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
그 오빠들을 조심해 110화
사냥제가 시작하고 시간이 꽤 지나서 그런지 주위는 한산했다. 아마 아까처럼 큰 천막에 모여 다 같이 친목을 다지고 있거나,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쉬고 있거나 하겠지.
나도 슬슬 에리히에게 가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얼마 걷다 말고 나는 갑작스럽게 치미는 구역질에 입을 막고 말았다.
"우욱."
조금 전까지는 분명히 괜찮았는데, 어째서인지 금방이라도 속을 게워 낼 듯이 토기가 올라왔다. 그런 나를 보고 에단이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가씨?"
"갑자기 속이······."
하지만 입을 열자마자 속이 급격히 울렁거려서 나는 급히 다른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천막의 뒤쪽은 공작새나 토끼 같은 작은 짐승들이 있는 서쪽 숲의 입구 부근이었다. 나는 나무를 붙잡고 주저앉아 헛구역질을 했다.
뭐지? 설마 급체인가? 하지만 별로 먹은 것도 없는데. 도대체 왜 갑자기 이렇게 속이 안 좋아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의무반이 있는 천막까지 제가 모실까요?"
에단이 보기에도 내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는지, 드물게도 당혹감 어린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나만 허락한다면 지금 당장 나를 둘러업고서라도 의사가 있는 곳에 데려가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음성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 걸음만 더 움직여도 속을 비워 낼 것 같아서 무리였다.
혹시 그러다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민망한 모습을 보이면 아마 난 십 년은 이불을 뻥뻥 찰지도 몰랐다.
"지금, 움직이는 건 무리······ 우웁!"
"그럼 제가 빨리 사람을 불러오겠습니다."
에단은 내 등 뒤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이윽고 결심한 듯이 급히 자리를 떠났다.
"어······?"
에단이 사라지고 얼마 후, 나는 현기증을 느끼며 바닥에 손을 짚었다. 조금 전까지는 속이 심하게 매스껍고 울렁거리더니, 어째서인지 이번에는 서서히 머리가 어지러워지며 손발이 차가워졌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급격히 시야가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팔다리에 힘을 줘 다시 일어서 보려 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뭐야, 아직도 의식이 남아 있잖아?"
그 순간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앞이 흐려지는 와중에 나는 고개를 돌려 그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려고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애써 붙잡고 있던 의식의 끈이 툭 하고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암전.
순식간에 어둠이 찾아들었다.
***
"일어나."
문득, 누군가 나를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수면 아래에 잠겨 있던 몸이 천천히 떠오르는 것처럼 느리게 의식이 돌아왔다.
그러나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나를 기다려 줄 생각이 없는 듯, 이번에는 다소 과격하게 내 얼굴을 때리는 방법을 사용했다.
나는 뺨에서 날카로운 통증을 느끼며 느리게 눈을 떴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네가 좀 더 발버둥 쳐 주지 않으면 재미없잖아."
처음에는 시야가 가물가물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몇 번 눈을 감았다 뜨자 서서히 주위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제멋대로 웃자란 풀이 즐비한 바닥에 누워 있는 상태였다. 시야에는 짙은 녹음이 무성했다.
작은 풀벌레 소리와 새 소리, 그리고 나뭇잎과 풀이 바람에 스쳐 내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귓가에 번졌다.
조금 전 나를 깨운 여자는 푸른 숲을 배경으로 하고 선 채, 바닥에 쓰러진 나를 미소 띤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작게 벌려 그녀의 이름을 속삭였다.
"라벤더 코르디스······."
왜인지 목이 잠겨서 소리가 잘 뱉어져 나오지 않았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나는 어쩐지 몽롱한 머릿속으로 의문을 느끼며 상황을 파악하려 노력했다.
"역시 넌 그렇게 벌레처럼 바닥을 기고 있는 게 어울려."
하지만 깊게 생각한 것도 없이, 라벤더 코르디스가 나한테 해코지를 하기 위해 이런 일을 벌였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오늘 사냥제에 참석하지 않은 줄 알았는데, 사실은 아니었나?
