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화.
그 오빠들을 조심해 123화
그 순간, 내 손에 닿은 유진의 팔이 약간 딱딱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가면 아래로 보이는 그의 입매도 조금 전보다 단단해졌다.
한순간이었지만 내 얼굴 위로 꽂히는 시선에 어딘가 낯선 이를 보는 듯한 눈빛이 어렴풋이 어렸다.
나는 유진의 동요가 재미있었다.
지금 무도회장에서 다른 여자들이 하는 행동을 보고 나도 한번 따라 해본 건데 의외로 효과가 있잖아?
혹시 이런 데 면역이 없는 걸까? 하긴 유진은 평소에도 점잖은 성정이었으니 이런 장소와 이런 노골적인 유혹에 그리 친숙하지 않을 것 같긴 했다.
"응? 나랑 놀자."
앗, 이러면 안 되는데 나도 모르게 재미가 들릴 것 같다.
나는 유진의 팔을 은밀하게 훑다가 손을 미끄러뜨렸다. 눈웃음을 치면서 유진의 가슴팍을 느리게 쓸자 그의 얼굴이 더 딱딱하게 굳어졌다.
곧 유진이 입술 틈새로 낮은 숨을 내뱉더니 내 손을 붙잡아 내렸다. 그러고는 느린 음성으로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일단 다른 사람들이 없는 데로 가자."
누군가 우리의 대화를 들었다면 청춘남녀의 하룻밤이 성사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유진이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에이, 조금 재미있었는데 더 맞춰 주지는 않을 생각인가 보네. 그럼 나도 이제 그만해야지.
"그럼 방에 가서 얘기하자. 여긴 테라스에도 사람들이 다 꽉 차 있더라."
나는 유진에게 속닥거렸다.
내가 귀찮은 남자들을 상대하면서도 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다.
어째서인지 내가 문을 연 테라스마다 한껏 분위기를 잡는 남녀들로 가득했던 것이다.
반면 아직은 가면무도회의 막바지가 아니라서 그런지 홀을 빠져나가 방으로 간 사람들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그편이 나을 듯했다.
물론 이런 무도회장에 마련된 방의 용도는 다들 알다시피 대개 그런 용도였지만.
하지만 나도 마침 홀을 떠나 좀 조용한 곳에서 쉬고 싶던 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혼자 몸으로 그런 곳에 어슬렁거리는 것은 위험했으니까,
지금까지는 그냥 테라스만 기웃거리다가 포기하고 다시 안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그래도 유진과 함께라면 괜찮겠지. 어차피 그냥 이야기만 나누는 거고, 이런 데서는 아무래도 듣는 귀 때문에 편하게 대화할 수도 없으니까.
그때, 불현듯 내 몸 위로 온기가 스몄다.
어느새 유진이 겉옷을 벗어 내 어깨에 걸쳐 줬기 때문이다.
아, 아앗! 아, 맞아. 나 지금 좀 민망한 행색이었지.
으어어, 지금까지 그 사실도 잊고 유진을 마주하고 있었네. 게다가 조금 전에는 그런 추파까지 날리고.
나는 약간 민망하고 겸연쩍어졌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유진은 별다른 말없이 나를 이끌고 자리에서 발길을 뗐다.
그 후 우리는 홀을 빠져나와 방들이 늘어선 복도로 진입했다.
"아까 보니까 카벨 오빠랑 에리히도 있던데 같이 온 거야?"
복도에는 아무도 없어서 나는 유진을 향해 속닥거리며 물었다. 그래도 분위기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죽여서 말하게 되었다.
"아니, 같이 온 건 아니야. 그 둘은 루이제한테 연락을 받아서 온 것 같던데."
"아, 역시 그렇구나."
아까 내가 루이제와 에리히를 보고 짐작했던 게 맞았다.
"그럼 오빠는 내가 여기에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나는 유진이 비어 있는 표시가 된 방 중 하나의 문을 밀어서 여는 것을 보며 물었다. 유진은 대답하지 않았고, 우리 두 사람은 방 안으로 함께 들어섰다.
