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
그 오빠들을 조심해 108화
그러다 문득 옆얼굴로 제법 선명한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직후, 언젠가부터 나를 바라보고 있던 에단이 두어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곧 그가 내게 내미는 것을 보고 나는 두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주는 거예요? 저한테?"
에단의 손에 들린 것은 언제 꺾었는지 모를 아네모네 꽃이었다.
내가 놀라서 묻자 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자신의 손에 들린 꽃과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아가씨의 눈동자 색과 닮았습니다."
나는 약간 얼떨떨하게 내 앞에 내민 꽃을 보다가 결국 풋 웃으며 그것을 받아 들었다.
"고마워요. 예쁘네요."
예전에도 에단을 살금살금 가까이 다가오는 길고양이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도 꼭 다람쥐가 친해진 사람에게 솔방울 같은 걸 물어다 주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리."
바로 그때, 나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유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유진 오빠."
내 예상대로 그는 약속 장소에 먼저 와 있는 나를 보고 조금 놀란 것 같았다. 아마 갑작스러운 알현 신청이 있지만 않았다면, 나도 좀 더 다이스의 푸념을 들어주다가 나와야 했을 테니까.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어?"
"얼마 안 됐어. 나도 지금 막 나온걸."
내가 대답하자 유진이 슬쩍 미간을 좁혔다. 척 봐도 예기치 못하게 나를 기다리게 만든 것을 마뜩잖게 여기는 눈치라, 나는 그런 그를 보며 작게 웃었다.
그러다 문득 유진의 눈길이 내 손에 들린 꽃에 닿았다. 조금의 눈썰미만 있어도 그것이 지금 내 옆에 펼쳐진 화원의 꽃과 동일한 종류의 꽃이란 사실을 알 수 있을 터였다.
나는 그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에단 경이 줬어."
"에단이?"
유진의 시선이 옆에 있는 에단에게 느리게 미끄러졌다. 에단은 그런 유진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말없이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향기가 엄청 좋아. 맡아 볼래?"
나는 에단에게 뜻밖의 선물을 받아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그래서 그가 준 꽃을 유진에게 내밀며 향기를 맡아볼 것을 권했다.
유진의 검은 눈동자가 가까이 다가온 보라색 꽃송이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유진의 손이 들어 올려졌다. 하지만 그는 눈앞에 있는 꽃을 건네받는 대신 내 손을 붙잡아 가까이 당겼다.
허공에서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멈칫했다. 유진은 그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나와 눈을 맞춘 채로 내 손을 얼굴 가까이에 대고 얕게 숨을 들이마셨다.
"손에도 향이 뱄네."
나는 괜히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약간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꽃에서 나는 향기 아니야?"
"너한테 나는 것 같은데."
유진도 나를 따라 설핏 여트막한 웃음을 그렸다. 그 후 내 손에서 꽃을 빼내 가는 유진의 움직임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는 조금도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황궁의 꽃은 황족 소유라 함부로 꺾으면 중형을 받을 수 있어."
앗, 그 말을 듣고 나는 흠칫했다.
유진의 말이 맞았다. 황실의 화원에 핀 꽃은 황실의 소유물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그것을 마음대로 꺾는 행위는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양산에 가려져서 안 보이지 않았을까?"
유진의 말을 듣고도 여전히 무덤덤한 에단과 달리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 나를 향해 유진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래도 이걸 가져가는 건 위험할 거야."
절대 강요하는 어투는 아니었지만 내용이 내용인지라 나는 곤혹감을 느꼈다.
에단이 처음으로 나한테 준 건데······.
"저는 괜찮습니다."
내가 망설이는 이유를 알았는지 에단이 먼저 내게 말했다.
"그럼 마음은 이미 받았으니까, 이건 다른 꽃들이랑 같이 있게 여기에 두고 가요. 아마 이 꽃도 혼자 떨어져 있으면 외로울 거예요."
