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그 오빠들을 조심해 126화
"잘 쉬고 있었어?"
"으응."
에리히는 빈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방에 들어가서 편히 있지."
"아니야, 괜찮아."
음? 그런데 기분 탓인지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에리히의 시선이 유진과 하리 사이를 번갈아 오갔다.
다정히 주고받는 대화도,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유진의 손길도 여느 때와 다를 것이 없었다.
저 두 사람이 연인 사이라는 것은 이제 완전히 공공연한 사실이었기 때문에 저택에서 일하는 사용인들도 이제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장면이었다.
물론 주위의 사람들을 배려하는 듯, 유진과 하리도 평소에 나름대로 언행을 자제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혹시 안 좋은 데 있으면 말해."
"걱정할 거 없대도 그래."
하리에게 감기 기운이 있는 걸 유진도 알기 때문인가? 그는 하리의 상태가 퍽 염려되는 것처럼 거듭 말했다.
그러자 하리가 걱정도 많다는 듯이 설핏 눈매를 찡그리며 웃었다.
그런데 평소에 비해 두 사람 사이에 감도는 분위기 같은 것이 어쩐지 조금 묘한 것 같았다.
에리히는 이 위화감의 원인이 무엇일까 좀 더 깊게 생각해 보려다가 곧바로 머리를 가로지르는 통증에 그냥 관두기로 했다.
아, 머리야. 아무래도 방에 들어가서 좀 더 쉬어야 할 것 같았다.
"난 다시 방으로 들어갈게."
"그래, 쉬어."
이마를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를 유진과 하리가 배웅해 주었다.
***
그래도 그날 오후 3시 정도가 되니 조금은 술이 깨는 기분이었다.
"멍멍!"
에리히는 페니를 데리고 정원으로 산책하러 나갔다.
"페니, 좀 천천히 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페니가 요즘 들어 기운이 없는 것 같아 걱정했는데 아무래도 괜한 기우였던 듯했다.
페니는 에리히가 밖으로 데리고 나오자마자 신이 나서 정원 곳곳을 누비며 뛰어다녔다. 에리히는 그 모습을 뒤에서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쌍둥이 여동생인 아리나가 죽고 나서부터 기르기 시작했던 페니는 이미 그의 또 다른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에리히가 빨리 학술원을 졸업하고 싶은 것도 거의 페니 때문이었다.
"멍!"
"그래그래, 예쁘다."
그러다 문득 아까 안에서 보았던 유진과 하리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사실 에리히는 아직도 두 사람을 볼 때면 어쩔 수 없이 조금은 속이 쓰린 것을 느끼곤 했다. 물론 그런 것을 굳이 내색할 마음은 없었지만.
하리는 평소에 눈치가 빠른 편이면서도 에리히의 마음만큼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 그는 너무나도 잘 알았다.
아마도 그것은 애초에 에리히가 하리에게 '그런 대상'이 될 수는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예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하리에게 굳이 자신의 마음을 밝힐 생각이 없었다.
그래도 전처럼 형과 하리의 얼굴을 보는 것이 그렇게 힘들지는 않은 것을 보면, 이제는 그도 조금씩 마음 정리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에리히 오빠!"
그렇게 에리히가 페니와 함께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바로 어젯밤에도 파티장에서 보았던 루이제였다.
에리히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루이제를 보며 잠깐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하지만, 그녀는 어제 봤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 보였다.
오늘의 루이제는 기겁할 정도로 맨살을 많이 드러낸 드레스를 입고 짙은 화장을 한 채
낯선 금발 가발을 쓰고 있던 어제의 그 여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루이제는 푸른 머리카락이 헝클어지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에리히를 향해 달려왔다.
에리히는 그 모습을 보고 바로 어젯밤에 그 사달을 낸 장본인치고는 참으로 태평하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페니랑 놀고 있었어?"
게다가 피곤하지도 않은지, 그녀는 아주 생생한 얼굴을 하고 있기까지 했다.
