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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오빠들을 조심해!-127화 (127/138)

# 127화.

그 오빠들을 조심해 127화

"다음 주 중에 라수스 꽃 축제가 열린다던데. 전부터 가고 싶다고 했었지?"

그래도 다행히 어젯밤의 일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리는 바뀐 화제를 반기며 대답했다.

"응, 그때 시간 돼?"

"다음 주는 계속 한가할 예정이니까 괜찮아."

한동안 다이스 때문에 일거리가 몰려 바쁘더니, 다음 주부터는 그래도 여유가 되는 모양이었다.

"그럼 카벨 오빠랑 에리히한테도 물어봐야겠다."

오래간만에 다 함께 봄나들이를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져서 하리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유진은 그녀의 말에 수긍하지 않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이어서 흘러나온 유진의 말에 하리가 멈칫했다.

"둘이 가자는 얘기였는데."

"아, 둘이?"

당연히 다 같이 가자는 의미인 줄 알았기 때문에 하리는 약간 놀랐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도 유진과 단 둘이 꽃놀이를 가는 게 싫은 건 아니었으니까.

아니, 오히려 유진에게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녀도 그와 단둘이 외출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말고는 한동안 둘이 있을 시간이 없었잖아."

그러다 유진의 입에서 나온 말에 하리의 뺨이 슬쩍 상기되었다.

둘 사이에 감도는 공기가 조금 전보다 약간 몽글몽글해졌다.

"그럼 이번 꽃 축제는 우리 둘이······."

"꽃 축제 가려고?"

그렇게 하리가 막 다시 입을 열었을 때, 누군가가 그녀의 말 사이에 끼어들었다. 바로 카벨이었다.

"아, 배고파. 이제 좀 술기운이 가라앉네."

그는 부스스한 몰골로 머리를 긁으며 유진과 하리를 향해 다가왔다.

오늘 아침부터 내내 침대에 누워 숙취로 끙끙거리더니 이제야 좀 살맛이 나는 모양이었다.

"카벨 오빠, 이제 속은 좀 괜찮아?"

"오전부터 내내 굶었다면서. 배가 고프면 식당에 가서 뭐라도 먹지그래?"

하리와 유진이 차례로 상태를 묻자 카벨이 확실히 오전보다는 생생해진 얼굴로 말했다.

"어, 이제 괜찮은 거 같아. 진짜 식당에 가서 배 좀 채워야겠다."

그러다 그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아' 하고 소리 냈다.

"그런데 꽃 축제 가려고? 라수스 꽃 축제가 다음 주던가? 나 마침 그때 비번인데, 잘됐네."

언제나 그래 왔듯, 카벨은 눈치가 없었다. 그는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자신도 꽃 축제에 참여할 의사를 표명했다.

카벨의 말을 들은 유진과 하리가 동시에 멈칫했다. 하지만 카벨은 그조차도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해서 다음 주의 계획에 대해 떠들어 댈 뿐이었다.

"에리히도 마침 학술원 개교기념일인가 해서 다음 주에 하루 쉰다는 것 같던데. 와, 그러고 보니까 우리끼리 어디 놀러 간 건 엄청 예전 일인 것 같네?"

잠깐 유진과 하리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아마도 지금 두 사람이 생각하는 것은 비슷할 터였다.

음, 어쩔 수 없겠다. 카벨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이번 꽃 축제에는 단둘이 갈 계획이었다고 말하기도 그렇고.

게다가 모처럼 저렇게 들뜬 얼굴을 하고 있는데.

"그래, 에리히한테는 이따가 물어보자."

"그냥 내가 지금 물어보고 올게. 자기 방에 있지?"

"루이제랑 같이 나갔어."

"아, 진짜? 걔는 또 언제 왔대?"

결국 유진과 하리는 둘만의 외출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다소 아쉬움이 남기는 했지만 이번만 기회인 것도 아니었고, 또 원래 처음에는 다른 가족들과 함께 꽃 축제에 가는 것을 생각하고 있기도 했으니까.

