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
그 오빠들을 조심해 107화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나한테 이런 걸 선물해 준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었구나.
문득 나를 배려해 마음 써 준 에리히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사실 나는 그와 이렇게 평범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다.
일전의 일이 있고 난 후에도 에리히가 나를 평소처럼 대해 주기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마워, 에리히. 네가 준 거 진짜 마음에 들어."
[피아노랑 내 선물 중에 뭐가 더 좋아?]
그리고 에리히가 툭 던지듯 내뱉은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응? 피아노는 유진이 우리가 다시 에른스트로 돌아왔을 때 선물로 준 건데. 왜 갑자기 그거랑 비교하는 거지?
물론 나는 유진의 선물도, 에리히의 선물도 다 좋았다. 그래도 기껏 선물을 준 사람의 성의가 있는 건데 여기서는 에리히를 띄워 주는 게 좋겠지?
"지금은 네가 준 게 더 좋아! 첫눈에 반했어. 너무 예뻐, 완전 내 취향이야."
나는 에리히가 준 선물의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대해 마구 예찬했다.
하지만 그것은 진짜 내 진심이었다. 사실 나는 에리히가 보내 준 선물을 본 순간부터 신이 나 있었다.
[흥, 성능도 그게 더 좋으니까 잘 가지고 다녀.]
"그런데 갑자기 웬 선물이야? 오늘 내 생일도 아닌데. 나야 좋긴 하지만."
그리고 내 물음에 에리히가 내 얼굴에 푸른 눈동자를 고정하며 입을 열었다.
[별 이유 없어. 그냥 유진 형은 아마 죽을 때까지 너한테 그런 걸 선물해 주지는 않을 테니까. 그래서 형이랑은 다른 방식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려는 거야.]
그의 말은 알 듯 말 듯했다.
하지만 내가 다시 한번 그에게 의미를 묻기 전에 에리히가 먼저 나한테 인사를 남긴 뒤 통신석을 종료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불이 꺼진 통신석을 바라보다가 다시 에리히가 준 선물에 시선을 옮겼다.
몇 번을 다시 봐도 에리히가 준 총은 내 마음에 쏙 들었다.
나는 한참 동안 상자 안의 물건을 이리저리 뜯어보고 또 질릴 때까지 만지작거리다가 다시금 상자 안에 넣고 뚜껑을 닫아 고이 보관했다.
그리고 그것을 유진에게 들키지 않도록 깊숙한 곳에 감추었다.
뜻밖의 선물을 받아 들뜬 아이처럼 기분 좋게 두근거리는 밤이었다.
***
"오늘 기분이 좋아 보이네."
유진이 내 얼굴을 보며 지나가듯 던진 말에 나는 흠칫했다.
그, 그렇게 얼굴에 티가 나나?
아마 내 기분이 좋아 보인다면 그 이유는 분명 에리히의 선물 때문일 것이다.
"그래? 오늘 날씨가 좋아서 그런가."
하지만 유진에게 선물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어서 나는 그냥 말을 돌리고 말았다.
내 웃는 얼굴을 본 유진이 잠시 동안 말이 없다가 이내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오늘 황궁에 들를 예정이지?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게."
"오늘 일찍 끝나?"
"응."
정말 오늘은 일이 별로 없어 일찍 끝날 예정이었던 건지, 아니면 그냥 나랑 같이 돌아오려고 그렇게 말하는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해주는 것 자체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나는 부드럽게 얼굴을 어루만지는 유진의 손길을 느끼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설핏 미소를 지었다.
"카벨 오빠도 시간이 맞으면 같이 오면 좋을 텐데."
그러자 착각인지 한순간 유진이 멈칫한 것 같았다.
카벨은 요즘 들어 계속 아침 일찍 집을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그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혹시 부기사단장이 또 카벨을 굴리는 건가 싶었으나 아무래도 이번에는 그가 자발적으로 훈련하는 것인 듯했다.
추측하건대 아마도 지난번에 카벨을 고뇌하게 만들었던 일의 연장선인 것 같았다.
한번은 걱정이 되어서 카벨에게 이유를 물었으나 그는 고집스러운 얼굴을 한 채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시간 날 때 한번 물어볼게."
