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
그 오빠들을 조심해 114화
라벤더의 말에 옆에 있던 카벨과 에리히의 기류가 또다시 변했다. 하지만 그런 그들과 달리 나는 무척이나 침착한 상태였다.
"그래, 네가 그 정도 인간이라 다행이야."
나는 라벤더 코르디스를 향해 자그마하게 읊조렸다.
그러고는 옆에 있던 에단에게 미리 준비시켜 놨던 내 물건을 건네받았다. 에단은 이제 근신이 풀려 다시 내 호위직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철컥.
내 손에 들린 총을 본 라벤더의 표정이 변했다. 나는 그것을 무시한 채 앞에 있는 사람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잠깐, 기······!"
탕!
커다란 총성이 다급한 음성을 집어삼켰다.
라벤더 코르디스는 심장이 멈춘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첫 번째 총알은 땅을 짚고 있는 라벤더 코르디스의 손 바로 옆에 박혔다. 빠른 속도로 날아간 총알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조금만 삐끗했어도 구멍이 뚫린 곳은 땅이 아닌 라벤더의 손등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응시하며 다시금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타앙!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발포된 총에서 화약 냄새가 났다.
나는 장전되어 있던 일곱 발을 다 쏘고 난 뒤에야 팔을 내렸다.
"아, 아······."
주르륵.
몸에서 힘이 풀렸는지 라벤더 코르디스가 바닥에 손을 짚으며 상체를 무너뜨렸다.
아마 이미 자리에 쓰러진 상태가 아니었다면 볼품없이 주저앉았을 것이 분명했다.
일곱 발의 총알 중 네 개는 땅에 딛고 있는 라벤더 코르디스의 손과 발 옆에 박혀 있었고, 세 개의 총알은 그녀의 몸을 스쳐 등 뒤로 날아갔다.
덜덜 떨리는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간헐적인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단단히 얼이 빠진 눈치였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라벤더 코르디스. 나는 너를 죽이지 않을 거야."
내가 쏜 총알은 결과적으로 모두 라벤더 코르디스를 비켜나갔다.
하지만 일부러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갈 정도로 총알을 빗맞혔으니 죽음을 목전에 둔 공포는 그대로 느꼈을 터였다.
"이대로 널 죽이는 건 너무 자애로운 형벌인 것 같아."
나는 자리에 멈추었던 걸음을 뗐다. 내 발소리를 들은 라벤더 코르디스가 크게 몸을 들썩이며 고개를 들었다.
"지금처럼 그렇게 평생 불행하게 살아."
여전히 그녀의 표정은 넋이 나가 있었다.
"네 아집에 갇혀서, 너와 다른 인생을 사는 나를 지금처럼 끝없이 시기하고 질투하면서, 앞으로도 네가 갖지 못한 것들에 탐욕적으로 집착하도록 해."
나는 그런 그녀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너는 내가 될 수 없고, 내가 가진 것들의 티끌 하나도 갖지 못할 테지. 네가 그토록 경멸하고 무시했던 사람을 평생 부러워하고 질시하며 사는 삶은 얼마나 끝없는 지옥일까."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을 죽이려고 마음먹기까지 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그 숲에서의 끔찍한 기억을 상기할 때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을 향한 강렬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만약 너에게 어울리는 형벌이 죽음이라고 생각했다면 난 지금 널 이 총으로 쐈을 거야. 지금까지 난 사람을 쏴 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이제는 네 덕분에 망설이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녀는 내게 용서를 빌 생각이 없었고, 나 역시 그런 그녀를 용서할 마음이 없었다.
그런 라벤더 코르디스를 깔끔히 죽이는 것은 그녀에게 관대한 처사였다.
"이번 일로 그런 각오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되었으니 그것만큼은 고맙다고 해야 할까?"
유진과 다른 형제들은 당연히 라벤더 코르디스를 죽이고 싶어 했지만 나는 죽음보다 더 비참한 삶이 있다고 믿었다.
자신의 가족들에게도 버림받은 그녀는 이제 제도를 떠나 외진 변두리의 별장에 평생 갇혀 살아야 했다.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최소한의 지원은 받을 테지만 그 이상의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제 사는 동안 그 저택의 문밖으로 한 발짝도 나올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혹여나 또다시 허튼수작을 부리지 않도록 평생 감시당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죽을 때까지 사는 것만 못한 삶을 사는 것이 그녀에게 주어진 형벌이었다.
"차, 라리 지금 죽여······."
라벤더 코르디스의 입에서 헐떡이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녀 역시 앞으로의 자신의 미래를 알고 있을 것이었다.
"차라리 지금 날 죽이라고!"
나는 발악하며 소리 지르는 라벤더의 얼굴을 차갑게 식은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뭘 망설이고 있어? 그 총으로 그냥 지금 날 쏘라······ 유진!"
그러던 어느 순간 돌연 그녀의 입에서 반색하는 음성이 내뱉어졌다.
고개를 돌리자 어느덧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는 유진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라벤더 코르디스의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황제를 알현하고 온 참이었다.
"그래. 당신이, 당신이 날 죽여 줘. 지금까지 당신의 손으로 죽였던 사람들처럼."
그녀는 유진에게 엉금엉금 기어가며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그리고 평생 날 기억하는 거야. 그렇게 당신의 일부로 남을 수 있다면 난 죽어도 좋아."
나는 그 말을 듣고 질린 기분이 되어버렸다.
정말 제대로 미쳤구나. 저런 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저렇게 자신도 상대도 파괴하는 행위를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
"라벤더 코르디스."
자신의 발치에 매달리는 여자를 시린 눈빛으로 내려다보던 유진이 이윽고 무릎을 굽혀 몸을 낮추었다.
