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
그 오빠들을 조심해 104화
다른 기사들을 다 제쳐 두고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 여자가 많다는 사실에 한편으로는 어깨가 으쓱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들은 카벨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난 후에는 저마다 미묘한 얼굴을 하며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남기고 돌아섰다.
그런 것이 몇 번인가 반복되고 나자 카벨도 이런 비생산적인 만남에 회의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크으, 하지만 억울하다! 난 그냥 물어보는 대로 대답하고 원하는 대로 대화해 준 것밖에 없는데 왜 번번이 '뭔가 이건 좀 생각했던 게 아닌데' 하는 시선을 받으며 퇴짜를 맞아야 하는 거지?
게다가 먼저 관심을 보인 건 그쪽이면서! 억울하다!
"크윽."
카벨은 또 한 번 치밀어 오르는 억울함을 애써 삭였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그는 오늘 자신을 찾아온 누구인지 모를 여자에게도 별다른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았다.
그냥 되도록 빨리 해치우고 돌아가서 찬물로 세수나 좀 하고 싶다.
카벨은 그렇게 생각하고는 어기적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이쪽이에요, 에른스트 경."
그런데 화려한 레이스 양산을 쓰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 어쩐지 낯설지 않았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인데? 누구더라?
기억이 날 듯 말 듯해서 카벨은 눈매를 찡그린 채 눈앞에 있는 얼굴을 천천히 뜯어보았다. 그리고 곧 그녀가 누구인지를 기억해 냈다.
아! 생각났다. 하리한테 귀찮게 달라붙는 여자! 이름이 라벤더 코르디스라고 했던가?
"뭐야, 그쪽이 왜 날 찾아와?"
게다가 지난번 어느 연회장에서도 유진의 새 약혼녀를 주선하니 뭐니 하는 웬 이상한 헛소리를 해서 짜증이 났던 기억이 있었다.
"당연히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왔죠."
카벨은 라벤더 코르디스의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곧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탄식하며 이마를 짚었다.
"하, 그래. 어쩐지 계속 하리의 옆에서 얼쩡거리더라니, 그게 다 시꺼먼 속내가 있어서 그런 거였구나? 미안하지만 난 그쪽한테 관심 없어. 고백은 거절이야. 유감스럽게도 살쾡이 같은 여자는 내 취향이 아니라서."
"뭐, 뭐? 살쾡이?"
예상치 못한 카벨의 말에 라벤더 코르디스가 귀를 의심하며 더듬거렸다. 카벨은 너무 인기가 많아서 괴롭다는 듯, 그녀를 향해 진심으로 유감스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 고백이라니? 누가 당신 같은 사람한테······!"
라벤더의 얼굴이 황당함과 분노로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카벨의 말이 어지간히 굴욕적인 것처럼 차마 말을 잊지 못하고 뒷목을 잡았다.
당연했다. 라벤더가 오늘 카벨을 찾아온 것은 저런 기가 막힌 이유 때문이 절대로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카벨의 저 어이없는 소리 때문에 졸지에 고백을 하려다가 차인 꼴이 되자 갑자기 확 열이 뻗치면서 속이 끓기 시작했다.
감히 자신에게 저따위 망발이라니! 게다가 착각도 유분수지, 좋아하긴 누가 누굴 좋아한단 말인가?
그녀가 마음으로 품은 사람은 결코 저런 품위 없고 무식한 남자가 아니었다! 어쩜 같은 피를 타고난 형제이면서 유진과 저렇게 하늘과 땅 차이로 다른지!
하지만 라벤더는 깊게 심호흡을 하며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그녀에게 측은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 카벨을 향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제가 경에게 하고 싶은 말이란 건 그따위 헛소리가 아니에요."
'그따위'와 '헛소리'라는 부분에서 유난히 강세가 들어간 것은 분명 카벨의 기분 탓이 아니었다. 그리고 곧 이어진 말에 카벨은 서서히 얼굴을 굳히고 말았다.
"경은 자신의 형과 여동생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요?"
***
"카벨."
그날 저녁, 유진은 궁을 떠나기 직전 카벨과 마주쳤다. 카벨도 유진을 보고 자리에서 멈칫했다.
유진은 관료들이 정무를 보는 외궁에서, 그리고 카벨은 연무장이 있는 기사단에서 매일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우연히 퇴근 시간이 겹친 모양이었다.
"지금 끝났어?"
"어어, 형도 지금 집에 가는 길인가 보네."
그런데 어째서인지 유진의 물음에 대답하는 카벨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어색했다.
하지만 원래 가끔 혼자서 이상한 행동을 할 때가 있는 카벨이었기 때문에 이때만 해도 유진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두 사람은 오늘 하루의 일과에 대해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마차가 준비된 곳으로 걸어갔다.
"형, 내가 오늘 어떤 여자한테 헛소리를 들었는데 말이야."
그러던 중에 카벨이 지나가듯이 입을 열었다.
"진짜 황당하고 웃기는 소리였는데, 그게 뭐였냐면······."
하지만 그는 거기에서 쉽게 말을 잇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렸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뒤이어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말에 유진은 옆에 있던 동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글쎄, 형이랑 하리랑 무늬만 남매일 뿐이고 사실은 둘이, 그러니까······."
카벨은 차마 입이 안 떨어진다는 듯이 몇 번이나 어물거리다가 결국 제 머리카락을 거칠게 헤집으며 속에 있는 말을 토해 냈다.
"아오, 이런 말 내 입으로 하기 진짜 좀 그런데······ 사실은 형이랑 하리랑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거야. 진짜 미친 것 같지? 형이 약혼녀랑 파혼한 것도 하리 때문이라고 하는데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다시 생각해도 황당하고 기가 막힌다는 듯한 말투였다. 카벨은 형이 들어도 어처구니가 없지 않느냐는 듯, 유진을 향해 헛웃음을 지어 보이기까지 했다.
