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화.
그 오빠들을 조심해 130화
[ 외전 3. 회귀 전, 결혼식 전야 ]
모든 것이 순차적으로 마무리되어 가고 있는 봄이었다.
"그럼 위의 내용에 이 이상 다른 변동은 없는 것으로 하고, 발표는 다음 달 중에 하는 것으로. 동의하십니까?"
"이견 없습니다. 지금 바로 서명하죠."
유진과 로자벨라는 펜을 들어 앞에 놓인 종이에 이름을 적고 각 가문의 인장을 찍었다. 믿을 만한 공증인이 그것을 확인했다.
그렇게 목적을 완수한 뒤, 두 사람은 한 시도 낭비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 인사는 악수로 대체했다.
"벌써 4년이나 지났군요. 그래도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어요."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전 지금 바로 황궁으로 가겠습니다."
"같이 가지 않아도 될까요?"
"그러는 게 피차 편할 테니."
"그래요. 그럼 전 이대로 벨론티아에 가겠어요. 오늘은 거기서 머물고 내일 바로 예식장에서 보지요."
"그렇게 하십시오."
4년간이나 부부로 지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두 사람의 태도에는 친밀감이 없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좋은 파트너로, 쌍방의 동의하에 늘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상대를 향한 신뢰는 두터워졌을지언정 그 마음이 사적인 애정으로 변질된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짧은 인사를 마치고 헤어졌다.
이것으로 두 가문과 두 사람 사이를 연결하고 있던 혼인 계약서는 완전히 파기되었다.
물론 약속된 기간까지는 공식적인 자리에 동행할 일이 남아 있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잔업이나 마찬가지였다.
유진과 로자벨라는 당초의 약속대로 합의하여 이혼을 진행하기로 하고 그에 따른 새로운 계약을 지금 막 끝마쳤다.
이제 남은 일은 황실의 승인을 받는 것뿐이었다.
그것으로 에른스트 공작 부부는 허울뿐이던 4년간의 결혼 생활에 완전한 종지부를 찍게 될 터였다.
처음부터 그러기로 결정하고 시작했던 결혼이었다.
서로에게 손해 볼 것 없는 거래였기에 에른스트와 벨론티아 모두 불만은 없었다.
가문을 떠나서도 그들의 이해관계는 일치했다.
두 사람 다 혼기가 차면서 표면적으로나마 적당한 배우자가 필요해졌고,
상대에게 마음에도 없는 부부의 의무와 불필요한 감정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성격이 맞았으니까.
하여 마지막까지 그들은 문제없이 관계를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유진은 바로 황궁으로 이동해 이혼 신청서를 제출했다.
황실에는 다이스가 있으니, 아마 오늘부로 모든 절차가 마무리될 것이다.
다이스는 지난해 즉위해 아를란타의 황제가 되었다.
다른 황실이라면 진작 자식을 둘 셋 정도 보고도 남았을 나이에 아직 혼약자조차 없는 다이스를 두고 세간에서는 말들이 많았다.
유진은 그것이 로자벨라 벨론티아를 향한 지고지순한 마음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유진이 로자벨라와 좀 더 일찍 결혼하지 않고 약혼 기간을 길게 두었던 데에는 그런 이유도 일부 있었다.
하지만 그때 다이스는 끝내 용기를 내지 않았고, 당시에는 그를 대하는 로자벨라의 태도도 모호했다.
그래서 유진도 더는 배려하지 않기로 하고 결혼을 진행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무렵의 유진에게는 더 이상 결혼을 미룰 수 없는 다른 중요한 이유가 또 있었다.
황궁에 들른 김에 다이스를 만나고 나오자 어느덧 밖이 어둑했다.
유진은 잠깐 거무스름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이혼은 아직 가족들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적절한 시일이 올 때까지 이와 관련한 소문이 돌지 않도록 다이스와 로자벨라 측에서도 알아서 조처할 것이 분명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추문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사실상 유진과 로자벨라는 오늘부로 완전한 서류상의 남이 되었다.
