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그 오빠들을 조심해 128화
맑고 화창한 일주일 후의 봄날, 에른스트의 가족들은 외출 준비로 분주했다.
"카벨 오빠, 잠깐만! 그건 이따 먹을 도시락이잖아. 몰래 꺼내 먹지 마!"
"딱 하나밖에 안 먹었어!"
"에리히, 페니도 데려갈 거야?"
"응, 오랜만이니까 같이 가려고."
올해 열린 라수스의 꽃 축제에 다 함께 나들이를 가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에단은 오전부터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에른스트의 삼 형제와 하리, 그리고 저택의 사용인들까지 나들이 준비로 바쁜 와중에 오직 에단만이 한가로웠다.
그런 그를 보고 하리가 물었다.
"에단 경은 준비 다 끝났어요?"
"네."
사실 에단에게는 준비라 할 것도 없었다. 여느 때처럼 그는 호위를 목적으로 그들과 동행하는 것이었으니까.
"며칠 전에 비가 와서 걱정했는데 오늘은 날씨가 맑아서 다행이에요."
외출용 모자를 손에 들고 하리가 말갛게 웃었다. 에단은 그런 그녀를 향해 무심코 입을 열었으나 다른 사람의 말이 그보다 앞섰다.
"뭐야, 저 사람도 데려가?"
페니를 챙기던 에리히가 슬쩍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그럼, 당연히 같이 가지."
"이런 날까지 뭐 하러? 그냥 집에서 쉬라고 그래."
그는 에단이 그들과 함께 꽃 축제에 가는 것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투덜거렸다.
에리히가 에단을 못마땅하게 여긴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닌 데다 또 거기에는 이렇다 할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이제는 모두가 그의 말을 깊게 귀담아듣지 않았다.
"준비 다 됐으면 그만 나가자."
하지만 큰 형인 유진이 다가오자 에리히도 구시렁거리는 것을 멈추었다.
"페니가 있으니까 다 같이 한 마차에 타는 건 무리겠네. 둘로 나눠서 타야 할 것 같은데."
"멍멍!"
에리히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옆에 있던 페니가 우렁차게 짖었다.
에리히는 예전부터 제 반려견에게 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다정해서, 그런 페니를 어르듯이 털을 쓰다듬으며 걸음을 옮겼다.
"둘씩 나눠서 타면 될 것 같은데."
유진과 하리는 자연스럽게 나란히 서서 현관을 향해 걸었다. 그들이 발길을 돌리기 직전, 유진의 시선이 한 차례 에단에게 닿았다.
에단은 작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늘 그래왔듯 뒤쪽으로 물러났다. 유진도 아무런 말 없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에단의 바로 앞에 카벨과 에리히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두 사람의 대화를 본의 아니게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마차는 형이랑 나랑 같이 타고 가야겠네."
"뭐? 무슨 재미로 너랑 둘이 같은 마차를 타고 가? 난 하리랑 타고 갈 건데."
"하. 형이 원래 눈치 없는 건 알지만 오늘은 좀 참아 봐. 이 구성원으로 외출하는데 형이 왜 하리랑 둘이 마차를 타?"
"어? 나 방금 눈치 없었어? 아니, 그런데 내가 하리랑 같이 마차를 타는 게 뭐 어때서?!"
한심함을 담은 에리히의 목소리와 동생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하는 카벨의 목소리가 번갈아 작게 울렸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고 오십시오, 공작님. 그리고 도련님들과 아가씨."
집사 휴버트가 저택을 떠나는 그들을 따라 나와 배웅했다. 에단도 휴버트와 눈짓으로 인사한 뒤 문을 나섰다.
***
예전부터 에단은 혹시 자신의 존재가 하리에게 누를 끼치는 것이 아닌지 가끔 두려울 때가 있었다. 바로 그의 과거 때문이었다.
앞으로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과거의 일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 에단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하리는 그를 받아들여 주었고,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어 대건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에단은 염치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의 곁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던 순간이 있었다.
