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
그 오빠들을 조심해 105화
사실 카벨은 아까 유진과의 일도 조금은 후회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좀 더 준비가 되었을 때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아까와는 다른 방식으로 형과 이야기해 볼 수도 있지도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하지만 그렇다 한들, 이제 와 자신이 어찌해야 하는 것인지 아직도 알 수가 없었다.
"아니······ 괜찮아. 기사단 일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정말?"
카벨이 가까스로 태연한 모습을 위장하며 내뱉은 대답에 하리가 미심쩍은 듯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 그만 방으로 갈게. 밥은 먹고 왔으니까 신경 안 써도 돼."
하지만 어디로 봐도 카벨의 모습은 평소와 달랐다.
아까 유진의 말 때문이 아니더라도 카벨은 하리의 앞에서 아까 형과 있었던 일을 내색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워낙 감정을 감추는 일에 서툰 그였기 때문에 말이나 행동이 좀처럼 뜻한 대로 자연스럽게 되지가 않았다.
결국 카벨은 하리에게 자신의 혼란을 들키기 전에 방으로 뛰다시피 걸음을 옮기는 것을 선택했다.
하리가 그런 자신의 모습을 걱정과 의문이 담긴 눈길로 바라보는 것을 알았지만 차마 뒤돌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카벨은 도망쳤다. 겁쟁이처럼.
혹시 한 발이라도 잘못 내디디면 지금껏 쌓아왔던 모두의 관계가 순식간에 무너지기라도 할까 봐 두려워서.
***
"라벤더 코르디스."
얼마 후 열린 가든 파티의 자리에서 카벨은 라벤더 코르디스를 만났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 사이에 섞여 태평히 웃고 떠들고 있었다. 카벨은 그 사이로 거침없이 들어가 라벤더의 팔을 잡아끌었다.
"잠깐 얘기 좀 해."
"얘기는 무슨 얘기······ 어머, 잠깐!"
카벨은 원래 이런 복작거리는 장소는 딱 질색이었지만 오늘 라벤더 코르디스가 이 파티에 참석한다는 소리를 듣고 일부러 방문한 것이었다.
"아파, 아파요! 당장 이거 안 놔?"
그녀는 자신을 붙잡은 손을 뿌리치려고 시도했지만 카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인적이 없는 조용한 장소로 이동한 뒤에야 잡고 있던 팔을 놓았다. 그러자 라벤더가 얼얼한 팔을 붙잡으며 앙칼지게 그를 노려보았다.
"뭐 이렇게 무례한 사람이 다 있담!"
그녀는 자신을 이런 식으로 취급하는 카벨에게 화가 난 눈치였다. 하지만 카벨은 지금 그녀를 배려해 줄 상황이 아니었다.
"야, 너 다른 사람한테도 나한테 지껄였던 말 똑같이 했어, 안 했어?"
카벨의 팔이 라벤더의 옆으로 곧게 뻗어졌다. 어느덧 벽에 몰아세워진 라벤더의 앞으로 카벨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녀는 자신을 벽 사이에 가두다시피 한 채 위에서부터 내려다보는 카벨의 시선에 한순간 흠칫했다.
하지만 곧 카벨의 기세에 한순간이나마 눌렸던 것을 부정이라도 하듯, 그를 노려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했든 안 했든, 무슨 상관이에요? 내가 입을 다물고 있는다고 해서 사실이 바뀌는 것도 아닌데."
"말장난하지 말고 말했는지 안 했는지나 말해."
"했으면 어쩔 건데?"
카벨은 평소에 눈치가 없는 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앞뒤 분간을 못 하는 그라고 해도 똥이 똥인 건 알고 물이 물인 것도 알았다.
"죽여 버릴 거야, 너도, 네가 함부로 입을 턴 상대도."
그런 이유로, 이 여자가 지난번에 호의를 가지고 그를 찾아왔던 게 아니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바보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이 여자가 그에게 했던 것과 같은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퍼뜨리게 그냥 놔둘 수는 없었다.
"왜, 자기 남매들의 일이 부끄러운 것이라는 자각은 있나 보죠?"