"오빠도 바쁠 텐데 일부러 그럴 건 없고."
나는 입궁 준비를 마친 유진을 배웅하기 위해 함께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잠깐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유진의 팔을 붙잡은 채 발뒤꿈치를 들었다.
"잘 다녀와."
입술에 유진의 뺨이 잠깐 닿았다가 떨어졌다.
앗, 그런데 막상 저질러 놓고 보니 부끄럽다. 빨리 들어가야겠다!
그때, 머리 위에서 부스러지는 얕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다녀올게."
유진의 손이 내 뒷머리를 감싼 직후, 이마 위에 온기가 내려앉았다. 나는 뒤돌아 걷기 시작한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올려 조금 전 유진이 가볍게 입을 맞추었던 이마를 매만졌다.
괜스레 얼굴이 약간 뜨끈뜨끈했다.
***
"난 정말 구제 불능이야. 양도 그렇게 생각하지?"
자괴감 넘치는 그 목소리에 나는 난처함을 느꼈다.
다이스는 불과 며칠 만에 풀이 죽다 못해 땅굴을 파고 들어갈 것처럼 절망해 있었다. 나는 그런 그를 애써 위로했다.
"그래도 구제 불능까지는 아니지 않을까요? 너무 그렇게 자책하지 마세요, 전하."
"이 상황에 어떻게 자책하지 않을 수 있겠어? 나는 이제 끝났어. 나는 이제 행복해질 수 없어."
하지만 통하지 않았다.
그새 핼쑥해진 그의 얼굴이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말해주는 듯했다. 그리고 다이스가 이렇게 좌절한 이유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로자벨라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두 사람의 냉전은 아직도 지속 중이었다.
로자벨라의 분노는 생각보다 오래가고 있었는데, 조금씩 소강되어 가던 그녀의 화를 다시금 불사른 것은 다름 아닌 다이스였다.
크흑, 이럴 줄 알았으면 지난번에 로자벨라에게 줄 선물의 목록을 뽑던 다이스를 적극적으로 말렸을 텐데.
하지만 난들 그가 설마 그 정도로 요란하게 벨론티아에 선물의 행렬을 보낼 줄 알았겠는가?
과한 것은 지나친 것만 못하다고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도 다이스에게는 깊이 와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벨론티아의 저택에 줄줄이 도착한 온갖 진귀한 금은보화들은 누구나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떠야 할 정도로 엄청났다.
그리고 그것을 보낸 이가 황손 다이스라는 소식에 아를란타의 제도는 또 한 번 떠들썩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세간에는 이렇게까지 황손 전하의 총애를 받는 로자벨라가 부럽다느니, 약혼녀를 위해 저런 진귀한 물건들을 아낌없이 선물한 다이스가 멋있다느니 하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는 것이 싫어 외출까지 삼가고 있던 로자벨라가 이 일로 다이스에게 또다시 한기를 흩뿌리기 시작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다이스는 '도대체 내가 왜 그런 정신 나간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며 탁자 위에 쿵쿵 이마를 찧었다.
그러면서 한껏 우울한 목소리로 '난 머저리야, 멍청이야'를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차고 말았다.
"로자벨라 양의 화가 풀릴 때까지 좀 더 기다려 보세요. 그래도 약혼녀를 위하는 마음으로 선물을 보내신 거잖아요? 아마 로자벨라 양도 전하의 마음은 알고 있을 거예요."
"아니야, 이번에는 진짜 영영 화를 풀지 않을 것 같아. 내가 보낸 편지도 아예 안 읽는 것 같았어."
내가 나름대로 그를 위로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별로 진정성이 없는 말이었다. 다이스도 내 위로의 영혼 없음을 본능적으로 눈치챈 기색이었다.
"이제 나한테 완전히 정이 떨어졌다고 하면 어쩌지? 으아, 이래서 연애 한 번 한 적 없는 레로 경의 말 같은 걸 듣는 게 아니었는데!"
