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
그 오빠들을 조심해 111화
나는 마른 침을 삼키며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울창한 나무 사이로 좁은 문처럼 자리한 파란빛이 보였다.
······사실 언젠가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물론 그것이 질투에 눈먼 미친 여자 때문일지는 몰랐지만.
레놀드 후작 부인의 손에 붙들려 강제로 저택 밖으로 끌려 나갔던 어린 시절부터 줄곧 생각해 왔던 일이었다.
또 유진이 다리를 다쳤던 때나 우리가 떨어져 지내는 동안 습격으로 인한 그의 부상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에른스트에 돌아와 다시 예전처럼 같이 모여 지내게 된 동안에도 늘 마음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때처럼 또다시 우리를 위협하려는 자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그들의 가장 손쉬운 목표물은 내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오늘 일은 다른 사람들이 많은 장소라고 해서 방심하고 있던 내 잘못이었다.
만약 라벤더 코르디스가 내게 먹인 독이 지금처럼 몸을 마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치명적인 맹독이었다면 아마 나는 손 쓸 틈조차 없이 그 자리에서 바로 죽었을지도 몰랐다.
또 만약 이런 일을 벌인 목적이 내가 아닌 에른스트였다면 나는 납치되어 내 가족들을 해칠 인질로 이용되었을 수도 있었다.
내가 좀 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해.
물론 이제 와서 이런 생각은 이미 늦은 것일 수도 있었지만, 나는 이미 수없이 짓씹어 찢긴 입술을 사리물며 마음속의 두려움을 밀어내려 노력했다.
라벤더 코르디스는 내가 서서히 공포에 질려 죽어가기를 바라고 이런 짓을 벌인 것이 분명했다.
그 심보가 참으로 고약하기 짝이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철컥.
나는 손에 들고 있는 것을 조금 더 단단히 고쳐 잡았다.
얼마 전에 에리히가 내게 선물해 주었던 총은 이미 피로 얼룩져 있었다. 아주 예쁜 은색 총이었는데, 나한테 묻은 피 때문에 순식간에 새빨간 빛으로 물들어버렸다.
만일을 위한 대비책으로 외출할 때마다 늘 다리에 고정해 치마 속에 숨겨 두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그동안은 내 옆에 항상 호위 기사가 붙어 있어서 웬만하면 사용할 일이 없을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설마하니 에리히가 준 총을 이렇게 빨리, 이런 식으로 꺼내게 될 줄은 몰랐다.
바스티에에 있을 때부터 사격을 배운 것이 다행이었다. 만일의 경우 이것이 내가 몸을 지킬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수단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다만 유진은 내가 총을 만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예전부터 사격을 배우는 것을 반대했다.
물론 그런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 자신의 가족이 누군가를 쏘기 위해 총을 드는 일을 기꺼워하며 반기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 테니까.
그리고 분명히 그는 내게 그 정도로 위험한 일을 겪게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을 것이다.
바스락.
문득 아까보다 가까운 곳에서 풀을 헤치는 소리가 들렸다. 고막을 긁는 듯 낮게 목을 울리는 소리가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내게서 풍기는 피 냄새를 맡고 나를 사냥하러 온 맹수였다. 이미 나는 저 짐승에게 한 차례 총을 발포한 적이 있었다.
피처럼 새빨간 눈을 가진 집채만 한 맹수는 나를 한입에 물어뜯으러 달려들었다가 내가 쏜 총에 놀라 물러났다. 하지만 그 주춤거림도 오래 가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쫓기고 있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포위망은 서서히 좁혀져 오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위협 사격에도 한계가 있었다. 지금 당장은 물러났다고 쳐도, 아마 저 맹수는 내가 살아 있는 한 사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총알이 다 떨어지고 나면 그 후에는? 아까 내가 쏜 총소리를 듣고 누군가 구하러 와 줄 확률은?
"후우."
나는 불안하게 떨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깊게 심호흡을 했다. 사실은 총을 잡은 손이 아까부터 떨리고 있었다.
팔다리는 무겁고, 머리는 어지럽고, 또 내 몸을 지킬 도구는 이 작은 총 하나가 전부다.