하지만 유직 역시 아직은 사실이 밝혀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문득 다이스와 로자벨라가 함께 있을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서로를 마주한 채 낯선 얼굴로 웃고 있던 그들의 모습은 꼭 '행복'이라는 단어를 형상화한 것처럼 보였다.
결국 두 사람은 먼 길을 돌고 돌아 결실을 맺게 되었다. 그걸 보면 확실히 세상에 제 짝이라는 것이 따로 있기는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앞으로 두 사람이 나아갈 길이 마냥 쉬울 리는 없었지만 거기까지는 유진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이내 유진은 쓸데없는 상념을 떨쳐버리고 마차가 세워진 곳으로 향했다.
"공작님 아니십니까?"
그리고 그곳에서 유진은 아는 사람과 마주쳤다.
"로웬그린."
다음 주부터 정식으로 유진의 일을 돕게 될 새로운 보좌관 로웬그린 스왈로츠였다.
"자리를 정리하러 온 건가."
"예, 지금 막 필요한 짐을 풀고 퇴궁하려던 참입니다."
그는 막 올라타려고 하던 마차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마침 잘 되었군요. 내일 에른스트에 경사가 있다는 소식을 우연히 들었습니다. 이건 뇌물입니다."
"뇌물?"
유진이 건네받은 것은 잘 포장된 상자였다. 로웬그린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설명했다.
"공작님 덕분에 제 인생에 있을 줄 몰랐던 좋은 직장을 구했으니까요.
그래서 원래 다음 주에 정식으로 인사드리면서 선물하려던 건데, 이왕 이렇게 마주쳤으니 오늘 드리는 게 좋을 듯하군요.
집에 두면 복이 찾아오고 가정이 화목해진다는 동방의 향낭입니다."
그 말을 듣자 왜 로웬그린이 이것을 오늘 선물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맙군. 마침 시기가 적절하니 내일 동생에게 전해주겠네."
"네, 어쩌다 보니 공작님이 아니라 동생분께 드리는 선물이 되었지만······.
에른스트의 가족분들은 사이가 좋다고 들었으니 그냥 공작님께 드린 선물인 것으로 쳐주십시오."
로웬그린의 능청스러운 말에 유진은 피식 웃었다.
이후 그는 로웬그린과 인사를 나누고 먼저 마차에 올라탔다.
"어디로 모실까요?"
"에른스트로 가지."
"알겠습니다!"
옆자리에 내려놓은 상자에서 은은한 향기가 흘러나왔다.
그에게 늘 복잡한 심경을 느끼게하던 에른스트 저택이었지만 오늘 귀가할 생각을 하니 어느 때보다 더 마음이 산란했다.
조금 전 만났던 로웬그린의 말처럼, 다이스와 로자벨라 외에 곧 새로운 인연으로 맺어질 사람들이 그의 주위에 한 쌍 더 있었다.
순간 명치끝이 꽉 조여 왔지만 유진은 익숙하게 그것을 모른 척했다.
"오셨습니까, 공작님."
"동생들은?"
집사 휴버트가 저택의 문 앞에서 그를 맞아 주었다.
"카벨 도련님이 오셔서 지금 에리히 도련님의 방에 함께 계십니다. 하리 아가씨는 일찌감치 잠자리에 드셨고요."
"그래."
"공작님도 일찍 쉬시지요. 내일은 중요한 날이니까요."
유진은 대답 없이 계단을 올랐다.
하리의 방이 있는 층에 이르러 잠깐 걸음이 늦추어졌다.
몇 달 전부터 늘 분주하던 하리의 방 쪽이 오늘은 몹시도 조용했다.
그것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유진의 얼굴은 여느 때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어두운 복도를 응시하는 눈동자 안에는 미처 삼키지 못한 감정이 어슴푸레하게 배어나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카벨과 에리히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오늘은 결혼식 전야.
세상 그 누구보다도 축복받아 마땅한 내일의 주인공은 바로 그의 여동생인 하리였다.
***
'하리.'
'왜, 오빠?'
'혹시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면 언제든 말해도 돼.'
하리에게 그 말을 했던 게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유진의 결혼식을 앞두고 있었을 때의 일일 것이다.
'카벨처럼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어. 네가 원하면 반대하지 않아.'
