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
그 오빠들을 조심해 113화
"오빠가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그런데 그런 극악무도한 여자를 하리가 직접 다시 만난다니.
"하지만 한 번은 봐야만 해."
라벤더 코르디스는 지금 황실에 연행된 상태였다. 국가적인 행사인 사냥제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만큼 황실 역시 이번 사건을 가벼이 넘기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서 만약 하리가 라벤더 코르디스를 만나게 된다면 그날은 이번 일의 판결이 내려지는 날이 될 터였다.
"그러기 전에는 나한테 있어서 결코 끝나지 않을 일이야."
하리는 여전히 조용한 목소리로 그에게 속삭였다. 그를 응시하는 눈빛이 단호하고 곧았다.
유진은 이런 눈빛을 보이는 하리를 말릴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얼굴에 닿은 하리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그 손을 지그시 감싸며 한동안 마주한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잠시 후, 유진이 하리에게서 시선을 비켜 내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붕대 갈아줄게."
하리는 유진이 자신의 손에 매인 붕대를 풀어내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이런 일은 하녀에게 시키면 되었지만 굳이 그런 말을 해서 유진의 행동을 막지는 않았다.
그녀에게 난 상처가 얼마나 아물었는지 확인하고 싶어 이러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어깨에도 짐승의 발톱에 긁힌 상처가 있었지만, 옷을 벗겨 그것을 직접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대신 손등의 상처라도 돌보려는 것이었다.
유진은 라벤더 코르디스의 구둣발에 밟혀 난 상처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다가 이내 묵묵히 손을 움직였다.
다시 깨끗한 새 붕대를 감는 것을 마친 후, 그는 그녀의 손을 천천히 감싸 쥐었다.
조금이라도 세게 힘을 주면 깨질 진귀한 유리 세공품을 만지듯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만약 네가 잘못되었으면 아마 나도 죽었을 거야."
작은 속삭임이 귓가에 울렸다.
유진은 마치 신에게 경배하는 듯한 숭고함마저 느껴지는 모습으로 붕대를 감은 하리의 손에 입술을 내렸다.
누가 들으면 사랑에 빠진 남자 특유의 어리석기 짝이 없는 말이라 비웃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진심으로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없으면 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오래오래 살아야겠네."
하리는 그의 말을 듣고 어렴풋하게 웃었다. 그리고 유진의 목에 팔을 둘러 먼저 그에게 안겨 들었다.
유진은 기꺼이 그런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깊이 숨을 들이마시자 익숙한 향기가 후각을 파고들었다.
바싹 밀착된 몸에서 두근두근, 심장 뛰는 소리가 울렸다.
유진은 그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더 지날 때까지.
***
"카벨 오빠 말이야, 설마 매일 저래?"
루이제가 떨떠름한 얼굴을 하며 묻는 소리에 나는 남몰래 식은땀을 흘렸다.
오늘도 우리 집 둘째는 아침 일찍부터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내 옆을 맴돌며 끙끙거리기 시작했다.
나한테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아주 여실히 보였다.
그래서 그 모습을 참다못해 조금 전 나 대신 페니와 함께 산책해 달라고 핑계를 대며 카벨을 밖으로 내보낸 참이었다.
"언제까지 저택에 있어야 하는 거야?"
"이번 주까지 계속. 다음 주부터는 다시 출근할 거래."
카벨이 이렇게 내 옆에 딱 붙어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가 근무지 이탈로 근신 처분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사냥터에서의 소식을 전해 들은 카벨은 뒤도 안 돌아보고 그 길로 바로 기사단을 뛰쳐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한달음에 내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나는 나 때문에 근신 처분을 받은 카벨이 신경 쓰였으나 그는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황궁에 출퇴근할 필요 없이 하루 종일 내 옆에 붙어 있을 수 있으니까.
에리히는 어쩔 수 없이 다시 학술원으로 돌아갔고, 유진은 라벤더 코르디스의 일로 저택을 비우는 시간이 늘어난 참이었다.
그 후 카벨은 그야말로 내 시종이라도 된 듯이 온갖 수발을 다 들어주고 있었다.
