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그 오빠들을 조심해 116화
[ 외전 1. 끝이라니, 이제 시작인데 ]
봄이 되면서 긴 겨울 동안 잠들어 있던 땅에 파릇한 새싹이 움텄다.
아를란타 전역은 얼마 전부터 축제 분위기였다. 황손 다이스와 로자벨라의 성혼 날짜가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하리가 보기에는 어때요?"
로자벨라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풍성한 치맛자락이 하얀 포말처럼 황홀한 물살을 그렸다.
나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로자벨라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웨딩드레스 차림의 로자벨라를 이렇게 제가 먼저 보게 되다니, 다이스 전하의 질투를 사도 할 말이 없겠네요."
옆에 있던 의상실의 사람들도 로자벨라에게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의상실 퀸 아라벨라는 황태손비가 될 로자벨라 벨론티아의 웨딩드레스를 제작할 영광을 얻으며 본격적인 부흥기를 맞았다.
웨딩드레스의 가봉을 위해 벨론티아의 저택으로 출장을 왔던 의상실의 사람들이 떠난 뒤 로자벨라와 나는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겼다.
벨론티아의 화원에는 봄을 맞아 색색의 예쁜 꽃들이 피어나 있었다. 우리는 그 한가운데에 있는 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결혼식 날이 기대돼요. 아마 로자벨라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신부일 거예요."
향긋한 꽃향기와 은은한 차향이 뒤섞인 아름다운 화원에서 로자벨라는 티 한 점 없이 맑은 얼굴로 예쁘게 미소 지었다.
그 얼굴에는 수심이 없어 나까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지난 겨울까지만 해도 그녀는 앞으로 자신이 맡게 될 중책에 대한 부담감을 내게 조심스럽게 이야기했었다.
더군다나 로자벨라는 지난번 사냥제의 사건 때 벨론티아의 하녀가 연루된 일로 더욱 회의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저택 내부의 일조차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황태손비, 더 나아가 미래의 국모가 되어 황실과 아를란타를 포용할 수 있겠느냐고.
그런데 로자벨라가 지금은 이렇게 걱정과 근심 없는 행복한 예비 신부의 모습을 하고 화사하게 웃고 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워요. 하리의 웨딩드레스도 기대하고 있어요."
로자벨라의 장난스러운 대꾸에 나는 약간 어색한 기분으로 하하 하고 웃었다.
"지금 당장 결혼할 계획도 없는걸요."
"그래도 제 생각에는 머지않을 것 같은데요?"
시간이 지나면서 유진과 내 관계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어졌다.
비단 내 주변뿐만이 아니라 밖에서도 우리의 이야기는 이미 공공연하게 퍼져 있었다.
하기야 지난 가을 이후부터는 유진도 나도 딱히 그런 사실을 숨기려 하지 않았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어차피 내 주변 사람들에게는 진작 털어놓은 사실이었고, 또 언젠가는 세상에 드러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크게 상관은 없었다.
예상했듯이 사람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신이 나서 우리에 대해 수군거렸다.
하지만 그들은 금세 태세를 전환해 전보다 더 내게 친한 척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말과 행동에서 그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여 조금은 입맛이 썼다.
원래도 에른스트의 울타리 안에 있는 내 신분과 미래의 황손 부부와의 친분 때문에 내게 다가오는 사람들은 많았다.
하지만 유진과 나에 대한 소문이 사교계를 한바탕 휩쓴 직후부터 내 앞에서 입안의 혀처럼 구는 이들이 확실히 늘어났다.
그런 것을 보면, 내 뒤로 비쳐 보이는 에른스트 공작 부인이라는 이름이 참으로 대단하긴 한 모양이었다.
음, 물론 지금의 난 에른스트 공작 부인이 아니었지만 솔직히 나도 언젠가 그 자리가 내 것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긴 했으니까.
크, 크읍.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자니 뭔가 굉장히 쑥스러운데······
왜냐면 내가 에른스트 공작 부인이 된다는 건, 유진과 내가 결혼을 한다는 거잖아?
그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열이 올라서 나는 눈 앞에 있는 차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런 나를 보고 로자벨라가 또 짓궂게 말했다.
