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
그 오빠들을 조심해 106화
끄응,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저러는지는 몰라도 조금 내버려 두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만약 조금 더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저 상태면, 그때 붙잡고 이야기해 보자.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오늘도 벽 뒤에 숨어 나를 훔쳐보는 둘째 놈을 애써 외면했다.
아, 그런데 진짜 모르는 척하기도 힘들다!
설마 저러고 숨으면 자신의 존재가 가려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자기가 무슨 페니만 한 사이즈인 줄 아는 건가? 덩치도 곰처럼 산만 해서는 말이야.
차라리 그냥 지금 이리 와서 다 까놓고 얘기해 보라고 하고 싶은 충동이 울컥 밀려들었다. 하지만 요즘은 나도 속이 많이 복잡하고 심란하던 참이라 그냥 한숨을 내쉬며 방으로 향했다.
얼마 전에 요하네스를 만났던 이후로 나는 마음이 영 편치 못했다.
몇 번을 생각해도 그에게 참 많이 고맙고 미안했다. 요하네스뿐만이 아니라 바스티에의 사람들 모두에게 그랬다.
요하네스와 그런 일이 있고 난 후부터 루이제에게도 선뜻 먼저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들이 요하네스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아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용기를 내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바스티에 부인은 그 당시 묘하던 우리의 분위기를 보고 이상함을 느꼈을 테니까······.
요하네스를 다시 한번 만나고 싶었지만 그가 원하지 않으면 먼저 만나러 갈 자격이 내게는 없었다.
그가 마지막까지 웃는 얼굴로 나를 배웅해 주었다고 해서 정말 아무렇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아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요하네스 때문에 마음이 좋지 못하다는 사실을 겉으로 내색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나를 보는 유진도 덩달아 마음이 편치 못할 테니까.
그래서 나는 그의 앞에서 평소와 같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사실 다른 사람도 아닌 유진이 그런 나를 모를 것 같지는 않았다.
"오빠, 어디 갔다 와?"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막 저택으로 돌아온 카벨을 보고 물었다.
그는 아까 갑자기 홀연히 집을 떠났다가 지금 막 귀가한 참이었다. 그런데 그의 얼굴에는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것 같은 후련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의문을 느꼈다. 혹시 요 며칠 동안 카벨을 끙끙거리게 만들었던 일이 해결된 걸까?
그런데 나를 본 카벨이 어쩐 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내게 다가왔다. 한동안 계속 뒤에서만 나를 훔쳐보더니, 이제야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마음이 든 건가?
"난 네 오빠야. 알지?"
응? 그런데 글쎄, 이놈이 내 어깨를 부여잡으며 이런 황당한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뭔 당연한 소리를 이렇게 분위기 잡으면서 하고 있어?
"나 없는 데서 너한테 뭐라고 하는 사람들 있으면 나한테 다 말해! 알겠지? 내가 다 해치워 줄 테니까!"
내가 황당해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벨은 콧김을 팍 뿜으며 이상한 말을 계속 해댔다.
으, 으음. 어쨌든 고맙기는 한데······ 들으면 들을수록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어지는 수수께끼 같은 소리였다.
"뭐야,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
그런데 내가 물은 순간, 마주한 카벨의 얼굴이 약간 변했다. 조금 전까지는 원래 내가 알던 카벨 특유의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면, 지금 그가 지어 보인 표정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복잡한 심경을 드러낸 것이었다.
왜인지 그는 내 물음에 잠시 잊고 있던 무언가를 떠올린 것 같았다.
어, 그런데 카벨이 이런 표정도 지을 수 있는 녀석이었나?
내가 한순간 멈칫한 사이, 둘째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눈빛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
"난 머리 굴리는 일은 딱 질색이야."
아니, 뭘 새삼스럽게. 그건 이미 알고 있어.
하지만 왜인지 분위기를 보아하니 지금 내가 생각한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냥 가만히 카벨이 하는 말을 들어주었다.
"삼 일 밤낮을 머리 싸매고 박 터지게 고민해도 도무지 답이 안 나오는데 어떻게 하라고."
