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그 오빠들을 조심해 120화
그 순간 주변에 있던 몇몇 사람에게서 실소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만도 했다. 유진과 나는 친남매도 아닌데 외모가 닮았을 리가 있나.
지금 그가 한 말도 아마 우리를 친남매로 알고 있기에 꺼낸 예의상의 말일 터였다.
테오도르 칼루아는 아무래도 소문에 무딘 편인 모양이었다.
에른스트의 양녀가 되었던 소녀가 급기야 유리 구두를 신고 에른스트 공작 부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이미 아를란타 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의 해맑은 얼굴을 보니 알면서도 모르는 척 그냥 한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유진이 테오도르의 말에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말했다.
"지금은 약혼자입니다."
"아, 그러시구······ 예?"
테오도르는 또다시 해맑게 대답하다가 유진의 말을 나중에야 알아들은 것처럼 뒤늦게 멈칫했다.
"약혼자요?"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반문했다.
하지만 그가 놀란 부분은 같은 성을 가진 우리가 약혼 관계라는 사실이 아니었다.
"야, 약혼자가 있으셨······."
테오도르 칼루아의 얼굴에 떠오른 깊은 절망감을 보고 나는 곤혹감을 느꼈다.
으윽. 난 그에게 사실을 숨긴 적이 없는데, 어쩐지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보니까 꼭 내가 속인 것 같은 기분이 들잖아?
게다가 지금 나를 보는 그의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실연을 당한 사람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주위에서 우리를 보고 무척 흥미로워하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곧 정신을 차린 테오도르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미처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제가 실례를······ 그럼 방금은 제가 잘못 들었나 보네요. 분명 에른스트 공작님이라고 하셨던 것 같았는데."
그의 얼굴은 여전히 상심에 가득차 있었고, 지금 내뱉은 말도 진심으로 자신의 오해를 자책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다가는 대범하게도 유진과 나를 바로 눈앞에 두고 조롱하려는 의도로 비칠 수도 있었다.
지금도 주위 사람들은 그의 말에 유진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곤란한 상황이 되기 전에 유진에게 설명했다.
"얼마 전에 밖에서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는 칼루아 공자님이야.
다이스 전하의 성혼식을 맞아 친척인 템페르토 양과 함께 제도로 올라온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해."
"그렇군."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유진은 큰 반응을 내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가 이런 곳에서 멋모르고 실수한 영식에게 대놓고 무안을 주거나 불쾌한 티를 낼 것이라 여기지는 않았지만.
유진의 시선이 맞은편에 있는 테오도르를 한 차례 스쳐 지나갔다. 테오도르는 주위의 반응에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진은 더 이상 그를 상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담담한 태도로 지금의 만남을 종결지을 것을 고했다.
"그럼 오늘은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라겠습니다, 칼루아 공자."
"아······ 감사합니다."
그래도 자신이 무언가 실수한 것은 눈치챘는지, 뒤따른 테오도르의 목소리가 약간 흔들렸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그에게 다른 말을 하는 것도 우스웠으므로 나도 유진을 따라 발길을 돌렸다.
아마도 유진과 내가 자리를 떠나고 나면 이곳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테오도르에게 대신 설명해 줄 것이었다.
"칼루아 공자,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요. 기회가 된다면 나중에 다시 인사를 나누도록 해요."
그래도 그에게 나쁜 감정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언제일지 모를 나중을 기약하며 작게 웃었다.
내 미소를 본 테오도르는 그래도 조금 안심한 것 같았다.
"아무래도 네 추종자가 한 명 더 늘어난 모양인데."
그렇게 자리를 떠나왔을 때, 유진이 작게 찡그린 얼굴로 설핏 웃으며 말했다. 그는 조금 전의 일로 딱히 기분이 상하지는 않은 눈치였다.
"그냥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도와준 일이 있어서 그런 거야."
"도와주다니, 뭘?"
나는 유진에게 지난번에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물론 날아오는 숄을 붙잡아 실질적인 도움을 준 건 내가 아니라 에단이었지만, 지금 그에게 굳이 그 얘기까지는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고 보면 조금 전에 칼루아 공자가 유진과 나를 친남매로 본 것은 우리의 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그를 부른 호칭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그 부분은 나도 전부터 신경 쓰던 것이라 아무래도 조금 고민이 되었다.
이제부터라도 슬슬 호칭에 변화를 주는 편이 좋을까? 언제까지나 그를 오빠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말이지.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나. 역시 이름인가?
"윽."
"왜 그래?"
"아니, 그냥······."
나는 내가 그를 '유진'이라고 소리내 부르는 상상을 하다가 왜인지 그것만으로도 조금 부끄러워져서 뺨을 붉혔다.
유진의 시선이 그런 내 얼굴에 내려앉아서 나는 그 눈길을 피해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려야 했다.
하지만 곧 그의 손이 그런 내 얼굴을 다시 붙잡아 돌렸다. 그다지 강제적인 손길은 아니었지만 다시 그와 눈을 마주하게 만드는 데는 충분했다.
뺨에 닿은 손이 약간 서늘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내 얼굴이 달아올랐기 때문일 터였다.
"말해봐. 이유가 궁금해졌어."
그는 갑작스럽게 침음한 데 이어 뺨을 붉히며 고개를 돌리기까지 한 내 행동에 의문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냥 모르는 척해 주어도 되었을 텐데, 굳이 나를 붙잡고 이유를 묻는 것이 심술궂게 느껴졌다.
어르듯이 속삭이는 음성이나 엷은 웃음을 띠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아하니, 내가 자신의 앞에서 곤란해 하는 것이 퍽 즐거운 눈치였다.
"설마 내 앞에서 다른 남자 생각을 하면서 얼굴을 붉힌 건 아닐 테고."