아, 범인은 다이스의 호위 기사인 레로 경이었구나. 나도 오다가다 몇 번 본 기억이 있었다. 아닛? 그런데 여자를 백 명쯤은 울려 봤을 것 같은 그 얼굴을 하고 연애 경험이 아직 한 번도 없단 말이야?
"전하,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무슨 일이지?"
그때, 문밖에서 다이스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밖에서 대기 중인 기사인 것 같았다.
그나저나 다이스의 이 온도 차는 몇 번을 경험해도 놀랍구나.
그는 조금 전에 내 앞에서 언제 투정을 부렸냐는 듯이 근엄함이 넘치는 목소리를 내며 문밖에 있는 사람을 안으로 들였다.
어느덧 다이스는 테이블에 붙이고 있던 상체를 일으켜 세워 멋들어진 자세를 잡고 있었다.
"시즈닝 백작이 전하께 알현을 청하고 있습니다."
"그대의 눈에는 지금 내가 에른스트 양과 함께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먼저 온 손님을 맞이하는 중이니 조금 더 기다리라고 시즈닝 백작에게 전하도록 해."
"그것이, 아마 상당히 급한 일인 듯하여······."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저 시즈닝 백작이라는 사람이 다이스를 알현장으로 불러 달라고 계속 독촉하고 있는 상황인 것 같았다.
난처한 듯 말끝을 흐리는 목소리에 다이스가 자신의 앞에 부복한 기사를 향해 냉소적으로 뇌까렸다.
"그래? 몇 번씩이나 내게 같은 말을 하게 만들면서 이리 채근할 정도로 다급한 일이란 말이지?"
억, 이 사람 지금 기분 안 좋구나.
입가에는 미소를 걸고 있었지만 다리를 꼬고 앉아 기사를 내려다보는 다이스의 눈빛은 매우 싸늘했다. 그 차가운 시선에 기사가 몸을 작게 움찔거렸다.
크으, 이렇게 보니까 우리 황손 전하도 한 카리스마 하시는데.
그가 내 앞에서 편한 모습을 보인지는 꽤 된 탓에 밖에서는 제법 위엄 있는 황손 전하라는 사실을 하마터면 깜빡 잊을 뻔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로자벨라에 관련된 일에는 이렇게 쭈글쭈글해지다니, 놀랄 일이야.
"전하,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결국 내가 먼저 자리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긴장하는 기사도 안돼 보였거니와 어쨌거나 다이스도 지금 바로 알현장으로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비록 기분이 저조하여 기사를 잡긴 했지만 다이스도 나와 똑같이 생각한 모양이었다.
곧 그가 혀를 차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래서 결국 다이스와 나는 나란히 방을 나서게 되었다.
"시즈닝 백작은 지금 알현실에 있겠지? 도대체 얼마나 시급을 다투는 일이기에 이리 소란을 피우는지 어디 한번 들어 봐야겠군."
나는 알현장에 있을 시즈닝 백작과 파리한 얼굴로 다이스의 뒤를 따르는 기사의 안위를 염려하며 다이스와 헤어져 궁을 나섰다.
***
갑작스러운 알현 신청 때문에 예정보다 일찍 다이스의 궁을 나오게 된 나는 한가해졌다.
다른 때 같으면 바로 에른스트의 저택으로 향했을 테지만 오늘은 기다려야 할 사람이 있었다. 왜냐하면 아침에 유진과 한 약속이 있었으니까.
아마 유진은 자신이 먼저 일을 끝마치고 나와서 나를 기다릴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사람의 일이란 것이 원래 변수가 있게 마련 아니던가?
"공작님께 가실 겁니까?"
뒤에서 조용히 나를 따르던 에단이 물었다.
하지만 유진이 일하는 곳에 찾아가면 혹시 부담이 될지도 몰랐으니까 그냥 밖에서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아니요. 그냥 여기에서 기다릴래요."
에단은 여느 때처럼 내 말에 반대하지 않고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유진을 기다리는 일은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외궁의 입구 부근에는 보라색 아네모네 꽃이 지천에 깔려 있었다. 꽃구경을 하며 손에 들고 있는 레이스 양산을 괜스레 빙글빙글 돌리자 보라색 꽃들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가 덩달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