바로 지난 사냥제 때, 하리가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에단 비숍. 하리가 납치되었는데 왜 넌 이렇게 멀쩡히 내 눈앞에 서 있는 거지?'
그때, 에단이 근신 처분을 받게 된 것은 하리를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벌이기도 했지만
그의 몰골이 하리의 앞에 보이기는 썩 좋지 않은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에단은 유진의 처사를 단 한 번도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호위하는 대상이 납치되는 동안 멍청하게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그 이유가 어찌 되었건 간에 결코 용납받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에단은 자신이 다시 하리의 호위로 복귀된 것이야말로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유진과 하리가 그에게 더 이상 지금과 같은 역할을 맡길 수 없다고 판단해 이대로 파문한다 해도 충분히 수긍할 수 있었다.
라벤더 코르디스의 처우가 결정되고 하리가 마지막으로 그녀를 만나기를 바랐던 날, 에단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그 후 에단이 일주일간의 휴가를 내고 찾은 것은 라벤더 코르디스였다.
'뭐, 뭐야, 당신?'
라벤더 코르디스가 격리, 감금된 별장 주위에는 한동안 관리받지 않은 울창한 숲이 있었다. 에단은 그곳에서 라벤더와 단둘이 마주했다.
그녀는 가려져 있던 시야가 확보되자마자 눈에 들어온 그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설마 그 계집이 당신을 여기로 보낸 거야? 날 죽이라고?'
그러다 곧 라벤더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이 독기 어린 눈빛으로 에단을 노려보았다.
'하,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그 위선을 떨더니 결국은······.'
'하리 아가씨의 명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라벤더는 에단의 말을 의심하는 기색이다가, 잠시 후 무엇을 생각했는지 표정을 피며 눈을 빛냈다.
'그럼 혹시 당신을 여기로 보낸 게 유진이야? 그래, 원래 당신은 유진의 사람이었지.'
그녀는 유진이 품었을지도 모르는 살의를 차라리 감미롭게 여기는 것 같았다. 자신이 그에게 그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생각에.
하지만 그것은 완벽한 착각이었다.
'라벤더 코르디스 양. 안됐지만 그분은 당신에게 일말의 관심조차 없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겠지요.'
물론 라벤더 코르디스를 향한 유진의 분노가 식을 일은 앞으로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에단부터가 지금 눈 앞에 있는 사람을 용서할 수가 없는데, 설마 유진이 그럴 수 있을 리는 없었으니까.
그런 의미로 그녀는 자신이 바라는 대로 유진에게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존재가 되는 데는 성공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굳이 그녀에게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당신은 공작님에게 있어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는 존재일 뿐입니다.
오늘 제가 이곳에 온 이유도 그분에게 따로 당신에 대한 언질을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무가치함을 되새겨 주는 편이 나을 것이다.
라벤더 코르디스는 자신이 오늘날까지 이렇게 살아 있는 이유가 온전히 하리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직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단순히 인정하기 싫은 것뿐이든가.
에단은 몇 년 전부터 서서히 변하기 시작한 에른스트의 분위기를 떠올렸다.
에른스트의 저택에는 지금 명백한 봄이 찾아와 있었다.
그에 맞춰 유진도 덩달아 녹아내린 얼음처럼, 언젠가부터 풍기는 분위기가 다소 온유해졌다.
예전 같으면 에른스트를 향해 이를 드러낸 사람을 결코 살려 두었을 리가 없는데도, 하리의 말 한마디에 살기를 한 풀 꺾을 정도로 말이다.
이 모든 것은 유진이 하리를 그만큼 존중하고 또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에단은 알았다.
'웃기지 마! 그럼 왜 날 찾아왔는데? 그딴 소리나 하려고 온 거야? 기껏 내 속이나 뒤집어 놓으려고?'
그러나 그것이 이대로 라벤더 코르디스를 용서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었다.
다만 유진의 분노는 그녀를 직접 죽이는 방식으로 해소되지는 않을 터였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은 하리가 모르는 방향으로 은밀히 이루어질 것이라 에단은 짐작하고 있었다.