하룻밤 새 초주검이 된 카벨이나 에리히와는 아주 천지 차이가 나는 모습이었다.
물론 그들이 오늘 이렇게 기운을 못 차리는 것은 과하게 들이부은 술 때문이긴 했지만.
"우리 집에는 웬일이야?"
"뭐야, 내가 못 올 데 온 것도 아닌데?"
에리히의 정 없는 말에도 루이제는 가렵지도 않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페니, 잘 있었어?"
그러더니 그녀는 치맛자락에 풀물이 드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옆에 털썩 주저앉아 페니를 쓰다듬었다.
이쯤 되니 에리히는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요즘 왜 이렇게 나한테 친한 척이야?"
물론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나름대로 친분이 있던 사이이기는 했다.
더군다나 에리히는 카벨, 하리와 함께 한동안 바스티에에서 지내기도 했고 말이다.
그러는 동안 생각보다 말이 꽤 잘 통해서 사실 에리히는 요하네스보다 루이제와 친한 편이었다.
하지만 지난번처럼 루이제가 굳이 학술원까지 먼 길을 달려 그를 만나러 오고,
또 어제처럼 굳이 그런 서신을 보내 그를 파티장으로 불러들일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 에리히의 생각이었다.
게다가 지금도 루이제는 꼭 일부러 그를 만나러 오기라도 한 것처럼 정원으로 와서 페니를 어르고 있었다.
에리히의 의심 섞인 말에 루이제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대답했다.
"참나, 나 같은 예쁜 여자애가 친한 척해 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나 아니면 오빠랑 놀아줄 사람 있어? 보나 마나 페니밖에 없으면서."
그 말을 듣고 에리히는 와락 얼굴을 구겼다.
그가 나서서 같이 놀아 달라고 부탁한 적도 없는데 이건 또 무슨 황당한 소리인가 싶었다.
하지만 루이제의 말에 묘하게 반박할 거리가 없다는 사실이 또 조금 거슬렸다. 에리히에게 친구가 없는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그는 단 한 번도 친구의 필요성을 느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약간 짜증스럽게 뇌까렸다.
"난 친구 같은 거 필요 없거든?"
"아, 뭐야. 오빠, 진짜 친구 하나도 없어?"
"없으면 뭐."
루이제의 놀리는 듯한 말에 에리히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루이제는 무릎을 세우고 자리에 앉은 채로 그 위에 턱을 괴었다. 그러더니 그녀는 잠깐 말간 눈동자로 에리히를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자신을 직시하는 푸른 눈동자에 에리히는 묘하게 낯이 간지러워지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뭘 그렇게 쳐다봐?"
에리히가 눈살을 찌푸리며 까칠하게 묻는데도 루이제는 오히려 방싯 웃었다.
"정말, 하는 수 없네. 내가 거둬 줘야지."
당연하게도 에리히는 그 말에 기가 차서 입을 벌렸다.
하지만 루이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이 더 빨랐다. 그녀는 대충 치맛자락을 툭툭 턴 뒤 에리히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자, 그럼 가자."
"가긴 또 어딜 가?"
"모자 사러 갈 건데 같이 가서 골라 줘."
"뭐? 누구 마음대로······ 아, 잠깐!"
에리히는 귀찮음을 느끼며 거절하려고 했지만 루이제는 막무가내로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도대체 이 작은 몸 어디에서 이런 힘이 나오는 것인지, 팔을 잡아당기는 힘이 천하장사 뺨을 칠 정도였다.
그래서 결국 에리히는 반강제로 잔디 위에서 몸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남녀의 완력 차이는 있었기 때문에 루이제의 손을 뿌리치려면 뿌리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럴 마음까지는 들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예전부터 그랬다.
"내가 이미 오빠랑 같이 외출한다고 말해놨어. 오빠, 오늘 피곤하지? 그러니까 오늘은 금방 들여보내 줄게."
그럴 거면 차라리 아예 외출을 안 하면 되잖아.