게다가 나는 피를 뒤집어쓴 채 맹수들의 숲속에 혼자 버려져 있었다. 이런 상황이 무섭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무력하게 가만히 앉아서 구조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잖아. 그리고 누가 이런 데서 쉽게 죽어줄 줄 알고?
그런 생각으로 이를 악물었다.
크르릉.
어느덧 다가온 맹수가 이를 드러낸 채 내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갈색 털을 가진 짐승은 나를 보고 입가에 침을 흘리며 피 같은 빨간 눈을 희번득하게 빛냈다.
그 날카로운 이빨이 당장에라도 나를 갈갈이 찢어발길 것 같았다. 기다란 발톱이 자라난 커다란 발도 나 따위는 단번에 으스러뜨릴 수 있을 것처럼 강해 보였다.
사박.
침을 뚝뚝 흘리고 있는 짐승이 내게 한 발짝씩 다가올 때마다 그 몸에 스치는 작은 풀 소리가 귓가에 스몄다.
온몸에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고 심장이 사정없이 쿵쾅거리며 뛰었지만 마주 보고 있는 눈동자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지금 쏠까?
하지만 아직은 거리가 너무 멀었다. 빗맞힌다면 가뜩이나 굶주린 짐승을 더욱 흥분하게 만들 뿐이었고, 또 아까운 총알만 허비하게 될 것이다.
그러다 문득 평소라면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이런 상황에서 생각보다 침착하게 행동하고 있는 스스로에게 실소가 났다.
너무 비현실적인 상황에 처한 탓에 오히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모양이었다.
물론 여전히 심장은 말도 안 될 정도로 크게 뛰고 있었고, 총구를 겨눈 손은 잘게 떨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스스로 해내야만 했기 때문에 물러날 수 없었다.
사박.
그런 와중에도 끊임없이 스스로 되뇌었다.
안 돼.
지금 당장 뒤돌아 도망가고 싶어도, 아무리 겁이 나도 지금은 참아야 해.
아직은 안 돼, 조금 더 기다려.
그래, 조금만 더······.
그리고 마침내 내 목을 물어뜯기 위해 도약한 짐승의 동공이 보일 정도로 가까워진 순간.
타앙!
마침내 발포했다.
날카롭게 갈린 발톱이 내 어깨를 할퀴고 지나갔다. 크게 벌린 입이 나를 한입에 집어삼킬 듯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바로 지척에서 마주친 붉은 눈동자가 마치 나를 지옥으로 끌고 가기 위해 온 악귀 같았다.
털썩.
나는 엄청난 무게에 떠밀려 중심을 잃고 말았다. 그런 내 위를 거대한 맹수가 망설임 없이 덮쳤다.
귓가에 메아리치던 총소리가 사라진 숲은 섬뜩한 침묵으로 가득 찼다.
잠시 후, 나는 가까스로 멈추었던 숨을 내몰았다. 한계까지 몰아붙인 폐에서 날카로운 고통마저 느껴졌다.
한 차례 크게 숨을 들이마시자 곧바로 비릿한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후두둑.
그때까지도 위에서 쏟아지고 있는 뜨끈한 피가 내 앞섶을 적셨다. 내 몸을 덮치고 있는 것은 여전히 미동이 없었다.
나는 거칠게 숨을 헐떡이면서 그 밑에서 겨우 빠져나왔다.
조금 전까지 나를 위협하던 짐승은 죽어 있었다. 내 총에 맞아서, 머리가 뚫린 채로. 여전히 부릅뜨고 있는 새빨간 눈이 마치 나를 노려보는 것 같았다.
한순간 눈두덩이가 뜨끈해지며 코가 시큰거렸다. 지금 막 새로운 피로 젖은 가슴 부근이 축축하고 뜨거웠다.
나는 다시 덜덜 떨리는 손으로 총을 붙잡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갓 걸음마를 배운 동물처럼 다리에 힘이 빠져 몇 번이나 휘청거리며 넘어져야 했고, 또 두어 번은 구역질이 치밀어서 걸음을 멈추어야 했지만 그래도 그 자리에서 멀어지기 위해 쉬지 않고 다리를 움직였다.
