무에서 피어난 하얀 꽃잎이 방 안으로까지 날려 들어왔다.
감미롭게 느껴지는 은은한 향기도 함께 코끝을 스쳤다.
사람을 감상적으로 만드는 고즈넉한 봄밤이었다.
유진은 그가 어린 소년일 때 종종 그러던 것처럼 창틀에 팔을 올려 그 위에 고개를 파묻었다.
느릿하게 감았다 뜬 눈에 아련한 밤 풍경이 비쳐들었다.
다행히 내일도 날씨가 좋을 듯했다.
그들 형제는 내일 있을 하리의 결혼식을 총력을 기울여 준비했다.
하리는 언제나처럼 뭐든 다 좋다며 그들에게 별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하지만 예전에 연회에서 하리가 다른 영애들과 지나가듯이 '이런 결혼식도 좋을 것 같다'고 얘기한 것을 기억하고 있던 게 도움이 되었다.
거기에 더해 카벨이 몇 달 전부터 하리에게 떠보듯이 물어 알아온 정보도 쓸모가 있었고······.
문득 그때를 떠올린 유진은 얼굴을 팔에 반쯤 파묻은 채 큭, 낮은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카벨은 몰래 티 나지 않게 하리에게서 정보를 얻어 오겠다며 결의를 다졌었지만, 그의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보고도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카벨보다 더한 바보일 터였다.
그때 땀을 뻘뻘 흘리며 애쓰던 카벨을 애잔한 눈으로 바라보던 하리의 얼굴을 떠올리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하······."
이내 유진은 엷은 미소를 지은 채 평화로운 봄의 정취 속에서 눈을 감았다.
향기롭고 따스한 봄밤.
만약 누구나 평생 동안 단 하나의 소원만 이룰 수 있다면, 유진은 지금 그 기회를 쓰고 싶었다.
내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가 될 하리를 위해서.
부디, 그 애의 삶이 이처럼 항상 찬연한 봄날이길.
서로 진심 어린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앞으로 그 애가 오래오래 행복하기를.
그녀를 위해서라면 그의 몫의 행복마저 얼마든지 기꺼이 내줄 수 있으니.
그날, 그 순간. 유진은 그의 온 마음을 다해 그렇게 소망했다.
댕댕-
꼭 그 바람을 듣기라도 한 것 처럼 때마침 자정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그 속에서 유진은 꽃향기에 취해 서서히 잠이 들었다.
춤을 추는 듯한 새하얀 꽃비가 창밖에서 아득하게 쏟아져 내리는, 그런 어느 눈부신 봄밤이었다.
<-외전3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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