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그 오빠들을 조심해 115화
그렇게 말해놓고 카벨은 흠칫했다.
의도치 않게 생각보다 단호하고 차가운 어투의 목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와 당황스러웠다.
그와 동시에 이상한 기시감이 밀려들었다.
무의식중에 형의 얼굴을 확인한 카벨은 그 원인을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 그들이 처한 상황은 어릴 때의 일과 상당히 닮아 있었다.
부모님의 죽음 이후 카벨이 슈마하에 한동안 머물다 돌아왔을 때.
그때 카벨이 자신과 대화하기를 원하는 형을 온몸으로 거부했던 상황과 어딘가 비슷했다.
그러나 유진의 반응은 그때와 달랐다.
그는 명백한 거부의 의사를 내비친 동생의 얼굴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와 비슷한 상황에서 한순간 상처받은 기색을 숨기지 못했던 어릴 때와는 달리, 지금의 유진은 능숙하게 겉으로 동요 한 점 내비치지 않았다.
그렇게 카벨을 가만히 보던 유진이 이내 소리 없이 어렴풋하게 웃었다.
역시 아직은 어쩔 수 없나, 하고 무언가를 체념하는 듯이.
"그래, 그럼 나중에 네가 원할 때 얘기하자."
그러나 유진은 어쩌면 카벨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일이 이대로 영영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말을 남기고 유진이 돌아서는 순간 카벨의 입술이 달싹여졌다.
아, 뭔가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밀려들었다.
어쩌면 이제 유진은 두 번 다시 그에게 지금처럼 먼저 다가와 말을 건네지 않을지도 몰랐다.
어릴 때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던 카벨에게 끊임없이 몸을 부딪쳐 그를 밖으로 끄집어냈던 것은 다름 아닌 형 유진이었다.
그때에도 카벨은 자신이 상처 입는 것이 두려워서 대신 형에게 상처를 입히며 이기적으로 행동했다.
물론 이번 일은 그때와 달랐지만 어째서인지 카벨에게는 그렇게 다르지도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멀어지는 유진의 뒷모습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바라보았다.
그리고 우왕좌왕하며 손을 들어 머리를 쥐어뜯다가 마침내 입을 벌렸다.
아, 제기랄!
"형!"
목청껏 외친 부름이 파란 하늘 가득히 울려 퍼졌다.
유진이 천천히 뒤돌아섰다. 그 모습을 보며 이번에는 카벨이 먼저 자리에 멈춰 있는 형을 향해 있는 힘껏 달려갔다.
***
"바람이 다소 찹니다. 그만 안으로 들어가시지 않겠습니까?"
"이 정도는 괜찮아요. 조금 더 걷다가 갈래요."
나는 웃으며 에단의 권유를 거절했다. 그는 다소 걱정스러운 눈치였지만 그래도 묵묵히 내 뒤를 따라왔다.
조금 전 카벨이 유진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보아서 그런지 마음이 다소 편안했다.
역시 카벨은 숨기려고 숨긴 것 같았지만 그 태도가 워낙 노골적이어서, 그가 유진을 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에른스트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 이유가 이유이니만큼 이번에는 나도 그런 그들에게 신경이 무척 많이 쓰였다.
이제는 조금 안심해도 되는 걸까. 애초에 나한테도 전과 같은 모습을 보여 주던 카벨이니만큼 조만간 유진과의 관계도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고 있긴 했지만.
사실 유진과 내 일에 대해 카벨과 에리히가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 두려웠는데 이제는 한시름 덜어도 될 것 같았다.
그들을 생각할 때면 마음이 따뜻한 감정으로 가득 차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예전에는 진짜 엎어 놓고 엉덩이라도 한 대 때려 주고 싶던 진상들이었는데······.
그런 과거는 이제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였다. 음, 갑자기 코가 조금 시큰해지는구나.
"다음 주에는 에단 경이 없어서 적적하겠어요. 그래도 이런 장기 휴가는 처음이죠? 이번 기회에 푹 쉬다 와요."
그러다 문득 에단이 다음 주부터 자리를 비우는 것이 생각나서 말했다.