가까이에서 마주한 그의 얼굴에 라벤더 코르디스가 일순간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전부터 내 주위를 맴도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이름을 외운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
하지만 유진은 조금의 배려도 온정도 없는 싸늘한 손길로 라벤더의 턱을 움켜잡았다.
"실로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더군. 네까짓 게 감히 하리의 발끝이나마 대신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다니."
등골이 오싹거릴 정도로 서늘한 목소리가 유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마주한 사람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 역시 잘 벼린 칼날처럼 더없이 차갑고 날카로웠다.
"내가 하리의 옆에서 얼쩡거리는 널 지금까지 가만히 내버려 두었던 것은 그녀가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야. 내가 널 이렇게 내 손으로 찢어 죽이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도, 그럼에도 널 살리기로 결정한 것도 모두 하리 때문이지."
그것을 정면에서 받고 있는 라벤더 코르디스의 얼굴에 서서히 아연함이 떠올랐다.
유진은 그런 그녀를 향해 계속해서 섬뜩할 정도로 무정한 말들을 쏟아 냈다.
"그녀가 아니라면 너라는 존재는 내게 있어 먼지보다 하찮기 짝이 없어. 차라리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가 더 가치 있을까. 그런데 감히 네까짓 게 주제도 모르고."
라벤더 코르디스의 턱을 억세게 틀어잡았던 손이 조금 더 아래로 미끄러졌다.
유진은 지금 당장에라도 라벤더를 목 졸라 죽이고 싶다는 것처럼 그녀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라벤더 코르디스가 숨을 헐떡이며 쉰 목소리를 입 밖으로 뱉어 냈다.
"저, 여자가 도대체 뭔데······."
"설령 하리가 없어진다 해도 너 따위는 그녀의 대용품조차 되지 못해. 애초에 그녀를 대신할 사람이 세상에 있을 리 없지. 그녀는 내게 단 하나뿐이니까. 넌 몇 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결코 하리가 될 수 없어."
그렇게 말하는 동안 라벤더의 목을 쥔 유진의 손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곧 유진은 그녀에게서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내 손에 죽는 것이 네게는 호사라는 건가. 그렇다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의미 없는 죽음을 맞는 것이 네게는 제격이겠군."
싸늘한 조소가 어린 음성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라벤더 코르디스는 실제로 유진에게 목이 졸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비정상적일 정도로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아로새겨진 절망이 또렷했다.
"이 시각 이후로 너라는 존재는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진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어디 한 번 비참하게 발버둥 쳐 봐."
유진은 라벤더 코르디스에게 닿았던 장갑을 벗어 오물을 버리듯 바닥에 떨어뜨린 채 뒤돌아섰다.
옆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황실 기사들이 다시 라벤더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돌아가자."
내게 다가온 유진이 나직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의 눈동자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 알 것 같기도 해서 나는 먼저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았다.
그러자 잠깐 움찔하던 유진이 천천히 그런 내 손을 맞잡아주었다.
우리는 바닥에 주저앉은 여자를 등지고 돌아섰다.
그리고 그 자리를 떠나는 동안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33. 오빠들과 나
카벨은 요즘 들어 환장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의 형인 유진 때문이었다. 아니, 사실 유진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를 평소처럼 대하지 못하는 자신 때문이라고 말하는 편이 좀 더 정확했다.
"아오."
그는 머리를 박박 긁다가 다시금 손에 들고 있는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도 카벨은 가족들이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몹시 부자연스러운 태도로 빠져나왔다.
옆에 있던 에리히가 한심하다는 듯이 그런 그를 쳐다봤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에리히 역시 유진과 하리의 관계를 알고 있다는 사실은 얼마 전에 그의 입으로 직접 듣게 되었다.
그날도 역시 카벨은 몹시 어색한 자세로 함께 있는 유진과 하리를 피해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에리히가 카벨에게 다가오더니 말했다.
'언제까지 그렇게 똥 눌 자리 찾는 강아지처럼 굴 거야? 어차피 앞으로 계속 봐야 할 광경인데 그럴 때마다 이렇게 어색하게 행동할 거야?'
하지만 카벨은 오히려 에리히가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사실을 다 알고서도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형과 하리를 대할 수 있는 거지?
그러나 사실 카벨의 행동에는 모순이 있었다.
그는 지난 사냥제 때의 일 이후로 하리를 다시 예전처럼 대하고 있었으니까.
아니, 오히려 예전보다 더욱 지극정성으로 하리를 돌보지 못해 거의 안달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형인 유진만 보면 자기도 모르게 절로 몸이 움직여 그를 피하게 되었다.
"으씨, 난들 이러고 싶어서 이러나!"
카벨은 답답한 마음에 버럭 소리 지르며 난폭하게 팔을 움직였다.
물론 죽을 때까지 그는 유진의 동생이고 하리의 오빠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 이건 별개였다. 그로서는 이 모든 일에 적응하는 것이 그렇게 쉽지가 않았다.
"카벨."
그때,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은 카벨의 어깨가 크게 움칫했다.
돌아서서 확인하자 어느덧 연무장에 들어와 그를 바라보고 있는 유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긴 웬일이야?"
형의 얼굴을 눈에 담자마자 또다시 지금 당장에라도 뛰쳐나가고 싶어 몸이 움찔거렸다.
유진은 조금 전 다 함께 모인 자리에서 먼저 빠져나간 카벨을 따라 나온 것이 분명했다.
"괜찮다면 얘기를 좀 하고 싶은데."
지금까지는 그런 카벨을 모른 척해 줬던 유진이지만, 이제는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유진은 꽤 차분하고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금 전 귓가를 스친 그의 목소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카벨은 그럴 수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입을 열어 말했다.
"별로 형이랑 얘기하고 싶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