유진의 결혼은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른 정략적인 것이었지만 카벨은 아니었다.
본인이 원한 연애 결혼이었기 때문인지 카벨은 매일 행복해 보였다.
그래서 어느 날인가에 다소 충동적으로 꺼낸 말이었다.
물론 남은 두 동생의 배우자 모두 사람 됨됨이 정도는 봐야 하겠지만 그 외에 다른 조건은 따지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들이 정말 진심으로 원해서 한평생을 함께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하여 말하자 하리는 꼭 예상치 못한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한참 동안이나 조용히 유진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잠시 후, 그녀의 얼굴에 평소와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글쎄, 오빠도 28살에 결혼하니까 나도 그때까지는 괜찮지 않을까?'
조금은 장난스러운 어투로 하리가 말했다.
하지만 뒤이어 유진에게서 시선을 비끼며 속삭인 그녀의 음성은 어딘가 묘하게 부자연스러웠다.
'농담이야. 좋은 사람이 생기면 나도 빨리 결혼해 여기서 나가야지.'
거기에 따른 유진의 반응은 거의 무의식적인 것으로 느껴질 만큼 빨랐다.
'네가 에른스트를 떠나기를 바라서 꺼낸 말이 아니야.'
달리 덧붙이고 싶은 말이 더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러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더 맞을 수도 있었다.
애써 깊이 파묻고 있던 감정이 경솔한 말 한마디에 실려 멋대로 쏟아질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그래도 지금 한 말에서 진심이 전해지기는 했는지, 하리가 조금 전과 다른 얼굴로 빙그레 웃었다.
'으음, 순서상으로 아직 에리히가 남았으니 그 후에 생각해 볼래. 그래도 되지?'
하지만 어쩐지 하기 싫은 얘기를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느낌이라 유진은 그 후로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니······. 하지만 사실 그것은 핑계였다.
이대로 조금만 더 하리를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이 하나도 없었다고 말한다면 분명 거짓일 터였으니.
매일매일 끝을 모르고 자라나는 이 감정이 버거웠다. 그래서 유진은 더 철저히 숨겨야만 했다.
이런 감정 따위, 모두를 곤란하게 만들 뿐이었으니까.
무엇보다도 하리를 불행하게 만들 마음이었다. 그녀가 얼마나 '가족'의 울타리를 소중히 여기는지, 유진도 뼈아플 정도로 잘 알고 있었기에.
그래. 그러니 하리에게 이런 더러운 마음을 알게 해서는 안 되었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 단 하나 남은 하리의 돌아갈 곳을 그의 손으로 없애는 것이나 다름없게 될 테니까.
이런 일방적인 이기적인 마음으로 하리의 세상을 부술 자격이 유진에게는 없었다.
아무리 애써도 잘라낼 수 없다면 적어도 최선을 다해 감춰야만 했다.
언제까지고 그녀에게 변치 않을 가족으로 남을 수 있도록.
그 노력은 헛되지 않아, 유진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오늘까지 하리에게 비밀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다 몇 달 전, 하리가 농담하는듯한 어조로 지나가듯이 말했다.
'나 슬슬 결혼할까 봐.'
갑작스러운 말이었기에 유진은 바로 대꾸하지 못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드디어 이런 날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가슴 한복판을 시리게 가로질렀다.
'에른스트에 너무 오래 있었던 것 같아.'
하지만 그 말에는 얼굴을 굳힐 수 밖에 없었다.
'혹시 누가 너한테 뭐라고 했어? 그런 거면······.'
'아니야.'
혹여 누군가 그의 눈을 피해 늦게까지 결혼하지 않고 있는 하리에게 헛소리를 지껄인 것이 아닌가 싶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등을 떠밀려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하려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해주려고.
하지만 하리는 여전히 잔잔하게 웃는 얼굴로 그의 우려를 부정했다.
'그런 거 아니야, 오빠.'
말간 눈이 유진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냥 이제라도 정말 마음먹지 않으면, 점점 힘들어질 것 같아서 그래.'
이미 마음을 굳힌 듯, 하리의 눈빛은 곧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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