그가 직접 휴가를 내는 것은 처음이라 조금 신기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내 호위를 하면서 지쳤을 것이 분명하니 이참에 제대로 쉬는 것도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의 근신은 사실 벌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에단도 마음고생이 심하기는 했을 것이다.
그런데 다음 순간 에단이 물끄러미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에단 경이 죄송할 게 뭐가 있어요. 그러지 마요."
나는 그에게 그럴 것 없다고 말해주었다.
에단은 지난 사냥제에서의 일로 줄곧 내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번 휴가를 핑계로 내 호위 기사 자리를 반납하려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리는 없으니까······.
아마도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잠시 시간을 가지려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뭐, 보나마나 잘 해결되었겠지.]
그날 저녁 나는 통신석을 통해 에리히와 대화했다. 그는 역시나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원래 형제 싸움도 해본 사람이 잘하는 법 아니겠어? 그리고 애초에 유진 형이랑 카벨 형이 서로 싸울 성격들이나 돼?]
그 말에는 나도 동의했다.
유진과 카벨이 진지하게 싸우는 장면이라. 음, 상상이 안 되는구먼.
하지만 사실 삼 형제 중 누구를 둘이 붙여 놔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뭐야, 그러고 보니까 셋 다 사이가 엄청 좋잖아?
[그 찜찜한 표정은 뭐야?]
"아니, 갑자기 다들 엄청 장하고 대견한 것 같아서."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흐뭇하게 웃었지만 당연히 에리히는 질색했다.
"다음에 바스티에에 놀러 가기로 했는데 너도 올 거지?"
[생각해 보고.]
"안 오면 아쉬울 텐데."
[누가, 내가?]
"아니, 내가."
내 말에 에리히는 잠깐 아무 말이 없었다. 곧 그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말했다.
[진짜 성가시네. 뭐, 정 그렇게 원한다니 한 번쯤 생각은 해보지, 뭐.]
아이고, 말은 그렇게 해도 결국은 같이 가 줄 걸 알았다.
에리히가 그 말을 끝으로 새침하게 통신석을 종료시켰기 때문에 나는 키득 웃을 수밖에 없었다.
***
"유진 오빠."
늦은 밤, 나는 유진의 방문을 두드렸다.
"지금 바빠?"
"아니, 들어와."
문틈으로 빼꼼히 고개 내민 나를 보고 유진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일하던 중인 것이 분명했지만 그는 여느 때처럼 나를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나는 오늘만큼은 유진을 방해하기로 하고 생긋 웃으며 방으로 들어섰다. 게다가 오늘은 그를 위한 특별한 선물도 있지!
"짜잔! 이게 뭐게?"
위풍당당하게 안으로 들어서 손에 있는 것을 보란 듯이 들어 올리자 유진의 얼굴이 변했다.
그는 웃는 듯 아닌 듯 묘한 얼굴로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지금 같이 술을 마시자는 거야?"
"응, 바로 그겁니다!"
나는 정답이라는 듯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유진은 내 돌발 행동에 조금 놀란 것 같았지만 오늘 같은 날은 원래 좀 마셔 줘도 되었다.
시간이 꽤 흘러 사냥터에서 다쳤던 곳도 전부 깨끗이 나은 뒤였기 때문에 문제는 없었다.
내가 한 손에는 술잔을, 한 손에는 술병을 들고 다가가자 결국은 하는 수 없다는 듯 유진도 함께 어울려 주었다.
잠시 후 우리는 소파에 나란히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앗, 그런데 안주가 없구나. 깜빡했다. 하지만 뭐, 그렇게 도수가 강한 술도 아니니까 괜찮지 않을까······.
"카벨 오빠랑은 얘기 잘했어?"
"일단은."
유진의 얼굴을 보며 지나가듯 묻자 그가 담담히 대답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유진의 얼굴이 기분 탓인지 전보다 가벼워 보였기 때문에 나도 밝게 웃을 수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나란히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이스 전하가 다음에 로자벨라 양이랑 넷이서 같이 오페라 하우스에 가자고 하던데."
"나한테도 비슷한 말을 해서 이미 거절했어."