게다가 지금 내가 있는 곳은 나무가 울창한 숲속이었다. 조금 전에 갑자기 속이 매스껍던 것도 그렇고, 또 지금도 머리가 어지럽고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으로 보았을 때, 아무래도 나도 모르는 사이 독에 가까운 약물을 복용한 것 같았다.
나는 작게 신음하며 바닥에 쓰러진 몸을 일으키려 시도해 보았다.
"소용없어, 약효가 떨어지려면 아직 멀었으니까."
하지만 번번이 헛손질과 헛발길질만 하고 말았을 뿐이었다. 내가 자신의 발치에서 바르작거리는 것이 유쾌한지, 라벤더 코르디스가 나를 비웃으며 말했다.
나는 얕은 숨을 몰아쉬며 그녀에게 시선을 움직였다. 눈이 마주친 순간, 라벤더 코르디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까짓 게 뭔데 아직도 나를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콰득!
곧바로 날카로운 통증이 손등을 파고들었다. 라벤더 코르디스가 구두 굽으로 내 손등을 짓이기듯 밟았기 때문이다.
뼈가 부러진 듯한 고통이 밀려왔으나 그래도 그 덕분에 조금은 정신이 들었다는 점에서는 도움이 되었다고 할 만했다.
"난 말이야. 네가 행복해지는 꼴은 죽어도 못 봐."
여전히 나를 위에서 깔아보며 라벤더 코르디스가 말했다.
"너 따위가 내 걸 빼앗는 걸 멍청히 두 눈 뜨고 지켜보기만 할 줄 알고?"
그때 내가 본 그녀의 눈빛이 뿌리 깊은 증오심으로 얼룩져 있었기 때문에 나는 조금 전 내 손등을 밟은 것처럼, 또다시 라벤더가 내게 직접적인 위해를 끼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라벤더 코르디스는 내 손등에서 발을 떼며 옆에 있던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열어."
그녀의 명령을 받고 남자가 바닥에 놓여 있던 커다란 통의 뚜껑을 열었다. 그것의 생김새가 낯설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과 동시에 라벤더 코르디스가 직접 손을 움직였다.
촤아악!
통에 들어 있던 액체가 온몸에 끼얹어지는 순간, 나는 숨을 멈추며 굳었다.
코를 찌르는 비릿한 냄새가 숲속에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내 턱을 타고 뚝뚝 떨어져 내리는 것은 질척한 붉은 액체였다. 머리끝에서부터 그것을 뒤집어쓴 탓에 시야가 온통 새빨갰다.
'닭이나 토끼 같은 작은 짐승의 피일 겁니다. 북쪽 구역에 뿌릴 계획이라고 하더군요.'
아까 들었던 에단의 목소리가 한순간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제 알겠어? 여긴 위험한 맹수들로 득실거린다는 북 구역이야. 그리고 넌 그 짐승들의 메인 디시고."
그녀의 손에서 던져진 통이 풀밭 위를 나뒹굴었다. 거기에서 흩뿌려진 피가 파릇한 풀을 붉게 적셨다.
그제야 나는 라벤더 코르디스가 어쩐지 서두르는 듯한 기색을 보이며 움직였던 이유를 깨달았다.
나는 피 칠갑을 한 채 아연히 넋을 놓고 있다가, 이내 떨리는 입술을 벌렸다.
"미쳤어, 너······."
"아니, 미친 건 너야. 더러운 년이 주제도 모르고 감히 내 걸 탐내? 너만 없으면 다 원래대로 돌아갈 거야. 그러니까 너만 사라지면 돼."
라벤더 코르디스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내가 그녀의 얼굴에서 본 것은 일종의 광기였다.
"네가 없어지면 모든 게 내 뜻대로 될 거야. 네까짓 것 때문에 내가 이런 하찮은 취급을 받는 일도 없어질 테고, 너한테 빼앗긴 것도 다시 나한테 돌아올 게 분명해."
"나한테 빼앗겼다고?"
나는 강박적으로 반복해 읊조리는 라벤더 코르디스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착각하지 마. 내가 죽어도 넌 아무것도 못 가져."