라벤더는 카벨의 협박에 한순간 주춤하다가, 곧 '하!'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녀는 싸늘하게 식은 카벨의 얼굴을 만족스럽게 올려다보았다. 애초에 라벤더는 에른스트의 남매들의 끈끈한 우애를 박살 내고 싶었던 것이니 카벨의 동요가 더욱 기껍게 느껴졌다.
솔직히 유진과 하리의 관계는 아를란타의 법도상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비록 어릴 때 하리가 에른스트의 양녀로 들어온 경우라고는 하나 그녀를 딸로 삼았던 전 에른스트 부부도 이미 예전에 죽었고, 두 사람은 혈연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설령 그들이 결혼한다고 해도 법을 위반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황실과 귀족 가문에서는 혈통을 지키기 위해 암암리에 근친혼을 했던 전례도 있으니 더더군다나 책잡힐 만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에른스트 공작'의 일이다. 만약 그가 실제로 아를란타의 윤리와 법률에 어긋나는 중죄를 저지른다 해도 섣불리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아를란타의 최고 공신으로 유명한 에른스트에 이런 더러운 추문이라니. 가문에 여자 하나 잘못 들여서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인지 모르겠네요."
그래서 라벤더는 다른 방법으로 하리 에른스트를 무너뜨리기 위해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는 가족들을 건드리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솔직히 에른스트 경도 기가 막힌 일이라고 생각하잖아요. 둘 다 미친 것도 아니고, 아무리 피가 통하지 않았다고 해도 남매인데 어떻게 서로에게 그런 불결한 마음을 품을 수가 있을까요? 하늘에 계신 전 에른스트 공작님과 공작 부인도 분명 피눈물을 흘리며 통탄하고 계실 거예요."
그리고 그녀의 의도는 어느 정도 먹혀들어 갔다.
실제로 카벨은 생각지도 못 했던 라벤더 코르디스의 말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고, 그 일로 유진과 하리의 얼굴을 며칠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와의 일이 있었던 이후에도 태연히 평소와 같은 일상을 보내는 유진과 비교하자면 지난 카벨의 시간은 실로 엉망진창이었다고 표현해도 좋았다.
하지만 카벨은 그런 형의 모습이 진짜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며칠 전에 그런 대화를 나누었는데 아무렇지도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피 대신 철이 몸 안에 흐르는 인간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네가 원하는 형이 되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게다가 그 말을 할 때의 유진의 얼굴은······.
그렇다면 아마도 그의 형은, 그냥 지금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을 뿐일 것이다.
카벨에게든 하리에게든 자신의 속마음을 내색하고 싶지 않아서. 원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카벨은 다른 사람까지 신경 쓰고 배려할 여유 따위는 없어서 지난 며칠 동안 그 두 사람을 피해 다니며 자신의 혼란을 겉으로 내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는 예전부터 언제나 자신의 한 몸을 추스르기에도 벅찼다.
어릴 때 그의 부모님이 죽었을 때도 카벨은 자신의 상처를 돌보느라 바빠 형과 동생들까지 챙길 여력 같은 것은 조금도 없었다.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가까스로 한 사람의 몫을 해내는 것만으로도 버거워하는 사람이었고, 빈말로도 자신의 머리가 좋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번 일로 며칠간 죽어라 머리를 굴려 봤지만 역시나 속 시원히 나온 해답은 없었다.
그래서 카벨은 오늘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생각했다.
"야, 뒈질래? 어딜 감히 그 지저분한 입에 우리 부모님 이름을 올려?"
젠장, 그럼 그냥 다 때려치워 버리면 되잖아.
"너 뭔데 내 앞에서 자꾸 그따위로 겁 없이 입을 터는 거야? X발, 사람 마빡 돌게."
몇 날 며칠 동안 박 터지게 머리를 굴려도 결론이 나지 않는 문제라면 그냥 때려치워 버릴 테다.
"야, 네가 뭘 안다고 그따위로 막 지껄여? 입으로 싸면 다 말인 줄 알아?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설마 네 편이라도 들면서 같이 맞장구라도 칠 줄 알았어? 머리에 총 맞았냐? 아니면 지금 머리에 총 맞고 싶어서 나한테 이 지랄하는 거야?"
