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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오빠들을 조심해!-129화 (129/138)

# 129화.

그 오빠들을 조심해 129화

유진은 얼마 전 하리가 위험에 처했던 데에는 자신의 실책이 가장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낯선 행복에 젖어 그가 방심했기 때문에 그 느슨해진 틈으로 감히 손을 뻗은 자가 생긴 것이라고.

그래서 그는 지난 일 이후 하리의 주변을 바늘 하나 샐 틈 없이 견고히 보호하고 있었다.

그러니 더군다나 라벤더 코르디스에게 얼마 전 일어난 변고를 유진이 모르고 있을 리 없었다.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어쨌거나 그녀는 멀쩡히 살아 있었으니 변고라 할 만큼 대단한 일도 아니기는 했지만 말이다.

감히 생각건대, 에단과 유진은 어딘가 닮은 부분이 있었다.

아마 앞으로도 그들은 손에 적지 않은 피를 묻히며 살아갈 것이고, 그것은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사람이 모르는 곳에서 벌어질 것이었다.

그리고 에단은 과거와 달리 이제 그 일을 후회하지 않을 테니 어떤 의미로는 유진과 더욱 닮게 된 셈이었다.

'사실 나는 네가 하리의 곁에 있는게 마뜩지 않다.'

에단은 머리 위로 떨어지는 유진의 냉정한 목소리에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그래도 내버려 두기로 결정한 것은 아직까지 너만큼 적합한 사람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지, 그 이상의 이유는 없어.'

'알고 있습니다.'

에단은 자신을 다시금 하리의 곁에 있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유진에게 감사했다. 그래서 그런 마음을 표하듯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지, 너도, 나도.'

유진은 잠깐 침묵한 채 에단을 바라보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선은 넘지 마라. 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겠지.'

그 소리에 에단은 고개를 들었다.

시야를 붉게 물들인 노을을 등진채 유진은 그에게 서늘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에단은 그것이 낯설지 않았다. 예전에도 그는 지금과 같은 눈빛을 자신에게 보내는 유진을 본 적이 있었다.

황성 안에서 에단이 하리에게 보라색 아네모네 꽃을 건넸던 날이었다.

마치 이 이상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하듯, 그 시선에는 명백한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에단은 유진에게 단호히 대답했다.

'맹세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에단이 하리에게 품은 마음은 유진이 생각하는 것과 조금 달랐다.

지금처럼 유진이 그에게 경고하지 않아도, 에단은 이 이상 하리에게 가까워질 생각이 없었다.

감히 그럴 마음을 품을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굳이 이런 식의 변명을 하지 않더라도 에단이 하리를 생각하는 마음은 애끓는 연정과는 차이가 있었다.

에단은 그저 그녀가 웃는 모습을 멀리서나마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유진은 에단의 속내를 가늠하려는 것처럼 그의 얼굴을 한동안 싸늘히 응시하다가 이내 자리에서 먼저 걸음을 옮겼다.

'하리가 기다리고 있으니 그만 가보도록 해.'

'예, 공작님.'

그날의 기억은 거기에서 일단락되었다.

***

"크왁! 사방이 꽃 천지네!"

"진짜 봄은 봄인가 보다. 여기 오니까 좀 실감이 나네."

"컹컹!"

꽃 축제가 열리는 봄의 라수스는 아를란타에서도 가장 유명한 관광지였다.

그러다 보니 이맘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이곳을 찾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시야 가득 온통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을 보고 페니와 카벨이 제일 먼저 요란스럽게 흥분을 표했다.

페니야 그렇다 쳐도 카벨은 안 그렇게 생겨서 은근히 속에 소녀 감성을 숨기고 있는 것인지, 에른스트의 식구 중에서도 가장 들뜬 티가 났다.

그런 카벨을 보고 에리히가 이상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뭐야, 카벨 형, 안 어울리게 왜 이렇게 좋아해?"

"크흑, 네가 매일 땀내 나는 기사단에만 처박혀 있어 봐. 지금 여기가 완전히 천국으로 보일 테니까!"

어쩐지 짠내가 배어 나오는 카벨의 말에 모두가 잠시 침묵했다.

"그래, 카벨 오빠. 모처럼 휴일이니까 실컷 봄을 만끽하고 가는 거야!"

"당연하지! 내가 먼저 가서 자리 맡을게! 가자, 페니!"

"왈왈!"

카벨은 잔뜩 신이 나서 페니를 데리고 먼저 앞장서서 뛰어갔다.

에리히는 카벨에게 페니를 빼앗긴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지만 그래도 페니가 저렇게 즐거워하니 봐주겠다는 듯이 그에게 순서를 양보했다.

그런 것을 보면 역시 에리히에게는 카벨보다 페니가 우선순위인 것 같기도 했다.

"카벨 오빠, 저렇게 뛰어가는 거 보니까 애 같다."

"나이만 먹은 애 맞지, 뭐."

촐싹거리며 뛰어가는 카벨의 뒷모습을 보고 하리가 웃었다. 그러자 유진도 그에 동조하며 하리를 따라 여트막하게 웃었다.

"가만히 보면 카벨 형이 우리 중에 제일 청춘인 것 같아."

에리히가 혀를 쯧쯧 차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넌 우리 중에 제일 애늙은이 같고."

"뭐? 내가 어딜 봐서 애늙은이야?"

그러다 하리가 장난스럽게 꺼낸 말에 에리히가 곧장 발끈했다. 두 사람은 언제나처럼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다들 뭐 해? 빨리 와!"

좋은 자리를 맡았는지, 저 멀리서 카벨이 손을 흔들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그들도 카벨과 페니가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 여기······."

목적한 곳에 다다랐을 때 하리는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저쪽에도 자리가 있는데 여기가 더 좋아 보여서!"