앗, 그 순간 나는 심각한 분위기에 맞지 않게 조금 놀라 버렸다.
우리 집 단순무식의 대명사인 카벨이 삼 일 밤낮이나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하다니? 이건 좀 엄청난 일이었다.
평소에 카벨은 어떤 일이든 간에 삼 일이 아니라 세 시간, 아니, 딱 삼 분 정도면 전부 잊는 성격이었으니까.
그런데 삼 일이나 고민을 했다면 이건 정말 보통 일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딱 하나 결론이 난 게 있는데······."
나는 아까보다 조금 더 진지해진 얼굴로 카벨의 말을 경청했다.
"어쨌든 난 나고, 넌 너인 거야. 결국 난 네 오빠고, 넌 내 동생이고······ 그건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변하는 거니까."
혼잣말 같은 그의 말이 나에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인지 조금 헷갈렸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의 눈동자 속에서 미약한 간절함 같은 것이 엿보였다. 나는 그것을 보고 조금 놀라서 입술을 벌렸다.
"그리고 내가 또 생각을 해봤는데. 넌 내가 무슨 짓을 저질러도, 다른 사람들이 다 내가 잘못했다면서 손가락질해도 분명히 내 편을 들어줄 테니까. 그렇지?"
하지만 내가 그에게 미처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카벨이 먼저 내게 물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잠깐 할 말을 잃은 내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느 때보다 진지한 카벨의 그 얼굴을 보고 나는 동요해 손끝을 잘게 떨었다.
혹시, 혹시······.
"카벨 오빠······."
너 사고 쳤니······?
뭔지는 모르지만 밖에서 뭔가 큰 사고를 치고 온 건가? 그래서 지금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편을 들어 달라고 이런 밑밥을 까는 건가?!
어쩐지 갑자기 집을 뛰쳐나간 후에 속이 후련해진 얼굴로 들어오더라니······! 설마 학술원 때처럼 누구를 반죽음으로 만들고 온 거 아니야?
앗, 호, 혹시 카벨이 매일 이를 갈면서 짜증스러워하던 부기사단장? 그럼 이것은 하극상?!
저렇게 심각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상당히 큰일을 저지르고 온 듯했다.
그래도 참, 이놈의 정이 뭐라고. 평소에 언제나 자신만만하던 카벨이 저런 얼굴로 저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왜인지 가슴이 좀 짠해져서 일단은 그를 달래 줘야 할 것 같았다.
"당연하지. 카벨 오빠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우리 오빠인데. 난 무조건 오빠 편이야."
하지만 네가 무슨 짓을 저지르고 온 건지는 좀 들어 봐야 할 것 같구나. 둘째야, 우리 조용히 방에 들어가서 대화를 좀 나누지 않으련?
"흥, 그럴 줄 알았어."
카벨은 내 말을 듣고 당연히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 콧김을 내뿜었다. 그러더니 곧 그 어느 때보다 굳은 결심이 서린 눈빛으로 나를 직시하며 말했다.
"그러니까 나도 너한테 똑같이 해줄 거야."
그 순간 나는 또 한 번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도대체 뭘 똑같이 해준다는 거지? 너도 나에게 신뢰와 믿음을 주겠다는 거야? 내가 무조건 네 편인 것처럼, 너도 내 편을 해주겠다고?
아마 카벨은 모르겠지만 그 말은 나를 조금 동요하게 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뜻밖의 말을 들었기 때문인지 갑자기 목이 조금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괜스레 큼큼 헛기침을 한 뒤 그에게 물었다.
"그, 밖에서 무슨 일 있었어?"
"그냥 눈앞에서 자꾸 설치는 파리 한 마리 밟아주고 왔어."
아앗, 역시?!
"많이 다쳤어? 심각한 상태야?"
"뭐? 내가 얼마나 많이 봐줬는데! 그리고 안 때렸어! 마지막으로 사람 때려 본 지 거의 백 년은 된 것 같은데 무슨 소리야."