"어머, 새삼스럽게 수줍어하는 거예요? 하리 양, 귀엽네요."
"로자벨라, 자꾸 그렇게 놀릴 거예요?"
"하리의 반응이 재미있으니 어쩔 수 없잖아요."
아무튼 한 가지 좋은 점은, 그 후 내 앞에서 유진의 혼담에 대해 묻는 사람들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로자벨라와의 파혼 이후 비어 있는 유진의 옆자리를 노리고 내게 다리를 놔주길 바라는 영애들이 종종 있었다.
때로는 귀부인들이 다가와 자신의 딸이나 조카의 이야기를 내게 넌지시 건네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사람들이 싹 사라졌으니 한편으로는 속이 시원하기도 했다.
이런 생각은 조금 유치했지만, 솔직히 내 앞에서 유진에 대한 흑심(?)을 드러내는 여자들을 볼 때마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물론 그들 중에는 아직 나를 마뜩잖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라벤더 코르디스의 일을 알아서 그런지 모두 조용했다.
나는 가타부타 말없이 내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그저 적당히 상대해 주었다.
어차피 저쪽에서 나를 먼저 배척하지 않는데 내가 굳이 나서서 그들을 쳐낼 필요도 없었고,
또 그렇다 한들 필요 이상으로 가깝게 지낼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뭐, 그래도 물론 뒤에서는 자기네들끼리 여전히 나에 대해 신나게 떠들어 대고 있겠지만.
하지만 사실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야 내게 있어 크게 중요하지 않았으니 상관없는 일이었다.
지금처럼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고 받아들여 준다면 나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다음에는 결혼식 날 뵙겠네요."
"오늘 찾아와 줘서 고마워요. 하리와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마음이 많이 편해졌어요."
결혼을 앞두고 로자벨라는 많이 바빠졌기 때문에 나는 시간을 오래 보내지 않고 벨론티아의 저택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나는 곧장 에른스트로 돌아가지 않았다.
오늘은 외출한 김에 바스티에의 저택에도 방문할 계획이었다.
"어서 오렴, 하리."
"안녕하셨어요, 아주머니?"
내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바스티에 부인이 나를 맞아주었다.
"미안해서 어쩌지? 루이제는 피아노 수업을 받는 중이어서 조금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아니에요, 제가 예정보다 일찍 도착했으니까요."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던 바스티에 부인이 이윽고 내게 권했다.
"괜찮다면 루이제를 기다리는 동안 함께 차라도 마시지 않겠니?"
"저야 기쁘죠."
당연히 나는 그녀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물론 벨론티아에서 이미 차를 마시고 오긴 했지만······ 그건 그냥 넘어갑시다.
그렇게 그녀와 나는 단둘이 응접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그래서, 청첩장은 언제 보내 줄 거니?"
푸읍.
갑작스러운 기습에 나는 그만 입에 있는 찻물을 뱉을 뻔했다.
"뭘 그렇게 놀라? 약혼식은 건너뛰겠다고 했으니 남은 건 결혼뿐이잖아."
하지만 바스티에 부인은 여전히 우아한 모습을 한 채 나를 지그시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오, 오늘 무슨 날인가요? 아까 로자벨라도 그렇고, 왜 다들 내 결혼이 얼마 남지 않은 기정사실인 것처럼······
아니, 물론 하긴 할 거지만. 유진이랑 결혼하기 싫다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아직 준비할 게 많아서요. 차근차근······."
"준비라니, 안주인이 될 준비?"
아, 안주인······.
직설적인 단어에 내가 다시 한 번 말을 잃은 사이, 바스티에 부인이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 후 그녀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 거라면 이미 준비는 충분하지 않니. 에른스트의 내적인 일들을 전부터 네가 처리하고 있다는 걸 안단다.
게다가 넌 내 손으로 직접 가르쳤으니까."
그녀의 말이 맞았다. 사실 나는 바스티에에 사는 동안 그녀에게 저택을 꾸려 나가는 일 등에 관해 여러가지 가르침과 조언을 받았다.
이런 이야기는 조금 씁쓸하지만, 아마도 그건 은연중에 그녀가 나를 요하네스의 짝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 터였다.
"네, 이곳에 있는 동안 아주머니께 아주 많은 걸 배웠죠."