총소리를 듣고 누군가 나를 찾아와주면 좋을 텐데. 에단이 내 부재를 알아차렸을 것이 분명하니 아마 수색대를 보냈을 것이다.
그럼 그때까지 앞으로 얼마나 시간을 끌 수 있을까?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지?
지금 내가 북쪽을 벗어나 맞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는 걸었다. 어디인지 모를 탈출구를 찾아서.
타앙!
하지만 역시 길은 찾을 수 없었다.
그 후 나는 두 마리의 맹수를 더 맞닥뜨렸다. 한 마리는 죽이는 데 성공했고, 다른 한 마리에게는 상처를 입힌 뒤 도망쳤다.
첫 번째가 요행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듯 그 후에 만난 짐승들은 단번에 숨을 끊지 못했다.
그래서 이제 총알은 한 발이 남아 있었다. 이 숲에는 이제 몇 마리의 맹수가 남아 있는 것일까?
쿵쿵, 엇박자로 뛰는 심장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이걸 다 쏘면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잖아.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은 미래라 모르는 척하고 있는 것뿐이지.
"무섭지 않아."
무서워.
"난 안 죽어."
죽기 싫어.
하지만 그렇게 소리 내 읊조린 것이 무색하게도 점점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고개를 내려서 본 내 손은 온통 새빨갰다.
손뿐만이 아니었다. 팔도, 다리도, 몸도 전부 빨간 피로 칠갑이 되어 있었다.
아까 넘어지면서 접질린 발목이 아팠다. 구두 굽에 밟힌 손등도, 날카로운 발톱에 긁힌 어깨도 욱신거렸다.
아마 그 상처에서도 피가 배어나오고 있을 테지만 이미 내 온몸이 전부 피투성이였기 때문에 구분은 되지 않았다.
나뭇가지와 풀에 벤 살갗도 마찬가지였다. 한바탕 피를 뒤집어쓴 데다 땀까지 흘린 탓에 얼굴이 기분 나쁘게 끈적거렸다.
"하아, 으······."
나한테 풍기는 피 냄새와 두 눈을 찌르는 붉은빛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데도 어쩐지 질식하기 직전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폐가 쑤셨다. 그래서 목을 감싸 쥐고 계속해서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어디 한번 열심히 발버둥 쳐봐. 도망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는 편이 아마 너한테는 더 잔인할 테니까.'
'그리고 종국에는 미친 듯이 절망하고 또 절망하다가 버러지답게 죽어. 시체 한 조각도 남기지 말고 갈가리 찢겨서, 세상 그 누구보다 끔찍하고 비참하게.'
라벤더 코르디스가 잔인하게 남기고 간 말이 메아리처럼 귀에 울렸다.
심장이 너무 거세게 뛰어서 가슴이 뻐근하게 아플 지경이었다.
아마 이 총이라도 없었다면 라벤더 코르디스의 말대로 나는 진작 저들의 날카로운 이빨에 찢겨 죽었을지도 몰랐다.
아직도 해가 나무 꼭대기에 걸려 있는 것을 보니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체감하기로는 아주 오랫동안 이 숲을 헤매고 있었던 듯했다.
차라리 기절이라도 하면 편해질 것이 분명했지만 그건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바스락.
저 멀리서 또다시 풀을 밟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한 바람 소리를 잘못 들은 것일까, 아니면······.
들썩이는 가슴을 가라앉히며 총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탓에 정확히 어느 방향에서 소리가 들린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마음 깊이 녹아드는 불안과 두려움에 주위의 상황을 인식하는 속도가 느려지고 있었다.
기분 탓인지 주변의 공기가 조금 소란스러워진 것 같았다.
쿵쿵 뛰는 내 심장 소리와 풀잎이 부스러지는 소리, 그리고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지금 당장에라도 맹수의 어금니가 내 뒷덜미를 물어뜯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내 고막을 파고든 것은 바닥을 긁는 듯한 짐승의 울음이 아니었다.
"······하리!"
아······.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팽팽히 조여져 있던 긴장의 끈이 탁 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