그는 이번에 내가 겪은 일에 대해 일종의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그 악독한 계집이 자기한테 보복을 하려고 이런 짓을 한 것 같다느니, 자신이 쓸데없는 일로 고민하지 않고 매일 내 옆에 찰싹 붙어 있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라느니 하며 고해성사라도 하듯이 울먹이면서 주절주절 떠드는 모습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물론 나는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라고 카벨에게 딱 잘라 말했다.
도대체 이게 왜 카벨의 탓이란 말인가? 에리히도 그날 나와 따로 떨어져 행동한 것을 후회하는 눈치였고, 유진도 그들과 비슷하게 자책하는 것 같았는데 이런 걸 보면 정말이지 셋 다 형제는 형제였다.
이대로 가만히 두면 한도 끝도 없이 땅을 파고 들어갈 것 같아서 세 사람을 불러 좀 단호하게 말했더니 그래도 좀 알아듣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에단에게도 같은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그는 현재 카벨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근신 처분을 받고 있었다.
나는 그 날의 일이 에단 때문이 아님을 주장했지만 유진은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하리. 들어가도 될까?"
그때, 문밖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안으로 새어 드는 목소리를 듣고 그가 누구인지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내가 들어오라는 말을 하자 곧 문이 열렸다.
"요한 오빠, 어서 와."
방 안으로 들어선 요하네스가 나와 루이제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마차가 들어서는 건 아까 봤는데 왜 이제 들어와?"
"앞에서 카벨을 만나서."
루이제의 물음에 요하네스가 대답했다.
아, 페니와 산책하러 나갔던 카벨하고 마주친 건가.
"몸은 좀 괜찮아?"
"응, 거의 다 나았어."
요하네스는 얼마 전에도 나를 만나러 온 적이 있었다. 역시 사냥제에서의 일이 있고 난 후였다.
지난번에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런 식으로 헤어져 줄곧 마음에 걸렸는데, 나를 걱정하며 먼저 찾아와 준 것이 고마웠다.
루이제도 요하네스와 내 일을 아는 것 같았는데 우리 두 사람의 입장을 배려하는 것인지 굳이 그 사실을 내색하지 않았다.
"며칠 전에 코르디스 백작이 폐하께 알현 신청을 했다고 하던데."
"응, 나도 들었어."
요하네스의 말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벤더 코르디스는 끝까지 자신이 한 일을 발뺌했다. 하지만 후에 시종과 호위 기사, 그리고 하녀의 증언이 잇따랐다.
그녀를 도와 숲까지 나를 납치하는 데 일조한 잔당들도 결국은 꼬리가 잡혔다. 물론 나도 내가 그 사냥터에서 겪은 일을 황실에서 나온 조사관에게 설명했다.
"네가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요하네스의 진심 어린 목소리에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애초에 라벤더 코르디스는 내가 살아서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으리라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으로, 혹시 다른 사용인들의 증언이 나왔을 때는 로자벨라 벨론티아가 나를 해하고 그녀에게 누명을 씌우려는 것으로 주장하면 될 것이라 생각했던 듯하다.
물론 나는 이번 일에 로자벨라가 관련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로자벨라는 자신의 하녀가 이번 일에 얽힌 것으로 심하게 마음고생을 한 것 같았다.
그녀는 내가 괜찮다고 해도 몇 번이나 사과하며 하녀에게 엄히 죄를 묻겠다고 했다.
코르디스에서는 라벤더를 버리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오늘 아침 코르디스 백작이 원하는 것을 내어줄 테니 가문의 피해는 최소화해 달라고 황실에 주청했단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는 얼마 전부터 라벤더가 방 안에 틀어박혀 이상한 행동과 혼잣말을 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며 그녀의 정신 이상을 주장했다.
그래서 이번 일도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딸이 몰래 저지른 잘못일 뿐, 가문과는 무관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라벤더 코르디스의 처분에 대한 결정은 쉽게 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며칠 후 그녀를 직접 만나 볼 수 있었다.
***
"라벤더 코르디스."
나는 기사들에게 연행되어 황궁을 빠져나오는 라벤더 코르디스를 시야에 담았다.