나는 설핏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은 그저 심적인 준비가 아직 덜된 것 같아서."
잔잔한 공기 속에 그윽한 향기가 맴돌았다. 찻잔에 고인 액체에는 설탕에 절인 레몬 조각이 하나 띄워 있었다.
바스티에 부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하리, 빈말이 아니라 나는 너를 진짜 딸처럼 생각한단다."
그러다 귓가를 파고든 음성에 나는 마주한 사람에게 시선을 옮겼다.
"물론 내심 네가 요한의 짝이 되길 바라기도 했지만 강요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어.
그래서 혹여 섣부른 말 한마디가 네게 부담이 될까 그런 내색을 하지 않으려 내 딴에는 노력했고."
그녀의 말처럼 나는 바스티에에 있는 동안에도, 그리고 그 후에도 그들에게 한시도 배려받지 않은 적이 없었다.
자신의 의견이나 마음을 타인에게 고집하거나 강요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바스티에 사람들 특유의 상냥함인지도 모르겠다.
"알아요, 제가 그 마음을 어떻게 모르겠어요."
어쩌면 내가 요하네스의 마음을 거절하는 일이 그들에 대한 배반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다.
하지만 지금도 그들은 여전히 이렇게나 내게 다정했다.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진심으로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그 다정함은 원한다 해서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닐 테니.
"하리, 우리는 진심으로 네 행복을 바란단다."
내게 속삭이는 그녀의 말이 온전한 진심임이 전해져 왔다.
"그러니 네가 선택한 길을 믿고 앞만 보고 걸어가렴. 분명 그 길이 옳은 길일 테니까."
그 말을 듣는 동안 서서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제는 옆에서 내게 이런 말을 해 줄 어른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정말 어머니가 딸에게 말해주듯 부드럽게 다독이는 음성에 가슴이 약간 울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찔끔 새어 나오려 하는 눈물을 참으며 그녀를 향해 미소 지었다.
"감사해요. 저도, 항상 행복한 일만 있으시길 바라고 있어요."
***
"엄마랑 얘기 다 끝났어?"
응접실에서 나오자마자 루이제를 만났다.
그녀는 내가 자신의 어머니와 방에 있다는 소리를 듣고 온 모양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그냥 바로 문을 열고 들어왔을 텐데, 어쩐 일로 그녀는 밖에서 내가 나오기를 기다린 듯 했다.
방문 밖으로 나오는 나를 보고 복도에 쭈그려 앉아 있던 루이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녀는 잠깐 내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도 참. 이제부터 좋은 데 놀러 가려고 했는데 하리 언니를 이렇게 울리면 어떡해."
"아니야, 나 안 울었어."
"눈이 빨간데, 뭘."
윽, 그렇게 티가 나나. 거울을 못 봐서 잘 모르겠다.
바스티에 부인과 함께 있는 동안 나도 모르게 조금 감상적이게 되었던 것 같아서 조금 겸연쩍기도 했다.
"오늘은 그냥 내 방에서 놀자."
그렇게 말하며 루이제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잘은 모르지만 나랑 같이 밖으로 외출하려 했던 계획을 지금은 포기한 듯했다.
"어디를 가려고 했는데?"
"으음, 미리 말해주면 재미없으니까 다음에."
루이제가 비밀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여전히 의문스러웠지만 그녀는 결국 끝까지 대답해 주지 않았다.
***
나는 바스티에에서 저녁 식사까지 마친 뒤 에른스트로 돌아왔다.
유진과 카벨은 둘 다 바빠 늦게 귀가할 예정이라고 들었다.
음, 아무래도 오늘은 술을 좀 마셔야 할 것 같은 기분이야.
나는 지하 저장고에서 와인을 한 병 꺼내 와서 술잔에 따랐다.
애초에 취할 정도로 마실 생각은 없었고, 정말 딱 한 잔만 마시고 말 생각이었다.
그런데 장시간의 외출에 피곤했던 탓일까?
몸에 알코올이 흡수되기 무섭게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번인가 눈을 감았다 떴을 때, 내 몸 위로 누군가의 손길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약간 정신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어느덧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러자 은은한 불빛에 물든 유진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유진 오빠."
"깨우지 않으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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