조금 전까지 칼루아 공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는 소리였다.
하지만 과연 그의 말처럼 내가 이런 행동을 보인 이유는 칼루아 공자 때문이 아니었고, 유진도 그 사실만큼은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나는 볼멘 어투로 웅얼거렸다.
그러나 유진은 내가 대답해 줄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듯이 느긋이 내 얼굴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뺨과 이마에서 더 나아가 귀에까지 닿아오는 야살스러운 손길이 간지러웠다.
"그냥······ 에른스트 공작님이 오늘따라 너무 근사하셔서 갑자기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기가 쑥스러워진 것뿐이에요."
하지만 고집이라고 하면 나도 지지 않지.
나는 유진의 손을 붙잡아 내리며 그냥 그렇게 둘러댔다. 당연히 그는 믿지 않는다는 것처럼 한쪽 눈매를 슬쩍 찡그렸다.
그러다 문득, 갑자기 이 모든 게 전부 실없이 느껴져서 입술을 비집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런 나를 보고 유진도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여트막하게 마주 웃었다. 애초에 그도 나한테서 굳이 대답을 캐낼 생각까지는 없었던 것 같았다.
"나야말로 내 약혼녀가 날이 갈수록 눈부시게 아름다워져서 걱정이 많아."
"내가 오빠 두고 다른 사람이랑 도망이라도 갈까 봐 무서워?"
"응, 차라리 나만 볼 수 있는 곳에 가둬 버릴까 싶기도 하고."
내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유진이 쉽게 수긍하며 대답했다. 나는 마치 진담처럼 속삭여진 그의 농담에 작게 소리 내 웃었다.
"지금처럼 예쁘게 굴면 아무 데도 안 갈게."
이번에는 내가 손을 뻗어 유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를 볼 때마다 마음속의 애정이 가득히 넘쳐흐르곤 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주위에 보는 눈이 있었다면 그래도 이런 식의 행동을 삼갔을 테지만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단 둘뿐인 테라스였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순간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발뒤꿈치를 들어 유진에게 애정이 담긴 입맞춤을 해줄 수 있었다.
"그런데 숨만 쉬어도 예뻐서 큰일이네."
장난기를 담아 약간 과장되게 한숨을 포옥 내쉬며 내가 말하자 유진이 찌푸린 얼굴로 어렴풋이 웃었다.
"내가 해야 할 대사를 네가 먼저 하는 건 치사하잖아."
"나도 숨만 쉬어도 예뻐?"
"너무 예뻐서 내가 매일 죽을 맛이지."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노닥거리던 중에 문득 유진의 시선이 잠깐 내 뒤로 미끄러졌다. 혹시 뒤쪽에 누가 있는 것일까?
그러나 내가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리기 전에, 잠시 내 등 뒤에 머물러 있던 유진의 눈길이 다시금 나를 마주했다.
"역시 내 눈에만 네가 예뻐 보이는 게 아니라는 건 조금 불만이야."
어딘가 위험한 웃음을 띤 검은 눈동자 안에 내 모습이 담겼다. 나직한 음성이 귓가에 울린 직후 그의 손이 내 얼굴을 감싸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더 깊숙이 입술이 겹쳐졌다.
유진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기꺼이 그를 반기며 눈을 감았다.
***
그 후 테오도르 칼루아를 다시 만나는 일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데이지 템페르토 역시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나는 파티에 그다지 자주 참석하지 않았던 데다, 어쩌다 자리한 곳에서는 공교롭게도 그들과 번번이 어긋났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딱히 아쉬울 것도, 신경 쓸 것도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가끔은 두 사람이 제도 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을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아무래도 지난 생에서의 연도 있거니와, 또 그 두 사람에게 개인적인 호감이 있기도 해서였다.
그러나 내가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영역이란 애초에 한정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시골에서 올라온 목적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게다가 일부러 내가 먼저 그들을 찾아가서 도움을 주자니, 아직 그 정도의 친분을 다진 것도 아니어서 영 애매한 면이 있었다.
그래도 지난 생에서 아를란타를 한바탕 시끄럽게 만든 연애결혼의 주인공이었던 카벨을 생각하면 이대로 가만히 있기에도 조금 찜찜했다.
그가 아내인 데이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직접 두 눈으로 지켜봐 왔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래서 두어 번인가 그를 템페르토 양이 참석할 만한 파티에 보내 봤지만 아직 두 사람 사이에는 이렇다 할 만남이 없었던 것 같았다.
나도 그 이상 적극적으로 행동하기에는 다소 주저함이 있어서 더는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만약 그들이 이번 생에도 만날 인연이라면 굳이 누군가 손을 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어떻게든 되겠거니 하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래서 나는 카벨과 데이지에게 필요 이상의 관심을 버리기로 했다.
***
"루이제, 도대체 오늘 어디를 갈 건데 그래?"
오늘 나는 다시 바스티에에 방문한 참이었다.
루이제가 또 나를 초대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지난번에 나와 함께 외출해서 가려고 했던 곳에 아직 미련이 남은 듯했다.
좀 더 환한 대낮이 아니라 저녁 시간에 나를 부른 것을 보면 어딘가의 파티인가 싶었는데,
개중에 루이제가 이렇게까지 가고 싶어 할 만한 곳이 어디인지 쉬이 짐작할 수가 없었다.
"아직 비밀이야. 레나! 빨리 이리 와 봐."
그런데 루이제는 또다시 내게 곧바로 대답해 주지 않고 그저 비밀스럽게 웃으며 하녀를 불렀다.
"내가 아까 준비해 놨던 거 있지? 지금 그거 가져와. 그리고 에릴, 넌 이리 와서 머리랑 화장 좀 손봐 줘."
마치 기다렸다는 듯 척척 지시하는 그녀를 보고 나는 깊은 의혹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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