'하리 아가씨께서는 당신이 죽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고 했으니 저 역시 그분의 의견을 존중할 생각입니다.'
하리는 라벤더 코르디스가 죽음으로서 고통받는 것보다 살아서 고통받는 것을 원한다고 했다. 그것이 죽음보다 더욱 끔찍하리라 생각한다고.
하지만 모두가 그것이 그녀의 상냥함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 오늘 만난 당신은 아직도 자신이 한 일을 반성도 후회도 하지 않는 것 같군요.'
'반성이라니, 내가 그딴 걸 왜······.'
스릉.
라벤더는 에단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드는 것을 보고 말을 멈추었다.
'뭐, 뭐야? 가, 가까이 오지 마.'
'저는 사람이 다른 누군가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과 똑같은 일을 겪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라벤더 코르디스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에단을 피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손과 발이 풀에 쓸리고 옷에 흙이 묻었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분위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등에 나무둥치가 닿아서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날카로운 검날이 움직이는 순간 라벤더는 단말마를 내지르며 질끈 눈을 감았다.
촤악.
하지만 에단이 검을 움직여 베어낸 것은 라벤더가 아닌 자신의 왼팔이었다.
라벤더는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행동에 잠깐 얼이 빠져 있다가, 곧 자신의 머리 위로 뻗어지는 팔에 목을 움츠렸다.
후두둑.
'무슨······.'
붉은 핏방울이 그녀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녀의 창백한 뺨을 타고 흐르는 붉은 액체가 한순간 피눈물처럼 보였다.
그러다 문득 라벤더 코르디스의 표정이 변했다.
'어딘가 익숙한 상황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에단의 조용한 음성이 숲의 청량한 공기를 가로질렀다.
섬뜩할 정도로 고요한 숲.
코끝을 스치는 비릿한 피 냄새.
몸을 지킬 만한 최소한의 도구도 없이 무방비하게 숲의 한가운데에 놓인 여인.
'아, 아아······.'
크르릉, 어디선가 들려오는 짐승의 낮고 거친 목 울림 소리가 귓가에 스몄다.
라벤더는 이제야 에단이 자신을 이곳에 데려와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조금 전에 그가 읊조린 말이 무슨 의미인지도.
공포에 질식할 것 같은 얼굴을 한 라벤더 코르디스를 향해 에단이 조용히 속삭였다.
'걱정 마십시오. 죽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렇게 휴가가 끝나고, 에단은 다시 에른스트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하리를 찾아가는 길에 그는 우연히 유진과 마주쳤다. 붉은 노을이 어린 복도에서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 보고 섰다.
'공작님.'
에단이 먼저 묵례해 인사하자 유진의 서늘한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그래. 오늘부터 다시 복귀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유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에단을 조용히 응시하다가 이내 그의 왼쪽 팔로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팔을 다친 것 같은데.'
부상 사실을 단번에 간파당한 에단이 한순간 멈칫했다.
그가 일부러 자신의 팔을 벤 것은 라벤더 코르디스가 했던 것처럼 애꿎은 동물의 피를 사용하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지만,
스스로에게 벌을 내리는 의미이기도 했다.
아마도 에단은 하리를 위험에 빠뜨렸던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앞으로도 계속 용서하지 못할 것이었다.
'신경 쓰실 정도로 큰 상처는 아닙니다.'
그리고 아마도 유진이 에단을 묵인하기로 결정한 것도 그 사실을 알기 때문일 터였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그의 진정성을 신뢰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마도 에단이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는 한,
앞으로 또다시 지난번과 같은 일이 생겼을 때 이번에야말로 그가 목숨마저 내놓을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에단은 누구에게도 자신의 이번 행적을 알리지 않았지만 유진에게도 사실을 숨길 수 있으리라 여기지는 않았다.
아마도 유진은 휴가 기간 동안 에단이 누구를 찾아가 무엇을 했는지 이미 빠짐없이 알고 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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