"아, 사실은 나도 싫다고 했는데."
나는 유진을 보며 별생각 없이 덧붙였다.
"난 오빠랑 둘이 있는 게 더 좋아."
그 순간 테이블 위에 술잔을 내려놓던 유진의 손이 멈칫했다. 잠시 후 유진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손을 거두었다.
"그거 좀 위험한 발언인 것 같은데."
"위험한 발언인가?"
나는 유진의 말을 따라 하며 반문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런 상황이 뭔데?"
그러자 그가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
"벌써 취했어?"
"아아니?"
"취했군."
유진의 입에서 나직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나는 하나도 취하지 않았는데 좀 억울했다.
어라, 그런데 신기하다. 유진이 원래 이렇게 반짝반짝거렸던가? 유진한테서 막 빛이 나는 것 같아.
"이상해. 오늘따라 오빠가 엄청 예뻐 보여."
신기함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자 유진이 곤혹스러운 듯 눈매를 찌푸렸다.
"이제 그만 마셔."
유진이 내 손에 들려 있던 술잔을 빼앗아 갔다. 하지만 나는 이미 술 같은 것이야 어찌 되어도 상관없는 상태였다.
"유진 오빠아."
나는 유진의 얼굴을 덥석 붙잡았다. 그러자 그가 한순간 몸을 움찔 떨었다.
"왜 이렇게 반짝반짝거려? 도대체 뭘 먹고 이렇게 예쁜 거지?"
왠지 남자가 여자한테 작업을 걸 때 할 법한 대사인 것 같았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어째서인지 유진에 대한 애정이 평소보다 더욱 강렬히 샘솟아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잠깐, 하리······."
"쉬잇, 착하지? 얌전히 있어."
나는 참지 못하고 유진의 얼굴 곳곳에 도장을 찍듯 쪽쪽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나를 말리려는 듯 내 팔을 잡고 있던 그의 손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우리 유진 오빠 말도 잘 듣고 예뻐."
언뜻 유진의 눈빛이 위험하게 가라앉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무언가를 억누르듯이 잠깐 눈을 감고 깊은숨을 내쉬다가 이윽고 자신의 얼굴을 붙든 내 손을 잡아 내렸다.
"아마 내일이 되면 넌 날 칭찬해 주고 싶어질 거야."
그는 어딘가 자조적인 어투로 중얼거린 뒤 내 어깨를 잡아 가까이 끌어당겼다. 나는 엉겁결에 그에게 당겨져 상체를 허물어뜨렸다.
다음 순간 나는 유진의 다리를 베고 눕게 되었다.
아앗, 무릎베개다! 이런 거 처음이야. 나는 고개를 돌려 유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유진이 그런 나를 보며 또 한 번 작게 신음했다.
"지금 일부러 그러는 거야?"
"뭘?"
"아니······ 그래, 아무 생각 말고 그냥 얌전히 자."
그는 무언가를 체념한 듯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유진의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며 눈을 느리게 깜빡거렸다. 어쩐지 지금 이 순간, 굉장히 안락하고 평화로운 기분이 들었다.
"계속 오늘 같았으면 좋겠다."
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을 듣고 유진이 대답했다.
"그건 내가 곤란해."
나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지만 지금의 상황에 그가 다소의 난감함과 불만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유진은 곧 내가 어떤 의미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안다는 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여주었다.
"앞으로 오늘보다 더 좋은 날만 있게 해줄게."
확신하듯 읊조려진 목소리에 나는 어렴풋이 웃었다. 유진이 그렇게 말하니 정말 그렇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방이라도 잠이 쏟아질 것처럼 온몸이 기분 좋게 노곤했다.
아, 행복하다. 이런 행복한 순간이 언제까지나 지속되었으면 좋겠어.
잠결에 그런 말을 유진에게 하자 그는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거야'라고 속삭이며 내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나는 몹시도 따뜻하고 달콤한 기분에 휩싸여 잠이 들었다. 마치 설탕으로 만들어진 세계에 빠진 것처럼 지금 내 온몸을 감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지독히도 다디달았다.
<-그 오빠들을 조심해 본편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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