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그 오빠들을 조심해 125화
카벨의 시선이 닿자 여자는 뻘뻘거리며 말했다.
그 모습이 오죽 가련하던지, 평소에는 거의 잊고 지내던 기사도의 정신마저 슬며시 떠오를 정도였다.
자신의 명예를 소중히 하고 약자를 보호하며······ 어쩌고 하는 온갖 성가신 규율들 말이다.
그렇다 해서 누구인지도 모를 여자의 가련함이 그의 마음까지 움직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카벨은 약간의 찜찜함을 느끼며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잡고 일어나시든가."
아무래도 조금 전의 일이 여자에게 꽤 적지 않은 심적 타격을 입힌 모양이다.
고작 이 정도 일로 이렇게 벌벌 떨 거면 애초에 이런 파티에 왜 나왔는지 의문이었지만.
뭐, 아까 들었던 바에 의하면 이런 파티인 줄 모르고 속아서 나온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평소 카벨이 보아 왔던 여자들에 비하면 행색이 수수한 것이, 아무래도 다이스의 성혼을 맞아 이번에 제도로 올라온 지방 귀족인 듯했다.
그러니 추측하건대 제도의 귀족들이 텃세로 질 나쁜 장난을 친 데 걸려든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그의 추측이었으니, 뭐, 아니면 말고. 사실 카벨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여자는 카벨이 큰마음 먹고 내민 손을 거절하지 않았다.
마침내 카벨의 손바닥 위에 얹힌 여자의 손이 너무 연약하게 떨리고 있어서 그는 다소 기분이 묘해졌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카벨을 향해 조금 바보 같을 정도로 말간 얼굴로 웃어 보였다. 가면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가 살포시 휘어졌다.
"감사해요, 기사님."
감사해요, 기사님······.
기사님······.
그 말이 한순간 카벨의 가슴을 사정없이 푹 찌르고 들어온 것은 어째서인지 몰랐다.
어, 어라? 뭐지? 방금 뭔가 좀 기분이 이상했는데.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조금 전에는 정말 머릿속이 새하얗게 돼서 큰일이었는데, 덕분에 살았어요."
여자는 키가 작아서 똑바로 일어서도 카벨의 가슴팍 정도밖에 오지 않았다.
"아, 전 데이지 템페르토예요. 저······ 역시 이런 가면을 쓰고 인사하는 건 좀 그렇겠죠?"
그녀는 상당히 무방비했다. 바로 조금 전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카벨의 앞에서 가면을 벗는 것을 보니.
물론 또다시 안절부절못하는 모양새이긴 했지만.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기사님."
여자가 맨얼굴을 드러내고 카벨을 올려다보았다.
여자의 머리카락은 노을을 닮은 짙은 주황색, 눈동자는 햇살 비춘 나무둥치 같은 따뜻한 갈색이었다.
보아하니 아까 그 황금 가면을 쓴 놈처럼 정체를 감추기 위해 가발을 쓴 것은 아닌 듯했다.
그를 올려다보는 동그란 눈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조금 전 느꼈던 것과 같은 이상한 감각이 그의 가슴팍을 훑고 지나갔다.
"어, 아니······."
카벨은 까닭 모르게 말문이 막혀서 잠깐 버벅거렸다.
티 한 점 없이 맑은 갈색 눈동자를 내려다보는 동안 이해할 수 없게도 가슴이 약간 근질근질하고 이상해졌다.
하지만 이런 느낌이 드는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카벨은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었다.
***
잠시 후, 카벨은 여전히 알쏭달쏭한 기분으로 홀을 걷고 있었다.
자신과 함께 있던 데이지 템페르토라는 여자는 그들이 테라스를 빠져나오자마자 나타난 '테오'라는 남자와 함께 사라졌다.
아무래도 둘이 잘 아는 사이 같았는데, 애초에 같이 이 파티에 참석한 건가?
반갑게 남자를 부르던 목소리가 떠오르는 순간, 갑자기 속이 조금 더부룩해졌다.
이상하네. 아까 뭘 잘못 주워 먹고 체했나?
"혼자 뭐 해?"
그때, 누군가 그를 향해 다가오더니 말을 걸었다. 카벨은 의아하게 얼굴을 구긴 채 배를 쓸어내리다가 깜짝 놀랐다.