그런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결국 실제로 내뱉어진 건 작은 한숨뿐이었다.
"내가 싫다고 해서 말을 들을 너도 아니고. 어차피 갈 거면 최대한 가까운 데로 가자."
에리히는 체념한 듯이 루이제의 손에 이끌려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너 진짜 카벨 형의 숨겨진 동생이라거나, 뭐, 그런 거 아니야? 어떻게 날이 갈수록 그렇게 닮아가? 아무리 봐도 넌 요하네스 동생이 아니야."
"말이 너무 심하네. 난 카벨 오빠랑 하나도 안 닮았거든!"
루이제가 발끈해서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에리히는 코웃음을 쳤다.
뒤에서 페니가 멍멍 짖으며 두 사람을 쫓아왔다. 걸음을 따라 싱그러운 풀 냄새가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여느 때와 같은 평화로운 하루였다.
***
"아무래도 루이제가 에리히한테 관심이 있는 것 같지 않아?"
조금 전에 짧은 인사를 마치고 곧바로 다시 문을 나선 루이제를 생각하며 하리가 말했다.
안으로 들이닥치자마자 어찌나 호기로운 목소리로 에리히를 빌려 가겠다고 외치던지.
얼마 전 학술원에 에리히를 만나러 간 것도 그렇고, 어제 가면무도회 때 에리히에게 서신을 보내 불러들인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이건 느낌이 다소 묘했다.
에리히와 루이제의 조합이라······ 어쩐지 고개를 갸웃하게 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나름대로 잘 어울린다 싶기도 했다.
물론 지금도 루이제의 등쌀에 에리히가 다소 피곤한 것 같기는 했지만.
"그러게. 좀 의외이기는 한데."
유진도 하리의 말에 짤막하게 동의했다.
그러나 그는 이 화제에 길게 관심을 두지 않고, 잠시 문가에 머물던 눈길을 다시금 하리에게 움직였다.
하리는 자신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검은 눈동자를 피해 고개를 숙였다.
"크흠. 케이크 맛있네. 오빠도 먹어 봐."
괜한 어색함에 헛기침을 하며 말했지만 유진은 여전히 하리의 먹는 모습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유진의 손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하리에게 뻗어졌다.
"묻었어."
단정한 손가락이 그녀의 입술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찌 보면 별 것 아니라고도 할 수 있는 가벼운 접촉에 하리는 움찔했다.
문득 오늘 새벽까지의 일이 다시금 머릿속에 떠올라 저도 모르게 뺨이 달아올랐다.
밤새 있던 일로 그녀의 목소리는 감기라도 걸린 것처럼 상한 상태였다.
어제 그녀와 함께 밤을 보냈던 유진과 지금 다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유진은 다른 사람 같았다.
어젯밤 그토록 쉼 없이 그녀를 몰아붙이던 것을 생각하면, 도대체 그가 지금까지 어떻게 참았던 것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래 놓고는 뒤늦게 그녀의 몸 상태를 신경 쓰며 몇 번이나 괜찮냐고 묻는 것이었다. 아니, 그럴 거면 애초에 좀 적당히 하던가.
크흠, 큼.
또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간밤의 기억에 하리는 괜히 또 헛기침을 했다.
으음, 그래도 카벨과 에리히가 둘 다 상태가 별로 안 좋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물론 두 사람이 숙취로 고생하는 건 안 됐지만. 그래도 만약 평소였다면 무언가를 눈치챘을지도 모르니까.
특히 에리히는 눈썰미가 좋은 만큼 하리나 유진에게서 대번에 수상함을 감지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 그나저나 이렇게 유진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게 너무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았다.
아까부터 유진을 볼 때마다 계속 어젯밤의 일이 떠올라서 매우 곤란했다.
아니, 사실은 혼자 있을 때도 마찬가지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막상 유진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으려니 더욱 어찌해야 할지 모르게 되었다.
그런 하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진은 여전히 그녀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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