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그 오빠들을 조심해 118화
"응, 아침은 나 빼고 둘이 먹어!"
유진의 물음에 카벨이 역시나 빵을 입에 문 채로 옹알이 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그래도 씹던 걸 어느 정도 삼켜서 그런지 아까처럼 알아듣기 힘든 발음은 아니었다.
그런 카벨을 보고 유진이 슬며시 미간을 좁혔다.
유진도 나와 마찬가지로 아침밥도 제대로 못 먹고 급히 출근하는 카벨을 보니까 마음이 편치 않은 모양이었다.
"점심은 제대로 챙겨 먹어."
"알았어!"
그 말을 끝으로 카벨이 후다닥 걸음을 옮겨 식당을 빠져나갔다.
그 후 카벨의 빈자리를 대신하듯 유진이 안으로 들어섰다.
"앉자."
"으응."
으윽, 둘째가 오늘 일찍 출근한다고 미리 말해줬으면 나도 그냥 늦잠 자는 척했을 텐데······
아, 하긴. 어젯밤에 만나지를 못 했으니 말할 시간도 없었겠지. 으흑.
"잘 못 잤어?"
그때, 유진의 시선이 내 얼굴을 한 차례 스쳐 지나갔다.
"피곤해 보이네."
나는 그의 말에 뜨끔했다.
조금 전에 카벨도 그러더니만, 내가 잠을 못 잔 게 그렇게 티가 나나?
하지만 사실은 우리 집에서 제일 눈치가 없는 카벨조차 알아차릴 만한 일을 다른 사람이 모르는 게 더 어려울 것이었다.
"아, 아니? 잘 잤어. 엄청 잘 잤는데?"
나는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고 발뺌했다.
왜인지 여기에서 내가 밤을 새웠다는 걸 인정해 버리면 유진의 말에 동요해서 그렇다는 사실까지 들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이어 그가 담담히 내뱉은 말에 그런 내 고민은 너무나 하잘것 없어지고 말았다.
"그래? 난 잘 못 잤는데."
나는 잠깐 말문이 막힌 채로 맞은편에 앉은 유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식탁 위에 한쪽 팔을 올려 나른히 턱을 괸 채로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동안 이상하게 점점 목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곧 식당 안으로 들어온 사용인들이 식탁 위에 접시와 식기를 올리기 시작했다.
유진은 다른 말을 더 덧붙이지 않았고, 나도 조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나는 최대한 태연한 모습을 유지한 채로 컵에 든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아직 봄인데도 어쩐지 더웠다.
***
"휴버트, 그럼 다녀올게요."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아가씨."
그날 오후, 나는 휴버트의 배웅을 받으며 에단과 함께 외출했다.
목적지는 화려한 상점들이 위치한 번화가로, 해마다 그래 왔듯이 오늘 그곳에서는 봄을 맞아 꽃 시장이 열릴 예정이었다.
"아가씨, 손을."
목적지에 도착해 나는 에단의 손을 붙잡고 마차 밖으로 내려섰다.
거리에는 이미 향긋한 꽃 내음이 가득 퍼져 있었다. 그 향기만 맡아도 기분이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음, 역시 봄이 좋구나.
"사람들이 많군요."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꽃 시장이니까요."
주위를 둘러보던 에단이 지나가듯 내뱉은 말에 나는 웃었다.
에단이 이런 식으로 내게 직접 말을 건네는 일도 전보다 많아졌다.
물론 그와 나 사이에는 아직도 미처 좁혀지지 않은 거리감이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나는 에단과 함께 꽃 시장이 열린 곳으로 향했다.
매년 규모가 커지고 있는 꽃 시장은 번화가에 터를 잡고 있는 만큼 오가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탐스럽게 피어난 색색의 화려한 꽃들이 과연 그 옆을 지나는 이들의 시선을 한 눈에 사로잡을 만했다.
문득 몇 년 전 이곳에서 유진과 만났을 때의 일이 생각났다.