"헐, 형이 왜 여기에 있어?"
이번에는 유진을 사칭한 자가 아니라 진짜 유진이었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긴 했지만 그렇다 한들 형을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 역시도 하리 때문에 이곳에 온 것 같았다.
"내 이름을 사칭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고?"
카벨이 지나가듯 흘린 소리에 유진이 관심을 보였다. 서늘한 검은 눈동자가 테라스가 있는 방향으로 미끄러졌다.
"얼굴 봤어?"
"어, 러셀 세리자드던데. 예전에 하리한테 껄떡거리다가 나한테 걸린 놈 있잖아. 지금은 쫓겨나서 파티장에 없어."
"조만간 만날 일이 생기겠군."
물론 카벨이 그 간 큰 남자의 정체를 확인하지 못했다고 해도 따로 알아낼 방법쯤이야 얼마든지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진을 사칭한 데다 하필 그 사실을 카벨에게 들키다니. 겁도 없고 운도 없는 남자였다.
"그럼 난 저쪽으로 가 볼게."
"그래. 혹시 엇갈려서 다시 못 볼 수도 있으니까 적당히 시간 되면 알아서 돌아가."
어쨌거나 지금의 우선순위는 하리였기 때문에 두 사람은 각자 파티장 안을 찾아보기로 하고 헤어졌다.
앗, 아까 그 여자다.
그렇게 가면무도회장을 얼마간 더 돌아다녔을 때, 아까 테라스에서 만난 여자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그녀는 지금 파티장을 떠나려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아까 봤던 '테오'라는 남자와 딱 달라붙어 있는 모습이 이상하게 눈에 거슬렸다.
아, 뭐지? 지금 막 저 사이에 끼어들어서 껌딱지처럼 붙은 팔을 확 떼어 내고 싶은 충동이 드는데.
오늘 바퀴벌레 같은 커플들을 너무 많이 봐서 그런가? 그래, 그런가 보다.
어딜 가도 망할 커플들뿐이라, 하도 안구 테러를 당하다 보니 이제는 한계가 찾아온 게 분명해. 에잇, 망할 바퀴벌레들!
벌컥벌컥!
카벨은 홀 안에 준비된 술잔을 들어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동안 그에게 먼저 관심을 표하며 접근했다가 '뭔가 생각했던 게 아닌데' 하는 애매한 얼굴로 떠나갔던 수많은 여자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괜히 울컥해서 카벨은 옆에 있던 다른 술잔들도 연거푸 비우기 시작했다.
에잇, 나도 여자 필요 없어! 난 검이랑 연애할 거야!
크흑,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또 뭔가 서러워져서 급격히 술이 당겼다. 그러는 동안 이번에는 에리히가 그의 옆에 나타났다.
"혹시 큰형 만났어?"
"어어, 너도?"
"응. 요하네스도 왔더라. 아까 루이제랑 같이 돌아갔어. 어, 뭐야. 그런데 혼자 웬 술을 이렇게 마셨어?"
카벨이 혼자 삽질하고 있는 동안 에리히는 루이제에 이어 유진까지 만난 모양이었다.
그러다 그는 카벨의 앞에 있는 테이블에 놓인 수많은 빈 잔들을 보고 멈칫했다.
"술이 날 겁나 좋아하니까 마셨지! 나 술한테 인기 무진장 많아, 왜 이래? 이 술들이 나한테 막 제발 좀 마셔 달라고 애원했단 말이야!"
"뭔 이상한 소리야, 갑자기. 취했어?"
"크으, 그래. 나도 네 마음 다 알아. 자, 내 인기를 너한테도 좀 나눠 줄게. 너도 나랑 같이 마시자!"
"아, 됐어. 난 안 마셔. 잠깐! 난 싫다니까!"
하지만 힘 앞에서는 장사 없었다. 에리히는 자신의 입에 술잔을 들이미는 카벨 때문에 결국 억지로 같이 술을 마셔야만 했다.
***
"아, 진짜. 형 때문에 이게 뭔 난리야."
다음 날, 에리히는 숙취로 고생하고 있었다. 전날 그 파티장에서 집으로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자, 여기 꿀차. 카벨 오빠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도대체 간밤에 무슨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셨어?"