음, 물론 단둘이 오붓하게 보내는 시간보다 모두와 같이 행동하는 시간이 어쩐지 월등히 많은 것 같기는 했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방법을 좀 강구해 봐야 할 듯 했다.

그렇게 비슷한 생각을 하며 유진과 하리는 시선을 맞댔다.

***

"공작님께서는 정말 악덕 고용주이십니다."

한편, 하리에게 했던 말과 달리 실제로 유진의 일정에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런데도 없는 시간을 만들어 내려고 하니 결국 죽어 나가는 것은 그의 보좌관인 로웬그린이었다.

"오늘 들어온 일거리만 해도 저렇게 수북한데 어떻게 이걸 이번 주 안에 다 끝냅니까?"

"난 그렇게 약한 생각을 가진 보좌관을 둔 기억이 없는데."

눈 밑이 거뭇해진 로웬그린이 통탄했으나 유진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안 되면 되게 하라'는 것에도 정도가 있지! 이건 거의 무에서 유를 창조하라는 수준의 횡포가 아닌가?

더군다나 이런 미친 일정을 감행하는 이유가 약혼녀와 함께 꽃 축제에 가기 위해서라니.

물론 단둘이 데이트를 하는 게 아니라 모처럼 시간을 내서 온 가족과 함께 외출할 예정이라고 했지만 로웬그린의 입장에서는 그게 그거였다.

"요즘 하리 아가씨하고 알콩달콩 재미가 좋으신가 봅니다? 전보다 신수가 아주 환해지셨어요.

황손 전하도 곧 성혼하신다고 입이 귀에 걸리셨던데, 이거야 원, 독신은 배가 아파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투덜거리다 보니 정말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로웬그린은 반쯤은 진심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저도 결혼할 때가 된 것 같은데, 오늘이라도 당장 맞선을 볼까요?"

"나쁘지 않지. 오늘 중에 퇴근할 수 있을 때의 얘기지만."

"공작님은 정말 악덕 고용주이십니다······."

마치 도돌이표를 찍듯 대화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렇게 한탄하는 와중에도 한시도 손을 쉬지 않고 있다는 게 로웬그린의 유능함이었다.

올해까지만 개처럼 벌고, 내년에는 꼭 돈 많은 한량이 되고 말 테다.

로웬그린은 또 한 번 굳게 다짐하며 눈물에 젖은 서류를 살폈다.

그러나 과연 그가 내년에 정말 이 고된 노동의 현장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는 오직 신만이 알 일이었다.

***

한편, 맞선 얘기를 듣는 남자는 여기에도 한 명 더 있었다.

"오슈드의 고명딸인 에이프릴 양이 요한, 네게 지대한 관심이 있다던데. 이번 가든파티 때 한 번 이야기나 나눠 보는 게 어떻겠니?"

사실 맞선이라기보다는, 실연의 아픔을 다른 만남으로 잊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는 주위 사람들의 은근한 권유였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강요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몇 번씩이나 같은 소리를 듣는 입장에서는 매번 가볍게 넘기기도 꽤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요하네스는 은근히 단호한 구석이 있어서 여느 때처럼 웃는 낯으로 그 권유를 흘려 넘겼다.

"이번 가든파티 때는 참석하지 않을 예정이어서요. 다음에 기회가 될 때가 있겠죠."

웃으며 에두른 거절에 그의 부모님도 더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후면 또 다른 영애에 대해 언질을 주며 한 번쯤 만나 보지 않겠냐고 슬며시 권할 것이 분명했다.

"너무 거절만 하는 거 아니야? 일단 한 번 만나 보면 의외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잖아."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방으로 향하는 길에 요하네스는 루이제와 마주쳤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 오간 대화를 복도에서 다 들은 눈치였다.

"글쎄, 지금은 굳이 그런 식으로 누군가를 만나고 싶지 않아. 그럴 필요성도 못 느끼겠고."

가족들이 왜 이러는지는 요하네스도 잘 알고 있었다.

