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
그 오빠들을 조심해 103화
그러나 이 이상의 무언가를 더 할 생각은 없는 듯, 유진은 부드럽게 내 몸을 잡아당겨 자리에 앉혀 주었다.
그 후 그는 내 헝클어진 머리까지 직접 손으로 매만져 정돈해 주었다. 그런 것만 보면 점잖은 신사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의 유진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아까처럼 유진에게 까불거릴 마음이 들지 않아서 맹수를 앞에 둔 초식동물처럼 급격히 얌전해진 채 그의 손길을 받았다.
그러다 문득 그의 손이 멈추어졌다.
"그러고 보니까 다이스도 네게 청혼한 적이 있다고 했지."
"그건, 그건 청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유진이 눈을 가늘게 좁히며 문득 생각났다는 듯 읊조린 순간, 나는 파드득 놀라 강력히 부정했다.
아니, 그것보다 유진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완전히 농담처럼 한 말이라 당사자 말고는 아무도 몰라야 정상인데? 역시 다이스인가? 으흑, 이 입 가벼운 사람 같으니.
하지만 또다시 유진이 돌변할까 봐 겁이 난 내가 필사적으로 부정하자, 그는 그냥 넘어가 주겠다는 듯이 내게서 손을 뗐다.
그 후 에른스트의 저택까지 가는 길이 다른 때보다 멀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에스코트 같은 것은 다 제쳐 두고 총알같이 마차 밖으로 뛰쳐나갔다.
노골적으로 도망치는 내 등 뒤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빨간 얼굴을 그에게 들키기 싫어서 멈추지 않고 달음박질쳤다.
그날 나는 유진에게 밀폐된 마차 안이 아주아주 위험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두 번 다시는 잊지 말아야 할 아주 중요한 교훈이었다.
***
다음 날 오후 나는 에단을 데리고 외출했다.
망설이는 내 마음을 대변하듯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았고, 또 내심 긴장이 되기도 했지만 그렇다 해서 외면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하리, 어서 오렴. 루이제를 보러 왔니? 어제도 연회에서 만났다고 들었는데."
내가 방문한 곳은 바스티에의 저택이었다. 나를 보자마자 바스티에 부인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도 그녀를 향해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좋은 오후예요. 오늘은 루이제가 아니라······."
하지만 나는 곧 그녀의 뒤에서 나타난 사람을 보고 말꼬리를 흐릴 수밖에 없었다.
어제 저녁 연회장의 테라스에서 만났던 요하네스였다.
"요한 오빠."
내 입에서 나직한 속삭임이 새어 나왔다.
"어서 와, 하리."
나는 마주한 푸른 눈동자를 보고 그 역시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
요하네스와 나는 방으로 들어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바스티에 부인은 우리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다고 느꼈는지, 조용히 자리를 피해 주었다.
"어제는······."
그와의 만남은 언제나 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나는 주위에 감도는 정적을 기민하게 의식하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가서 미안해."
일단은 사과가 먼저였다. 유진은 어제의 일에 대해 이야기할 겸 자신이 요하네스를 만나겠다고 했지만, 어차피 나도 한 번은 그의 얼굴을 직접 보고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그리고 요하네스가 내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내뱉은 말에 나는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을 움찔 떨고 말았다.
"오늘 아침에 유진 형을 만났어."
오늘 아침이라니, 황성에 가기 전에 유진이 바스티에의 저택을 먼저 찾기라도 한 걸까.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요하네스는 아주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제저녁 유진의 말에 두 눈을 크게 뜨며 미처 감추지 못한 놀라움을 가감 없이 표출했던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가 안일하게 생각했었나 봐."
이윽고 요하네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네가 나와 같은 마음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입을 다물었다. 요하네스의 말에 담긴 어느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네가 나를 그저 친한 오빠 정도로 여긴다는 걸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기다리는 건 자신이 있었으니까. 게다가 나는 앞으로도 줄곧 네 옆에 있을 게 분명했고. 그래서 그저 가만히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면 될 거라고 믿었어."
······어쩌면 요하네스의 말이 맞았을지도 몰랐다. 그의 말처럼 얼마 전과 같은 상태를 유지한 채 그대로 시간이 흘렀다면, 나는 결국 그와 미래를 함께 하게 되었을 수도 있었다.
지난 생에서 그랬던 것처럼, 적당히 안락한 현실에 안주하여, 내 앞에 있는 선택지 중에 그것이 최고임을 알기 때문에.
"이제 보니 내가 바보 같은 생각을 했구나."
그리고 요하네스는 내게 과분할 정도로 좋은 사람이니까······ 분명 그와 함께하는 동안 지금보다 더 그를 존경하고 좋아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언제부터였냐고 묻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겠지."
여느 때처럼 단정하고 차분한 음성이 귓가에 울렸다.
나는 다물고 있던 입술을 천천히 벌려 말했다.
"나도 모르겠어. 언제부터였는지, 또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요하네스의 말처럼 이제 와서 그런 것을 따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어쩌면 오빠 말대로였을지도 몰라."
이미 나는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을 품어버렸고, 그것은 끝 모르고 이기적인 동시에 탐욕적이었다.
"비록 같은 마음은 아니지만 나도 요한 오빠를 좋아하고 있으니까. 만약 이대로 시간이 지났다면 오빠 말처럼 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요하네스를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없었다.
그가 내게 좋은 것만 주었던 것처럼 나도 그에게 똑같이 좋은 것만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었다면 나는 오빠에게 늘 미안했을 거야."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과 동일한 마음이 아니란 사실이 미안했다. 아마 그와 함께하게 된다면, 나는 남은 생 동안 줄곧 그에게 죄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살게 될 것이었다.