시간은 이미 해가 중천에 걸린 한낮이었다.
다행히 오늘은 기사단에 출근하지 않아도 돼서 카벨은 골골거리며 자기 방에 엎어져 있는 상태였고,
에리히도 이제야 방 밖으로 기어 나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어젯밤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어제 카벨과 함께 술을 퍼마신 것 외에는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에리히의 앞에 하리가 손수 가져온 꿀차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조금 전에 카벨의 방에도 들러 이것과 같은 꿀차를 주고 온 참이었다.
숙취로 고생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은근히 닮아 있었다.
에리히는 여전히 두통과 씨름하며 하리가 준 차를 입에 가져갔다.
그러다가 문득 조금 전 그녀의 목소리가 약간 이상했던 것을 떠올리고 지나가듯 물었다.
"넌 목소리가 왜 그래? 감기 걸렸어?"
큽.
그 순간 에리히의 맞은편에 앉아 자기 몫의 차를 마시던 하리가 한순간 사레가 들린 듯이 기침했다. 그녀는 잠깐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말했다.
"요새 일교차가 커서 그런가 봐. 어제 옷을 좀 얇게 입기도 했고."
"맞아, 넌 집에 어떻게 왔어? 유진 형이랑 만났어?"
"어, 만나서 같이 왔어."
"언제? 카벨 형이랑 나보다 먼저 왔나?"
"음, 아마 비슷했을걸. 나도 정확히는 잘······."
평소의 에리히라면 그런 하리의 모습이 다른 때보다 약간 부자연스럽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상태가 영 좋지 못했기 때문에 에리히는 위화감을 깨닫지 못하고 그냥 넘겨 버렸다.
그래도 꿀차를 마시고 나니 울렁거리던 속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두 번 다시 어제처럼 술을 마시면 내가 인간이 아니라 개다.
에리히는 여전히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하리가 그런 그를 보며 슬쩍 말을 돌렸다.
"어제 루이제는 요한 오빠랑 같이 돌아갔다며?"
"맞아, 유진 형이 말해준 모양이네."
"너도 루이제 만났어?"
"잠깐."
하리의 입에서 루이제의 이름이 내뱉어진 순간, 에리히는 티 나지 않게 움찔했다.
어제 가면무도회장에서 만났던 루이제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탓이었다.
처음에 나타나서 그의 팔을 덥석 붙잡았을 때는 모르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여자의 변신은 참으로 무서웠다.
그나저나 그런 꼴을 하고 파티장을 쏘다니다니.
어젯밤 보았던 요하네스의 얼굴을 생각하면 아마도 바스티에로 돌아가 혼이 꽤 나지 않았을까 싶은데.
하여간 아직 어려서 철이 없는 건지, 깜짝 놀랄 만한 일을 잘도 저지른다니까.
물론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어릴 때부터 대범한 구석이 있긴 했지만.
그 대범한 루이제가 자신보다 고작 한 살 어리다는 사실을 잊었는지, 에리히는 혀를 쯧쯧 차며 생각했다.
게다가 하리까지 떡하니 인질로 잡아 놓고 에리히를 그 비밀 파티장으로 부른 것을 보면 확실히 보통 잔망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에른스트의 삼 형제에게 하리는 역린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바로 어제만 해도 하리가 그 가면무도회장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세 사람 모두가 출동한 것을 보면 너무나 뻔히 답이 나왔다.
물론 카벨 형 때문에 어제는 목적을 잊고 술을 퍼먹어 이 모양 이 꼴이 되긴 했지만 말이다.
"에리히, 이제 일어난 거야?"
"어, 형."
그때, 점심나절에 잠시 황궁에 볼 일이 있어 들렀던 유진이 돌아왔다.
어제 가면무도회장에서 이후 유진과 에리히가 이렇게 얼굴을 맞대는 건 처음이었다.
"카벨은?"
"아직 방에 있어."
"앞으로는 적당히들 마셔."
역시 전날 과음한 것 때문에 유진에게도 꾸지람을 들었다.
하지만 에리히는 어디까지나 카벨 때문에 강제로 술을 마신 것이었기 때문에 조금 억울했다.
그 후 유진이 에리히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하리에게 시선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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