그날 우연히 마주친 유진에게 충동적으로 덥석 안겨 버렸던 작약의 행방을 내가 알게 된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다이스를 만나러 황궁에 갔다가 겸사겸사 유진이 일하는 곳에 들렀던 나는
그 한구석에 곱게 말려서 놓여 있는 작약 다발을 보고 한순간 눈을 의심했다.
물론 지금은 그때로부터 시간이 한참 더 흐르기도 했고, 또 내가 유진에게 몇 번이나 말해서 치워 버렸지만······
내가 준 꽃을 곧바로 버리지 않고 그렇게 오래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꽤 놀라웠다.
나는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며 작약과 프리지아 꽃을 각각 한 아름씩 구입했다.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십니까?"
"네, 오늘은 이제 되었으니 그만 저택으로 돌아가요."
다른 때 같으면 기분 전환 삼아 좀 더 돌아다니다가 귀가했겠지만 오늘은 거리가 너무 복잡했다.
게다가 어제의 피로가 아직 풀리지 않아 밖에 오래 나와 있기 힘들기도 했다.
나는 원하던 대로 싱싱한 꽃을 얻은 것에 만족하고 다시 마차가 서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응?"
그런데 조금 더 걸었을 때, 갑자기 웬 노란 천 조각이 내 앞으로 날아왔다.
나는 무의식중에 손을 뻗어 그것을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그러기 전에 에단이 먼저 움직였다.
어느덧 내 앞에 선 그가 놀라운 순발력으로 날아든 천을 붙잡았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섬세한 레이스 자수가 돋보이는 여성용 얇은 숄이었다.
아무래도 조금 전 바람이 불었을 때 누군가 실수로 놓친 것 같은데······ 그럼 주인이 금방 찾으러 오지 않으려나?
하지만 주위에 사람이 워낙 많아서 그러기 어려울 것 같기도 했다.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렸으나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요?"
일단 저 숄을 붙잡은 에단의 의견을 먼저 들어야 할 것 같아서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에단이 손에 들고 있는 노란 천을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분실물을 책임져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두고 가죠."
아, 앗? 단호하시네요? 아니, 물론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조금 더 기다려 보자고 할 줄 알았더니.
"앗, 잠깐만요! 그거 저희 거예요······!"
하지만 에단과 나는 분실물의 뒤처리를 오래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
다음 순간 앞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외치며 우리를 향해 다가왔기 때문에.
나는 에단과 내 앞으로 헐레벌떡 뛰어온 남자를 보고 물었다.
"이 숄을 찾고 계셨나요?"
"헉, 네······."
그는 급히 뛰어와 숨이 차는지 고개도 들지 못하고 무릎을 짚은 채로 잠시 숨을 골랐다.
행색을 보아하니 시종이나 호위가 아니라 번듯한 집안에서 잘 자란 영식인 것 같았다.
그럼 동행한 숙녀분이 잃어버린 물건을 대신 찾아주러 온 걸까?
나는 그를 향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바람에 더 멀리 날아가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아아, 감사합니다. 제 일행이 실수로 놓쳐서······."
남자도 그제야 여유를 찾았는지 고개를 들며 대꾸했다.
하지만 그는 말을 채 끝마치지 못했다. 허공에서 눈이 마주친 순간, 남자가 훅 숨을 들이마시며 굳었다.
넋이 나간 것처럼 크게 떠진 검은 눈동자 속에 내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입술을 작게 벌리고 있는 그 얼굴은 얼이 빠진 것처럼 멍했다.
아······ 이 사람, 지금 나한테 첫눈에 반했구나.
너무 솔직하게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반응이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이런 경험이 아예 없던 것도 아니라 그리 낯설지도 않았고.
나는 약간 난처한 기분을 느끼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에단도 비슷한 것을 느꼈는지, 슬쩍 나와 남자 사이에 끼어들어 시선을 차단했다.
음, 그런데 그냥 기분 탓인가? 이렇게 가까이에서 얼굴을 보니 어쩐지 조금 낯이 익은 것 같기도 한데······.