"내가 일단 개소리 말라고 뭐라고 해주고 왔는데 그 여자 완전 거슬려. 예전부터 하리 옆에서 자꾸 얼쩡거리지를 않나."
유진은 그런 동생의 모습을 잠시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카벨이 하는 소리를 조용히 듣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헛소리를 할 거면 말이 되게 해야지, 별 말 같지 않은 잡소리를······."
"헛소리가 아니라면 넌 어떻게 할 건데?"
나직한 음성이 귓가에 흘러드는 순간, 카벨이 말을 멈추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
그는 조금 전 유진이 한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되물었다. 하지만 그는 듣지 못한 것이 아니었고, 유진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어느덧 자리에 걸음을 멈춘 상태였다.
"헛소리가 아니면 뭔데?"
곧 카벨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유진에게 질문했다. 유진은 이번에도 말없이 그런 그의 얼굴을 마주 보았고, 카벨은 그 침묵에서 대답을 읽어 냈다.
바로 그 순간 카벨의 얼굴이 변했다. 뒤이어 터져 나온 목소리 역시 지금까지의 침착함을 벗어 던지고 다소 거칠게 격양되어 있었다.
"그게,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걔는 우리 동생이잖아."
어느덧 카벨은 처참히 일그러진 얼굴로 유진을 향해 따지고 있었다. 그나마 그 와중에도 완전히 이성을 잃지는 않았는지 주변을 의식해 목소리를 낮추고 있다는 것이 장할 지경이었다.
유진은 예상했던 반응을 보이는 동생의 모습에 한 차례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이미 예전부터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이라 생각했고, 어차피 한번은 겪고 지나가야 할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몇 번이나 이런 상황을 상상해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인지 그는 제법 담담하게 반응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가족으로 함께 보낸 시간을 모조리 부정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나한테 있어서 그 애는······ 그래, 네가 하리를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야."
"형, 미쳤어?"
하지만 카벨은 유진처럼 차분할 수 없었다. 라벤더 코르디스가 아까 그를 찾아와 했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기 어려웠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 애는 형의 동생인데! 그리고 형은 그 애의 오빠잖아! 그런데 어떻게 둘이······ 그런 게 말이 돼?"
사실 지금도 형이 혹시 그에게 농담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기대감이 은연중에 남아 있었다. 혹시 지금이라도 웃으면서 '너를 놀라게 해주려고 장난을 쳤다'고 말해주지는 않을까?
"카벨. 네가 혼란스러울 걸 알고 있고, 또 난 네 생각을 존중해. 그래서 지금처럼 말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그러나 유진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지금 두 사람 사이에 오간 대화에 농담도 장난도 없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듯이, 흥분한 카벨을 향해 동요 한 점 느껴지지 않는 침착한 모습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게 뭐든 내 앞에서만 해. 하리한테는 티 내지 마. 그 애는 네 말을 나처럼 담담히 들어 넘기지 못할 테니까.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다만 카벨은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게 뭐야······?"
그는 어쩐지 아연한 기분이 되어 눈앞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이어지는 유진의 속삭임에 카벨은 정말이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심정이 되어버렸다.
"네가 원하는 형이 되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차라리 흥분해서 따지는 카벨에게 유진이 덩달아 언성을 높이거나 화를 냈다면 좀 더 비난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저런 표정으로 저런 말을 하는 형에게는 도대체 어떤 식으로 반응해야 좋을지 카벨은 알지 못했다.
유진은 망연하게 서 있는 카벨을 뒤로한 채로 먼저 걸음을 옮겼다. 카벨은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그런 형의 뒷모습을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곧 입을 열어 외쳤다.
"형, 진짜야······? 진짜냐고!"
하지만 유진은 이미 답을 알고 있지 않느냐는 듯이 대답해 주지 않았다.
***
모처럼 퇴근 시간이 겹쳤던 것이 무색하게도 결국 두 사람은 따로 궁을 나서게 되었다.
유진이 떠난 자리에서 망연히 서 있던 카벨이 에른스트의 저택에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카벨 오빠, 오늘 늦었네?"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여느 때처럼 하리가 그를 반겨 주었다. 카벨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하리의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유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카벨보다 앞서 저택에 돌아온 것이 분명했다. 밖에서 확인했을 때 유진이 사용하는 집무실에 불이 켜져 있었으니까.
"오늘은 다른 때보다 훈련을 오래 했어? 밥은? 지금 시간이 좀 애매한데 먹고 온 거야?"
오늘따라 늦게 돌아온 그를 향해 하리가 이것저것을 물었다. 하지만 입이 딱 붙은 것처럼 아무런 말도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이 온통 시끌벅적하게 복잡한 것에 반해 입안에 맴돌던 말은 순식간에 증발해 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카벨이 의아했던지, 잠시 그의 안색을 살피던 하리가 곧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왜 그래? 혹시 기사단에서 혼났어? 매일 오빠만 못살게 구는 사람이 부기사단장이라고 했던가?"
그 걱정스러운 눈빛을 받는 동안 갑자기 바늘을 수백 개는 삼킨 것처럼 목이며 뱃속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기분이 안 좋은 거야? 그 사람이 계속 카벨 오빠만 괴롭혀? 부기사단장이라는 사람이 뭐 그래? 내가 가서 따져 줄까?"
그 여자의 말대로라면 이것은 그의 형인 유진의 일방통행적인 마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아까 유진에게 했던 것처럼 하리에게도 똑같이 말해야 마땅했다.
그런데 목이 꽉 막힌 것처럼 차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