고문 같은 모진 형벌은 없었을 테지만 그래도 한동안 심문을 당한 탓인지 그녀의 얼굴은 약간 수척해져 있었다.
"너, 너······."
내 부름에 고개를 든 라벤더가 곧 두 눈을 부릅떴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을 처음으로 직접 확인한 그녀의 동요가 나한테까지 여실히 전해져 왔다.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그녀는 그 숲에서 나를 명백히 죽일 의도를 가지고 있었고, 또 내가 이렇게 멀쩡히 살아 돌아올 수 있으리라 여기지도 않았을 테니.
내 생존 소식을 전해 듣기야 했겠지만 이렇게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것과는 또 다르긴 할 것이었다.
"네가, 네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와?"
잠시 후 마주한 얼굴에 떠오른 것은 강렬한 분노와 모멸감이었다.
"지금 날 비웃으러 온 거야? 네까짓 게 감히 나를?"
그녀는 내가 이렇게 사지 멀쩡히 눈앞에 나타난 것이 퍽 유감인 모양이었다.
그녀의 말을 듣고 옆에 있던 카벨이 분개하며 이를 갈았다.
"이 미친 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진짜 뒈지고 싶어서 환장했냐?"
그 순간 라벤더의 몸이 눈에 띄게 흠칫 떨렸다. 나한테는 눈을 희번득하게 떴던 라벤더도 카벨은 두려운 모양이었다.
목에 핏대를 세운 카벨이 당장에라도 라벤더를 후려칠 듯이 위압적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에리히가 그런 그를 말렸다.
"그만둬. 지난번에 근무지 이탈로 근신까지 받았으면서 이번에는 진짜 정직당하고 싶어?"
"그딴 거 아무래도 상관없어!"
에리히의 만류에도 카벨은 여전히 으르렁거렸다. 그는 당장에라도 에리히의 손을 뿌리치고 라벤더에게 달려들 것 같았다.
그런 카벨을 뒤로 하고 에리히가 걸음을 옮긴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철썩!
"꺄악!"
날카로운 소리가 허공을 가로지른 직후, 라벤더 코르디스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형이랑 달리 난 잃을 게 없어서."
에리히의 푸른 눈동자가 유리 조각보다도 더욱 싸늘하고 날카롭게 빛났다.
그에게 선수를 빼앗긴 카벨이 어버버 바보같이 입을 벌렸다. 나는 나대로 에리히의 예기치 못한 행동에 놀란 상태였다.
라벤더 코르디스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조금 전 에리히에게 맞은 뺨을 감싸 쥐고 고개를 들었다.
에리히가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서늘히 입을 열었다.
"아파? 기껏해야 한 대 맞았다고 아파? 하리는 너보다 훨씬 더 아팠어."
한기 어린 음성이 주위에 떨어져 내렸다. 나는 에리히를 향해 다가가 진정시키듯 그의 손을 감쌌다.
"그만해, 에리히."
그가 나를 위해 분노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고마웠다.
하지만 그의 손을 더럽힐 가치조차 없는 일이다. 그런 의미를 담아 부드럽게 그의 손을 감싸 쥐자 으스러질 듯 세게 주먹을 쥐고 있던 그의 손에서 서서히 힘이 풀렸다.
그 후 나는 바닥에 쓰러진 라벤더 코르디스를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라벤더 코르디스, 나한테 할 말 없어?"
이제는 그녀의 얼굴을 볼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묻는 것이었다.
그러자 라벤더는 눈동자를 흔들면서 이를 악물다가, 이윽고 독기에 찬 얼굴을 하고 외쳤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그녀에게는 지금 자신이 처한 현실이 어지간히 억울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할 말? 할 말이라고? 설마 내가 너한테 사죄하면서 용서를 구하기라도 할까 봐? 웃기지 마!"
이런 상황에서조차 이렇게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보니.
"내가 후회되는 건 딱 하나야. 그때 그 숲에서 널 죽이지 못한 거!"
그 모습이 지금까지의 그녀와 비교했을 때 참으로 일말의 변화조차 없어서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