악문 잇새로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가 사라지면 모든 것이 다 제 뜻대로 될 것이라니. 그것만큼 멍청한 소리가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내가 가진 것 중에 원래 네 것이었던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내 말에 라벤더 코르디스의 얼굴이 다시금 일그러졌다. 그녀는 지금 당장 나를 찢어 죽이고 싶다는 듯이 노려보았다.
하지만 내 몸을 흠뻑 적시고 있는 피가 자신에게 묻을 것을 우려해서인지 아까처럼 내게 직접 손을 대지는 않았다.
"그렇게 입이 살아 있는 것도 지금까지만이야."
대신 그녀는 내 마지막 발악쯤은 너그러이 넘어가 주겠다는 것처럼 다시금 표정을 풀고 말했다.
"사지를 결박하지 않은 내 자비에 감사하도록 해. 어디 한번 열심히 발버둥 쳐봐. 도망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는 편이 아마 너한테는 더 잔인할 테니까. 그리고 종국에는 미친 듯이 절망하고 또 절망하다가······."
무엇이 그녀를 그리 만든 것인지, 라벤더 코르디스는 상상만 해도 즐겁다는 듯이 노래하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그 모습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버러지답게 죽어. 시체 한 조각도 남기지 말고 갈가리 찢겨서, 세상 그 누구보다 끔찍하고 비참하게."
내 몸에 뿌려진 피 냄새가 주위에 자욱하게 고일 무렵, 그녀는 나를 향해 마지막으로 달콤한 속삭임을 남긴 채 뒤돌아섰다.
"굶주린 맹수에게 쫓겨 죽을 때까지 두려움을 맛볼 네 모습을 이 두 눈으로 지켜보지 못하는 게 유감이야."
그리고 마침내 나는 그곳에 혼자 남겨졌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둡고 깊은 숲속에, 피에 굶주린 맹수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한 채로.
***
"헉, 허억······."
시야에 짙은 녹색이 번져 들었다. 비틀거리며 걷는 동안 아지랑이처럼 눈앞의 풍경이 온통 일그러져 보였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으나 폐에 공기가 들어차기도 전에 다시금 소리를 죽이며 숨을 얕게 몰아쉬어야만 했다.
저 멀리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작은 소리 하나에도 예민하게 귀를 기울이며 나무 둥치에 몸을 기댔다.
라벤더 코르디스가 원하던 대로 나는 쫓기고 있었다. 몇 번이고 짓씹은 입술에서 내 것인지, 아니면 아까 뒤집어쓴 짐승의 것인지 모를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아직 남아 있는 약효 때문에 머리가 몽롱했다. 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라벤더 코르디스에게 구둣발로 밟힌 손등을 다른 손으로 짓눌렀다.
곧바로 지끈거리는 통증이 엄습했지만 이대로 넋을 놓고 있다가 짐승의 밥이 되는 것보다는 당연히 나았다.
라벤더 코르디스, 이 망할 계집애.
나를 이 꼴로 만든 사람을 향해 속으로 저주의 말을 곱씹었지만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도대체 어떤 사고방식으로 가지고 살면 이런 짓을 저지르게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명백하게 나를 죽일 생각이었다. 이렇게 잔인한 방법으로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나를 증오했던 걸까?
내가 라벤더 코르디스와 마지막으로 만났던 것은 기데온 백작가의 화원에서였다.
그럼 그때 내가 했던 말이 그녀를 자극해서 이렇게 된 것일까 싶었다. 그렇다면 그냥 참고 무시하는 편이 나을 뻔했나.
하지만 아니······ 아니었다. 남을 인간 이하로 취급해서 깔보고 욕보이려 한 사람이 나쁜 거잖아.
도대체 내가 그 여자한테 무슨 짓을 했는데? 몇 번을 생각해 봐도 지금 이런 꼴을 당해야 할 만큼 내가 그녀에게 잘못한 일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얼마 전에 라벤더 코르디스와 만났다던 카벨이 그녀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허탈감만 증폭시킬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