"테오!"
그 순간, 남자의 뒤에서 가느다란 여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그 소리를 쫓아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곧이어 시야에 들어온 여자의 모습에 나는 깜짝 놀라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말았다.
"나 때문에 미안해요. 숄은 그냥 안 찾아도 되니까······ 아?"
머리카락이 헝클어지는 것도 모르고 종종걸음으로 뛰어온 여자가 우리를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나와 에단을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에단이 들고 있는 노란 숄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 저기······ 테오, 이분들이 제 숄을 찾아주신 건가요?"
그녀는 허둥지둥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다가 이내 옆에 있는 남자를 향해 작은 소리로 속닥거렸다.
그러자 그때까지도 멍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던 남자가 퍼뜩 정신을 차린 듯이 꿈에서 깨어난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아······ 맞아요, 이분들이 찾아주셨어요."
"아! 감사합니다."
남자에게 확답을 들은 여자가 밝은 얼굴로 우리를 향해 인사했다.
"실은 아끼는 것이라 잃어버리면 조금 속상할 것 같았거든요. 정말 감사해요."
바람에 흩날리는 주황색 머리카락과 따뜻한 갈색의 눈동자. 약간 창백한 얼굴이 지금은 기쁨으로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먼저 인사드렸어야 하는데 실례를 범했네요. 저는 테오도르 칼루아입니다. 이쪽은 제 육촌인······."
"전 데이지 템페르토예요."
그들의 소개를 듣고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입을 열었다.
"하리 에른스트예요. 이쪽은 제 호위 기사인 에단 비숍 경이고요."
내가 대신 이름을 밝히자 에단이 그들에게 가볍게 묵례해 인사했다.
하지만 사실 나는 소개를 듣기 전부터 그들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처음 남자의 얼굴을 봤을 때만 해도 솔직히 기억이 가물가물했으나 뒤이어 나타난 여자는 내가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바로 지난 생에 카벨과 결혼해 내 새언니가 되었던 템페르토 자작 영애였다.
***
"카벨 오빠, 요즘 만나는 여자 있어?"
"뭐?"
그날 밤, 나는 귀가한 카벨을 붙잡고 은근한 어투로 물었다.
그러자 카벨이 갑자기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앗, 표정이 엄청 생생한 걸 보니까 저건 진짜다. 아무래도 지금 만나는 여자는 진짜 없는 모양인데.
아까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데이지 템페르토와 테오도르 칼루아는
그들이 원래 살고 있던 산 좋고 물 좋은 시골에서 제도로 올라온 지 며칠 되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만남에 조금 놀란 상태였다.
그녀가 이곳에 온 게 불과 며칠 전이라고 하니, 당연히 카벨과는 아직 만나지 않았을 테고······.
사실 나는 지난 생에 카벨과 데이지가 어떻게 만나 연애를 했는지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왜인지 그런 걸 궁금해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굳이 묻지도 않았고 말이다.
하지만 솔직히 불과 물처럼 완전히 상반돼 보이는 두 사람의 조합이 지금 생각해도 굉장히 의외이기는 했다.
으음······ 물론 지난 생과 비교했을 때 이번 생의 일들이 내 기억과 똑같이 흘러가지 않는 만큼 그들의 관계 역시 변하게 될 가능성이 있었지만.
"요즘 매일 연무장에서만 사는데 여자를 어디서 만나?"
"오빠 만나러 가끔 찾아오는 영애들 있었잖아."
"그 여자들은······ 그 여자들은······ 에잇, 다 필요 없어!"
잉? 그런데 반응이 왜 저래?
내 말이 카벨의 어느 부분을 자극한 건지, 별안간 그가 버럭 소리를 내지르며 비운의 주인공처럼 방에서 뛰쳐나갔다.
으, 으응? 도대체 뭐가 저렇게 억울하고 서러워서 저러는 거지?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어 카벨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며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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