"어쩌면 내가 오빠를 불행하게 만들지도 모르지."
나는 요하네스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자신이 없었다.
"요한 오빠는 내게 언제나 고마운 사람이야. 그러니 오빠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이런 이기적인 나보다는 더 좋은 다른 사람이 그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런 생각조차 내 이기심에서 온 위선일 뿐인지도 몰랐지만.
요하네스는 조용히 내가 하는 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입을 열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고마운 사람······ 결국 내 역할은 거기까지인 거구나."
마침내 그의 얼굴에 어렴풋이 떠오른 미소에 나는 가슴이 조금 아파졌다.
"조금 속이 쓰리지만, 그래······ 네게 있어 아무 의미 없는 사람인 것보다는 위안이 된다."
그리고 요하네스는 이런 순간까지도 끝까지 내게 너무나 좋은 사람이어서······.
"나도 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하리. 진심이야."
나는 그에게 감히 미안하다는 말조차 섣불리 할 수가 없었다.
***
"하리."
그날 저녁, 에른스트의 저택에 돌아온 유진이 내 방을 찾아왔다. 나는 창가에 앉아 해 질 녘의 풍경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가 그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마찬가지로 문가에 서서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진이 이윽고 자리에 멈추었던 걸음을 성큼 옮겼다.
"이리 와."
가까이 다가온 나직한 음성이 귓가에 고였다.
그가 나를 안은 것이 먼저인지, 아니면 내가 그에게 안긴 것이 먼저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사실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유진의 단단한 팔이 내 등을 감쌌다. 나는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마셨다.
빈틈없이 맞닿은 몸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 소리가 울렸다.
놓지 않겠다고 했고, 또 놓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함께였다.
"괜찮아."
귓가에 자그마한 속삭임이 스몄다.
지금 위로받을 사람은 내가 아닌데도 유진은 나를 도닥이며 그렇게 말했다.
"괜찮아."
그래서 나도 그를 향해 똑같은 말을 돌려주었다.
그의 가슴을 더 깊숙이 파고들자 따스함이 온몸을 감쌌다. 그 안전한 품속에서 나는 눈을 감았다.
30.5 그 오빠, 카벨
"야, 카벨. 면회다."
맹훈련을 하고 난 직후의 단비 같은 휴식 시간이었다.
한바탕 땀을 쫙 빼고 난 후라 그런지 모두 녹초가 되어 있었다. 카벨은 흐르는 땀을 수건으로 닦던 중에 호출 소식을 전해 듣고 고개를 돌렸다.
"와, 이번 달 들어서 카벨만 벌써 세 번째네."
"누굽니까? 또 지난번처럼 예쁜 아가씨입니까?"
"크으, 불공평해. 근육은 내가 더 멋있는데!"
"야, 배 까지 마! 눈 버려!"
그를 찾아온 사람이 누구인지도 아직 모르면서 카벨의 동기들은 벌써부터 그를 부러워하며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카벨은 면회 소식을 듣자마자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리고 혹시 하는 마음으로 재빨리 부기사단장에게 반문했다.
"찾아온 게 누구인데요?"
혹시 나를 찾아온 사람이 하리는 아니겠지?!
지난번에 임무 보고를 위해 이동하던 길에 하리를 만난 이후로 카벨은 약간의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혹시라도 하리가 그를 보러 기사단에 방문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이었다.
물론 '기사단은 쾌적하지 못하니 절대! 절대로 오지 말라'고 이미 몇 번이나 하리에게 당부를 해놨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 아닌가?
왜냐면 하리는 그를 매우매우 좋아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오빠가 너무너무 보고 싶어서 그리움을 참지 못해 그를 찾아올 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흐뭇해져서 카벨은 언제 걱정을 했냐는 듯 광대를 실룩였다.
"네가 직접 가서 봐, 인마. 나 참, 여자들은 이런 놈의 어디가 그렇게 좋다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니까?"
하지만 부기사단장이 짜증을 한껏 드러내며 뇌까리는 말을 들으니 아무래도 그를 찾아온 것이 하리는 아닌 모양이었다. 카벨은 안도감과 아쉬움을 동시에 느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일단 그에게 면회를 청한 사람이 하리가 아니라고 하니 급격히 관심이 식었다. 그래서 카벨은 언제 입꼬리를 꿈틀거렸냐는 듯이 시큰둥한 얼굴로 목에 수건을 두른 채 걸음을 옮겼다.
"잠깐! 너 설마 그 꼴로 가려고?"
"레이디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당장 들어가서 씻고 나와!"
"하다못해 옷이라도 깔끔하게 정리해!"
그런 카벨을 보고 기사들이 두 눈을 부릅뜨며 시끄럽게 아우성쳤다. 하지만 카벨은 안 들린다는 듯이 귀를 한 번 후비적거린 뒤 그 상태 그대로 연무장을 나섰다.
아니, 왜들 저렇게 야단법석이야? 훈련 시간에 찾아왔으면 땀내가 날 것이라는 사실 정도는 당연히 예상하고 왔겠지.
게다가 그를 찾아온 사람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어차피 얼굴만 잠깐 보고 와서 다시 훈련해야 할 텐데 귀찮게 씻기는 뭘 씻는단 말인가.
사실 카벨도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었다. 맨 처음 입단하고 나서 그에게 호감을 느낀 영애가 몇 명 찾아왔을 때는 그도 나름대로의 두근두근한 설렘을 느끼며 최대한 말끔한 모습을 하고 연무장을 나서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