카벨은 원래부터 단순무식한 성격이었고, 그런 이유로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네까짓 게 뭔데 내 가족을 건드리냐고!"
콰앙! 쨍그랑!
"꺄악!"
바닥에 장식되어 있던 화병이 카벨의 거친 발길질에 사정없이 깨져 나갔다. 라벤더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려고 했지만 헛된 시도였다.
다시금 카벨의 손에 끌려온 라벤더는 아까보다 더욱 거칠게 벽에 처박혀야만 했다.
"내가 학술원에 다닐 때 별명이 미친개였거든? 그런데 왜 그런 X 같은 별명이 생겼는지 알아? 내 앞에서 겁대가리 없이 우리 가족 욕하는 새끼들을 모조리 물어뜯어서 죽여 버렸거든."
쾅!
카벨의 주먹이 벽을 깨부술 듯 라벤더의 머리 옆으로 틀어박혔다. 형형한 눈빛이 그대로 그녀의 얼굴을 꿰뚫고 들어갈 것 같았다.
"그래, 딱 지금의 너처럼 머저리같이 구는 새끼들 말이야. 뭐? 우리 형이랑 하리가 미쳤다고? 그런데 이걸 어쩌지? 내 눈에는 네가 더 미친년으로 보이거든? 진짜 개 빡치게 우리 부모님은 또 왜 들먹여? 네가 우리 부모님을 알아? 하늘에서 피눈물을 흘리고 계실지 아닐지 네까짓 게 어떻게 알아?"
물론 카벨은 아직도 유진과 하리의 일을 마냥 반길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생판 남인 사람이 두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들 가족의 일은 그들끼리 해결하는 것이 마땅했고, 거기에 타인이 간섭할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X발, 까불지 마. 지금도 진짜 쥐어 터뜨리고 싶은 거 간신히 참고 있으니까. 그리고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똑똑히 기억해. 내 앞에서든, 내 가족들 앞에서든, 아니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든, 한 번만 더 지금 같은 개소리가 내 귀에 들리면 난 그 출처가 너라고 생각할 거야. 그럼 그 후에는 무슨 재미난 일이 벌어질까? 내가 어디까지 돌아버릴 수 있을지 너도 궁금하지 않아? 기대된다, 그렇지?"
비릿하게 입꼬리를 비틀며 섬뜩하게 뇌까리는 카벨의 모습은 상상 이상으로 무서웠다. 이런 상황까지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라벤더로서는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그러니까 어느 날 갑자기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없어지기 싫으면 이제부터는 알아서 몸 사려. 말귀 알아들어?"
이를 갈 듯이 으르렁거리며 협박하는 카벨을 향해 라벤더는 저도 모르게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에 있는 이 미친놈이 당장에라도 그녀에게 해코지할 것 같아서 무서웠다.
"요즘 쥐 죽은 듯이 살았더니 별게 다 깝치고 있어, 짜증 나게."
퍼억!
카벨은 다시 한번 옆에 있는 화병을 발로 걷어찬 뒤 한 마리의 위험한 맹수처럼 거친 기운을 흩뿌리며 자리를 떠났다.
그가 완전히 시야에서 모습을 감춘 뒤, 라벤더 코르디스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31. 다가온 폭풍
요즘 들어 우리 집 둘째 놈이 이상했다.
어두운 기운을 사방에 흩뿌리며 음침하게 구석에 숨어서 나를 몰래 지켜보고 있지를 않나,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나한테 뭔가 할 말이 있는 듯이 끙끙거리지를 않나.
그러더니 혼자서 또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갑자기 비운의 주인공처럼 이를 악물며 밖으로 뛰쳐나가기까지.
본인은 숨긴다고 숨기는 모양이지만 태도가 이상한 게 너무 확연히 보였다. 오죽하면 저걸 아는 척해야 하나, 모르는 척해야 하나 고민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누군가 아는 척해 주기를 바라고 일부러 저러는 건 아닌 것 같아서 나는 그냥 카벨의 이상한 행동을 모르는 척 눈감아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