나는 에단에게 미안한 눈빛으로 내 마음을 전한 뒤, 아까 그가 준 꽃을 다른 보라색 꽃송이들 사이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아, 아무도 안 봤겠지? 저희는 이 꽃을 꺾지 않았습니다! 그냥 예뻐서 쓰담쓰담 해준 거예요. 으흑, 진짜예요.
"그만 가자. 카벨은 오늘도 늦을 예정이라고 했어."
"카벨 오빠, 계속 바쁘네."
그 후 유진의 손이 자연스럽게 내 손에 있던 양산을 옮겨 들었다. 우리는 보라색의 꽃밭을 지나 함께 걸었다. 그런 유진과 내 뒤를 에단이 조용히 따르고 있었다.
마치 폭풍 전야처럼 지극히도 평온하던 하루였다.
***
다행이라 해야 할지, 다이스가 로자벨라를 만날 수 있는 날은 금방 다가왔다. 바로 황실의 공식 행사인 사냥제가 열렸기 때문이다.
다이스가 황족 대표로 참석하는 자리인 만큼 그의 약혼녀인 로자벨라 역시 잠깐이라도 얼굴을 비추어야만 했다.
물론 대외적인 행사이기에 지금 바로 사적인 대화를 나누지는 못 할 테지만, 아마 나중에 기회를 잘 봐서 따로 그들만의 시간을 갖지 않을까 싶었다.
"채비는 잘 마치셨나요? 공자는 어느 구역으로 가실 예정인지요?"
"아마 동북쪽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북쪽에는 맹수들이 많다던데 위험하지 않을까요?"
나는 저마다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틈에서 약간 따분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늘 행사가 열리는 사냥터는 사냥감의 종류나 위험도에 따라서 구역이 나누어져 있었다.
대개는 사슴이나 여우가 있는 동쪽이나 남쪽으로 많이 사냥을 갈 예정이지만 자신의 솜씨에 특히 자신이 있는 사람들의 경우 무리를 지어 북쪽 부근에도 가 볼 계획을 짜고 있다고 들었다.
"저게 뭐지?"
그러다 문득 몇몇 시종들이 웬 통 같은 것을 여러 개 들고 어디론가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의아함에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뒤에 있던 에단이 대답해 주었다.
"닭이나 토끼 같은 작은 짐승의 피일 겁니다. 북쪽 구역에 뿌릴 계획이라고 하더군요."
듣기로는 오늘 사냥터에 비치된 북 구역의 맹수들은 야행성이라 낮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다른 짐승의 피를 풀숲에 적당히 뿌려 그들을 밖으로 나오게 할 계획이라고 들었다.
"사냥 같은 거, 따분하고 시끄럽고 냄새나고 별로야."
그때, 옆에서 누군가가 작게 투덜거렸다. 나는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못마땅하게 얼굴을 구기고 있는 에리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 에른스트의 대표로 사냥제에 참석한 것은 나와 에리히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사냥이라면 질색을 했기 때문에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넌 사냥 싫어하지? 그냥 집에서 쉬는 편이 좋았을걸."
원래는 유진과 함께 올 예정이었지만 그는 다른 일이 생겨서 사냥제 도중에나 들를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모처럼 주말을 맞아 집에 돌아온 에리히가 나와 함께 온 것이었다.
"기분 별로면 먼저 갈래?"
"됐어."
"유진 오빠는 조금 이따가 올 예정이라고 했으니까 난 에단 경이랑 같이 기다리면 돼."
에리히가 거절했지만 나는 다시 한번 그에게 권했다. 아무래도 에리히의 얼굴이 영 좋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괜찮다니까. 물론 너는 형이랑 둘이 있는 게 더 좋겠지만."
그리고 다음 순간 지나가듯 내뱉은 에리히의 뼈 있는 말에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에리히 역시 무심코 한 소리인 듯 그 직후 약간 표정을 변화시켰다.
그와 나 사이에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난 그런 의미로 말한 거 아니야."
이윽고 내가 조용히 속삭이자 에리히가 잠시 입을 다문 채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그가 내게서 시선을 비끼며 천천히 입을 열어 읊조렸다.
"나도 알아."
"······."
"지금 건 그냥······ 내가 괜히 심술부린 거야."