하지만 정작 자리를 맡은 카벨은 별다른 생각이 없는 눈치였다.

어쩌면 이 부근이 전부 다 비슷한 꽃나무들로 가득하기 때문에 이 장소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하리는 한눈에 지금 그들이 서 있는 곳이 낯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슬쩍 고개를 돌려 보니 유진도 그녀와 같은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그것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배고프다, 밥부터 먹자!"

카벨의 성화에 그들은 커다란 꽃나무 아래에 자리를 깔고 앉아 바구니에 든 음식으로 간단한 요기부터 하기로 했다.

에리히는 묘한 기시감을 느끼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나 의외로 하리가 생각하고 있던 것을 가장 먼저 입 밖으로 꺼내 말한 사람은 카벨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어쩐지 좀 익숙한 느낌이다 싶었는데, 우리 어릴 때 자리 잡고 꽃구경했던 것도 지금 여기였네. 내 말이 맞지?"

그 말을 듣고 에리히도 그제야 자신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던 의문의 답을 구한 듯이 '아' 하고 소리 냈다.

"맞는 것 같은데? 저기에 앉아서 풍선 들고 놀았던 기억 나."

"그렇지? 너무 오랜만에 와서 헷갈렸는데 이제 확실하게 생각나네."

그들이 이곳에 마지막으로 왔던 것은 그들의 부모님이었던 에른스트 부부가 타계하기 직전의 봄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이 자리 잡고 앉아 있는 곳은 그때 당시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던 장소와 동일했다.

카벨과 에리히는 옛 기억을 되새기는 듯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들을 따라 유진과 하리도 시선을 움직였다.

황홀하게 피어난 연분홍 꽃송이들도, 주위에 감도는 달큼하고 부드러운 공기도,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부터 흘러드는 사람들의 웃음소리도 과거의 기억과 거의 변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마치 이 순간, 그들 모두가 안락한 평화에 젖어 있던 어린 시절의 그날로부터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참 좋았었는데."

그 말을 중얼거린 것이 그들 중 누구였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네 사람 모두가 동일한 그리움을 느끼며 과거의 시간을 되짚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오니까 좋다. 그렇지?"

그러다 하리가 먼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시야에 번진 꽃들과 부드러운 그 미소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응, 오길 잘한 것 같네."

유진도 어렴풋이 미소를 지으며 읊조렸다. 그 뒤를 따라 카벨과 에리히도 입을 열었다.

"우리 내년에도 또 올까?"

"카벨 형, 그때도 운 좋게 비번일 수 있을 것 같아?"

"안 되면 되게 하면 되지!"

사실 지금껏 그들이 이곳에 오지 않았던 이유는 부모님과의 기억이 되살아날까봐 우려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각자의 사정상 이렇게 다 함께 모여 꽃 축제에 오게 된 것이 무척 오랜만이었을 뿐이다.

여느 때처럼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가 이어졌다. 그렇게 그들은 화기애애하게 점심 식사를 끝마치고 산책할 겸 꽃길을 걷기로 했다.

"에단 경, 선물이에요."

그러다 문득 하리가 뒤에서 걷고 있는 에단을 향해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벚꽃 가지 하나가 들려 있었다.

"꺾은 건 아니고 떨어져 있던 거지만 그래도 예뻐서 경에게 주고 싶었어요."

그녀의 선물이 의외였는지, 에단의 눈이 약간 크게 떠졌다.

그는 자신을 향한 하리의 미소 띤 얼굴을 잠깐 말없이 지켜보다가 마침내 천천히 손을 들었다.

하리의 손에 들려 있던 꽃가지가 에단의 손으로 옮겨왔다.

"감사합니다."

에단의 말에 하리가 조금 전보다 더 환하게 웃었다. 그는 곧 뒤돌아 유진을 향해 뛰어가는 하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하리를 기다리며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유진과 에단의 눈이 일순간 마주쳤다.

하지만 유진은 지난번처럼 서늘한 눈빛을 보이는 대신 조금 전의 일에 아무런 무게도 두고 있지 않은 것처럼 하리를 향해 시선을 움직였다.

카벨과 에리히는 이미 저 앞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어, 오빠 머리에 꽃잎 붙었어."

"어디?"

"잠시만. 내가 해줄게."

하리의 손길이 다정하게 유진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유진은 하리가 손을 움직이기 편하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제 됐어."

그 순간 보드라운 바람이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또다시 머리 위에 있는 꽃나무에서 연분홍 꽃잎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하리가 '앗' 하고 소리 냈다.

"그냥 지금은 놔둘 걸 그랬나 봐. 어차피 계속 꽃잎이 날려서······."

봄바람보다 더 따스한 온기가 그녀의 입술에 닿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당연히 하리는 하려던 말을 미처 끝맺지 못했다.

잠시 후, 한 차례 하리의 입술을 훔치고 고개를 든 유진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손이 약간 찬 것 같은데. 추우면 말해."

유진은 아주 자연스럽게 하리의 손을 잡고 꽃나무 아래에 난 길을 걸었다.

하리는 얼결에 그런 그에게 이끌려 걷다가 곧 소리 죽인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지금 뭐야? 여기 사람들도 엄청 많은데······."

"미안. 네가 너무 예뻐서 나도 모르게 그랬어."

하지만 곧 이어지는 유진의 태연한 대답에 오히려 할 말만 잃었을 뿐이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의 색이 번진 것처럼 하리의 뺨에도 은은한 물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더 이상 유진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손을 붙잡고 꽃잎이 흩날리는 길을 함께 걸었다.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오늘 같은 봄날만 지속될 것처럼 한없이 다정하고 따뜻한 시간이었다.

<-외전2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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