요하네스가 하리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가족들 모두가 알았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그를 배려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요하네스에게는 지금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개중에는 혹시 진작 더 밀어붙였다면 지금쯤 하리의 옆에 있는 것은 유진이 아니라 요하네스일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정작 그 당사자인 요하네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리와 유진 사이에는 예전부터 형성되어 있던 묘한 유대감 같은 것이 있었다.

그것을 무엇이라 정의 내리면 좋을지 요하네스는 지금까지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아주 견고하고 끈끈하다는 사실만큼은 알 것 같았다.

그러니 애초부터 요하네스가 하리에게 유진 대신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합리화인 것 같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니 예전처럼 마음이 쓰리지는 않았다.

"뭐, 오빠가 그렇다면 할 수 없지만. 그래도 혹시 마음 바뀌면 말해.

내 주위에도 오빠 소개해 달라고 하는 영애들 많으니까. 나도 이럴 때 오빠 잘 둔 보람 좀 느껴 봐야 하지 않겠어?"

루이제도 부모님과 마찬가지로 아쉬운 듯했지만 결국은 강요하지 않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한밤중에 몰래 비밀 파티에 갔던 일로 요하네스와 부모님에게 혼이 났던 것이 불과 며칠 전인데도

루이제는 그 일을 마음에 하나도 담아 두지 않은 것처럼 밝기만 했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가면무도회가 있던 바로 다음 날에도 전날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혼자서 외출해 에른스트에 방문했었다.

그래도 한동안은 자숙할 줄 알았던 딸의 거침없는 행보에 당연히 부모님은 할 말을 잃은 눈치였다.

부모님은 그런 루이제를 두고 철이 없어서 걱정이라고 했지만 요하네스는 오히려 이런 부분이 루이제의 장점이라고 생각했다.

"혹시 내가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 오빠한테는 이번에 본의 아니게 도움을 받은 부분이 있기도 하니까."

"도움이라니, 내가?"

"응, 아무래도 겹사돈이 되면 좀 귀찮아질 뻔했잖아?"

"뭐?"

요하네스는 루이제의 말에 무심코 반문했다가 귀를 의심했다.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서 마주한 얼굴을 응시했으나 루이제는 여전히 태연한 낯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혹시 지금 내가 잘못 들었나? 겹사돈이라고 한 것 같은데."

"제대로 들은 거 맞는데 뭘."

"지금까지 네가 그런 내색을 한 적이 있었던가?"

"원래 남녀 사이란 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 아니겠어?"

설마 하는 마음에 되물었으나 돌아온 루이제의 대답에 할 말만 잃었다.

"뭐, 어차피 지금 당장의 일은 아니니까."

요하네스의 말문이 막혀 있는 사이, 루이제는 천연덕스럽게 말하며 자리에서 먼저 발길을 뗐다.

자신의 말이 오빠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조금도 모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복도에 혼자 서 있는 동안 요하네스의 머릿속에 온갖 폭풍우가 휘몰아쳤다. 잠시 후 그의 입에서 딱딱한 혼잣말이 읊조려졌다.

"······설마 카벨은 아니겠지."

물론 평소에 카벨을 대하던 루이제의 모습을 떠올리면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 싶기는 했다.

하지만 누가 봐도 두 사람은 자유분방한 분위기나 행동 같은 것이 묘하게 비슷하기도 했고,

또 지금까지 그런 낌새가 보이지 않았던 것은 에리히나 카벨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원래 남녀 사이란 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 아니겠어?'

게다가 조금 전에 루이제가 한 말은 실로 의미심장한 것이 아닌가?

요하네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어릴 때부터 어디로 튈지 모르던 루이제이니만큼 한 번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설마 하는 의심이 도통 사그라들지 않았다.

요하네스는 루이제가 사라진 곳을 복잡한 눈길로 응시하다가 마침내 무언가를 결심하며 자리에 못 박혀 있던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이제부터는 좀 바빠질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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