오오, 이런 곳에 있는 방은 이렇게 생겼구나.
나는 신기한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가 무도회장에 마련된 이런 방에 들어와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동안은 휴게실만 이용했었고, 남자랑 같이 이런 장소에 와 볼 일도 없었으니까.
방 안에 깔린 은은한 조명도 그렇고, 붉은 캐노피가 드리워진 침대도 그렇고, 기분 탓인지 방 안의 풍경이 다소 야릇하게 느껴졌다. 그건 그렇고······.
"내가 맞혀 볼까?"
나는 내 뒤에 서 있는 유진을 돌아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자 치렁치렁한 내 검은 가발이 한 차례 허공에 나부꼈다.
조금 전에 유진은 자연스럽게 내 질문을 흘려 넘겼지만 나한테는 통하지 않았다.
"바스티에에 갈 때부터 이 무도회장에 올 때까지, 계속 날 몰래 따라다녔던 사람한테 들었지?"
떠보는 듯한 내 말에 유진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우리 둘 다 암묵적으로 입 밖에 내지 않는 일이기는 했으나 지난 라벤더 코르디스의 사건 이후로 내 옆을 지키는 사람은 에단만이 아니게 되었다.
나는 유진이 내게 사람을 붙여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호위하게 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걸 굳이 아는 척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유진도 내게 그 사실을 구태여 따로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뭐, 그럴 것 같기는 했어."
나는 방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와, 여기 발코니까지 있네. 분위기 한번 제대로 잡아 놨잖아?
나는 얼굴에 쓰고 있던 가면을 벗으며 유진을 돌아보았다. 그는 나보다 앞서 이미 맨 얼굴을 드러낸 상태였다.
"내가 이런 데 와서 화났어?"
아까부터 말이 없는 유진을 보고 나는 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가 대답했다.
"아니."
나는 내가 있는 발코니 쪽으로 다가오는 유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와 보지 않을 수는 없었어."
그런 그를 이해했다. 아마 반대의 경우였다면 나도 그랬을 테니까.
"알아. 나도 루이제가 걱정돼서 여기에 혼자 오게 할 수는 없었어."
나는 가까워진 유진을 올려다보며 발코니의 난간에 걸터앉았다. 그런 내가 위험해 보이는지, 유진이 좀 더 가까이 다가와 내 몸을 붙잡았다.
그래서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한결 안전하고 편안하게 자세를 잡을 수 있었다.
"루이제는 조금 전에 요하네스가 데려갔어."
앗, 요하네스도 여기에 왔었구나.
설마 루이제가 요하네스까지 여기에 부르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그럼 역시 들킨 건가? 그럼 루이제랑 같이 나도 여기에 온 걸 알고 있겠네.
그렇지만 아무래도 난 우리 집 삼 형제가 거두어 갈 것이라 생각해서 일단 루이제만 데려간 것 같았다.
끙, 나중에 요하네스랑 따로 만났을 때 한번 얘기를 해봐야 할 성싶었다.
"카벨 오빠랑 에리히는?"
"글쎄, 널 찾는다고 하던데."
"아, 그럼 내려가서 나 여기 있다고 알려 줘야 하려나?"
"애들도 아닌데 알아서 하겠지."
그건 그렇긴 하지.
나는 유진의 담담한 반응에 쿡 웃은 뒤 아까 홀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시 은근히 손을 움직여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럼 그냥 우리 둘이 놀까?"
이번에는 가면을 쓰지 않은 맨얼굴로 눈웃음을 치며 속삭이자 유진이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 후 나직한 음성이 귓가에 번졌다.
"어떻게 재미있게 해줄 건데?"
어디 한번 해볼 테면 해보라는 도발인 것 같기도 했고, 원하는 대로 장단을 맞춰 줄 테니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는 의미인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유진에게 상체를 기울이며 그를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으음, 내가 어떻게 해야 재미있을까?"