둘째 놈은 내 말에 파드득 발끈해서 소리 질렀다.
하지만 그건 좀 아니다, 카벨아. 네 학술원 시절을 떠올려 봐!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더니, 딱 우리 집 둘째 녀석 얘기네.
그렇게 내가 속으로 혀를 차는 동안 카벨도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그는 또 혼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술을 실룩거리며 눈에 힘을 잔뜩 주고 나를 쳐다보다가 홱 뒤돌아섰다.
"어쨌든······ 그냥 그렇게 알고 있어! 난 죽을 때까지 계속 네 오빠니까!"
그렇게 외친 뒤 카벨은 요란하게 쿵쾅거리며 계단을 올라갔다.
"뭐야, 진짜······."
나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여전히 카벨이 왜 저런 이해하지 못할 말과 행동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뭉클해지고 말았다.
나는 카벨 때문에 어쩐지 조금 쑥스럽고 겸연쩍은 기분이 되어서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괜히 쿵쿵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방으로 향했다. 조금 전에 카벨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
[카벨 형이 이상한 게 뭐 하루 이틀이야?]
앗, 이 매정한 녀석.
에리히는 자기 형에 대해서 참으로 가차 없이도 말했다. 물론 에리히가 이런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지만 새삼스럽게 너무하네, 으흑. 역시 우리 집 둘째의 취급이란······.
나는 통신석으로 보이는 에리히의 얼굴을 보며 탄식했다. 하지만 이 녀석은 한결같이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뭔가 평소랑 진짜 달랐다니까."
내가 다시금 카벨의 이상함을 피력했지만 에리히는 콧방귀를 뀌기만 했다.
에잇, 나도 이제 말 안 해. 혹시 에리히가 카벨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까 싶어서 기껏 연락했더니만.
[그것보다 곧 집으로 뭔가 배달돼 갈 건데 네 거니까 잘 챙겨.]
"내 거? 뭔데?"
[보면 알아.]
나는 에리히의 말을 듣고 의아해졌다.
뭔지는 모르지만 내 거라니, 지난번에 학술원에 갔을 때 내가 실수로 뭔가를 흘렸나? 앗, 아니면 혹시 한때 내가 재미가 들렸던 빨간 책이라거나. 쿨럭.
그것도 아니면 설마 선물? 하지만 내 생일도 아닌데?
그리고 내 의문은 이틀 뒤에 해소되었다.
"아가씨. 에리히 도련님께서 보내신 선물입니다."
내 앞으로 도착한 것은 보통 크기의 상자였다. 나는 내 방에서 그것을 열어 본 후 깜짝 놀라 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앗! 아앗! 앗, 이건!
"에리히!"
[표정을 보아하니 받았나 보네.]
나는 곧바로 통신석을 사용해 에리히에게 연락을 했다. 저녁 시간이라 마침 방에 있었는지, 에리히는 곧바로 통신석에 모습을 비췄다.
에리히는 내 놀란 얼굴을 보고 집에 선물이 도착한 사실을 눈치챈 듯했다.
"어떻게 된 거야? 예전에 유진 오빠가 위험하다고 반대했다고 하지 않았어?"
그가 내게 준 선물은 유려한 음각 무늬가 세공된 은색의 총이었다.
전부터 호신용 총이 갖고 싶다고 말했지만 유진이 탐탁지 않게 여겨 결국 포기해야만 했었는데. 일전에 에리히가 유진에게 언뜻 얘기를 꺼냈을 때에도 반대했다고 들은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놀라움이 담긴 내 물음에 에리히는 그저 작게 콧방귀를 뀌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몰라, 까짓것 들키면 그냥 한 소리 듣고 말지, 뭐.]
이, 이 녀석. 제법 대범해졌는데?
그리고 곧이어 지나가듯 귀를 스치는 그의 말에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그리고 어차피 너, 형이 반대했어도 예전에 바스티에에서 쓰던 거 계속 가지고 있었잖아. 그럴 바에는 그냥 내가 준 거 들고 다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