나는 뒤이어 손을 들어 올려 약간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리는 에리히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미안. 그냥 조금 예민해져서 그래."
조금은 뜻밖이라고 해야 할지, 그는 예상외로 내게 쉽게 사과했다.
사실 에리히가 오늘 이렇게 유독 날 선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그는 쌍둥이 동생인 아리나가 죽었을 때부터 죽음에 민감했고, 그래서 평소에 동물들을 사냥해 죽이는 행위도 꺼렸다.
그런 데다 에른스트 부부가 죽은 것도 사냥터에서의 일이었으니, 지금 이곳은 그에게 있어 그리 유쾌한 장소는 아닐 터였다.
나도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조금 전에 에리히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럼에도 에리히가 오늘 이 사냥터에 온 것은 나를 혼자 보낼 수 없어서일 가능성이 컸다.
앞서 말한 대로 유진은 사냥터에 다소 늦게 도착할 예정이었고, 카벨은 주말인 오늘도 기사단에 출근한다고 했으니까.
나는 얕은 숨을 내쉬며 에리히의 팔을 잡았다.
"어차피 오늘은 적당히 시간만 때우면 되니까, 천막에 들어가서 쉬고 있자."
어차피 사냥제란, 직접 숲에 들어가 사냥을 하지 않고서야 서로 모여 담소를 나누는 친목의 장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에리히의 상태가 이런데 굳이 다른 곳에 끌고 가서 하하 호호 억지로 떠들게 할 이유도 없었다.
다행히도 에리히는 내 손을 뿌리치지 않고 온순히 뒤를 따라왔다.
"너 요즘 잠 제대로 못 잤지?"
나는 천막 안에 마련된 의자에 에리히를 앉혔다. 그 후 내가 묻는 말에 녀석이 뜨끔하며 어깨를 들썩였다.
"아니, 잘 자고 있는데. 그것도 엄청 잘 자고 있거든?"
"아니야, 내 생각에 너는 최소한 일주일은 넘게 잠을 잘 못 자고 있어!"
에리히는 발뺌했지만 거기에 넘어갈 내가 아니야! 어릴 때부터 잠이 부족해서 병든 병아리처럼 골골거리던 너의 역사를 내가 다 지켜봐 왔는데 누구를 속이려고!
내가 자신만만하게 외친 소리에 에리히의 얼굴이 구겨졌다.
더 이상 속여도 소용이 없을 것이라 판단했는지, 에리히는 내 말을 계속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입을 꾹 다물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나한테서 고개를 돌리며 툭 내뱉듯이 말했다.
"그런 거,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르던데 왜 넌 그렇게 쓸데없이 눈치를 잘 채는 거야?"
"그야 내가 엄청 세심하고 꼼꼼한 성격이니까?"
"웃기고 있네."
앗, 바로 비웃음당했다.
크흑, 이 매정한 녀석. 나처럼 널 신경 쓰고 잘 챙겨 주는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난 누워서 쉴 거니까 넌 나가 있어."
"에단이라도 옆에 있으라고 할까?"
"아가씨 옆을 지키는 것이 제 임무입니다."
"나도 댁이랑 같이 있는 건 싫거든?"
에, 에단도 참. 저렇게 단칼에 거절하다니. 그래도 에리히가 으르렁거리는 걸 보니 기운이 영 없는 건 아닌 것 같아서 다행이다.
나는 에리히에게 푹 쉬라는 말을 남기고 에단과 함께 천막을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어느덧 삼삼오오 모여 친목을 다지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어머, 에른스트 양."
그래서 가장 먼저 어느 쪽으로 가볼까 고민하던 중에 나는 때마침 길을 지나던 마조람 영애와 맞닥뜨렸다.
"아까 천막 안으로 들어가시는 걸 보고 나중에 인사드리려 했는데. 에른스트에서는 오늘 사냥에 참가하지 않나요?"
"네. 약혼자이신 고티앙 공자는 지금 숲에 계시나 보네요."
"저한테 뿔이 예쁜 사슴을 잡아주겠다고 하지 뭐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