작은 속삭임 끝에 입술이 맞닿았다.
한 차례 시선이 마주친 직후, 입술이 더 깊게 포개졌다. 내가 먼저 시작한 일이었지만 유진도 거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키스는 점점 농익어 갔다.
그렇게 점점 숨이 찰 때쯤 나는 그를 살짝 밀어냈다.
"안으로 들어가자. 누가 볼 수도 있을 것 같아."
우리가 있는 곳은 발코니였기 때문에 혹시 모를 시선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진도 거기에 동의한 듯 난간에 걸터앉아 있던 나를 안아 올렸다.
내 어깨 위에 걸쳐져 있던 유진의 겉옷이 발코니의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나는 유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가 나를 안고 가는 동안 드러난 목에 입술을 내려 쪼듯이 간지럽히자 한순간 그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잠시 후, 방 안으로 들어와서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서로 입술을 맞댔다.
유진의 손이 훤히 드러난 등을 매만져서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오늘 내가 입은 드레스는 등 쪽이 완전히 파인 것이었기 때문에 피부 위를 훑는 뜨거운 손길이 가감 없이 느껴졌다.
오늘의 키스는 다른 때보다 뜨겁고 격렬했다. 나도 유진의 목을 끌어안아 거기에 응했다.
잠시 후 몸의 뒤쪽으로 푹신한 감촉이 닿았다. 그와 나는 몸을 겹친 채로 침대에 누워 다시 키스를 이어갔다.
그러다가 유진이 손을 움직여 내 가발을 벗겨 냈다.
아까부터 어쩐지 마음에 안 든다는 기색을 내비치더니, 계속 신경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검은색 가발 밑으로 내 은색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머리 헝클어졌을 텐데."
"예뻐."
내가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리자 유진이 짧게 말하며 다시 입술을 내렸다.
"으응."
어쩐지 평소보다 조급한 입맞춤이었다. 그는 묘하게 여유가 없는 것처럼 계속 나를 몰아붙였다. 그러다 그의 입술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피부 위로 닿는 뜨거운 숨결에 나도 모르게 예민하게 촉각을 곤두세우게 되었다.
나는 신음을 참으며 유진의 머리카락을 너무 힘주어 잡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점점 밑으로 내려가던 그의 숨결이 멈추어진 것은 내 가슴께에 다다라서였다.
어느덧 치맛자락 밑으로 드러난 내 무릎 위에 닿아 있던 그의 손도 움직임을 멈추었다.
잠시 후 유진이 내게서 손을 떼며 고개를 들었다.
"왜 멈춰?"
나는 숨을 불규칙적으로 색색 몰아쉬며 조용히 물었다. 그러자 유진이 손으로 내 뺨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이 이상 하면 도중에 그만두지 못할 것 같아서."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동자가 어둠 외의 것을 품은 채로 위험할 만큼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조금 전까지 있었던 일을 알려 주듯 유진도 나도 숨이 약간 흐트러져 있었다.
유진이 내 위에서 몸을 비키려 할 때,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만두지 않으면 되잖아."
그 순간 유진이 움직임을 우뚝 멈추었다.
"예쁨받는 것보다 예뻐해 주는 게 더 취향이라며?"
나는 유진을 이대로 보내 줄 마음이 없었다. 사실은 그를 이 방으로 데리고 왔을 때부터 이런 걸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지금 이대로 멈추는 건 내가 곤란하기도 했다.
"그럼 어디 한번 마음껏 예뻐해 줘봐."
그래서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그러고는 유혹하듯이 그에게 속삭였다.
"유진."
그 말이 방아쇠를 당긴 것은 확실한 것 같았다.
곧 유진이 모든 인내가 끊어진 것 같은 갈급한 얼굴로 한 차례 이를 악문 뒤 나를 잡아먹으려는 듯이 키스해 왔으니까.
나는 기꺼이 그를 반기며 내게 맞닿은 뜨거운 몸을 꽉 끌어안았다.
밤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외전1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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