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
그 오빠들을 조심해 101화
그래 봤자 뒷골목에서 구르던 천한 계집이 아닌가. 그래도 어쨌거나 에른스트는 에른스트이니 친분을 쌓아 둬서 나쁠 건 없겠지. 게다가 자신은 언젠가 에른스트 공작 부인이 될 예정이었으니까.
라벤더는 유진 에른스트에게 첫눈에 마음을 빼앗겨 그를 연모하고 있었다.
장애물인 로자벨라 벨론티아가 있었지만 그래 봤자 정략적인 약혼이니 자신에게 기회가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다면 그가 끔찍하게 아낀다는 여동생인 하리 에른스트를 제 편으로 만들어서 나쁠 것은 없으리라.
하지만 어째서인지 하리 에른스트는 로자벨라 벨론티아하고만 가까이 지내며 라벤더를 멀리했다. 그 사실이 그렇게 짜증이 나고 거슬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라벤더는 어느 날,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목격해 버렸다.
'하리!'
'넘어질 수도 있으니까 움직이지 마. 내가 갈게.'
'가만히 있어.'
신년제 행사 때, 호수에 빠진 하리 에른스트를 유진이 꺼내 밖으로 데리고 나갔던 순간의 일이었다. 그때 하리 에른스트를 보는 유진의 눈빛은······.
아아, 그 눈빛을 어떻게 여동생을 보는 눈빛이라 할 수 있단 말인가!
유진은 함께 물에 빠져 있던 라벤더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시선 한 자락 옆으로 돌리지 않았다.
그날의 충격은 아직도 라벤더의 가슴속에 또렷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절대로 못 줘. 너한테만큼은 절대로 못 줘······."
이렇게······ 이렇게 원하는데, 왜 가질 수 없는 거지?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분한 마음에 라벤더는 입술을 짓씹었다.
자신이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전부 다 망가뜨려 버릴 것이다. 하리 에른스트, 네가 내 것을 빼앗고 혼자 행복해지는 꼴은 절대로 못 봐.
라벤더는 짓이겨진 입술을 타고 흘러드는 비릿한 피를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그래. 자신에게 이런 비참함을 안겨 준 그 여자만큼은 이 손으로 직접 불행하게 만들어줄 것이었다.
30. 좋은 사람
때때로 유진과 나는 참석을 요하는 몇몇 중요한 자리에 동행했다.
유진의 손을 붙잡고 안으로 들어설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시선이 집중되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었지만, 그런 그와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로자벨라와 파혼하고 나서 유진의 옆은 비어 있었기 때문에, 여동생인 내가 그 자리를 한동안 임시로 채운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오늘도 나는 쏟아지는 시선들을 느끼며 유진과 나란히 연회장 안을 걸었다.
"요한 오빠, 루이제."
그러다 문득 아는 사람들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우리를 발견한 듯, 반색하며 가까이 다가왔다.
"오랜만에 뵙네요."
"그래, 오랜만이다."
요하네스가 먼저 유진에게 인사했다. 그들이 인사를 나누는 동안 나도 루이제와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리 언니, 보고 싶었어."
"나도. 오늘은 요한 오빠랑 둘이 같이 왔네?"
그 후 루이제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한 말에 나는 한순간 멈칫했다.
"그러게. 오늘은 우리 둘 다 남매끼리 짝이네. 재미없게."
하지만 나는 곧 그러한 기색을 숨기고 그녀를 따라 웃어 보였다.
"오늘 연회는 다른 때보다 분위기가 차분한 것 같아."
"그렇지? 뭐, 정신 산만한 것보다는 낫긴 하지만."
그렇게 얼마간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는 바스티에의 남매와 헤어졌다. 연회장 안에서 내내 붙어 다니기에는 각자 인사를 나눌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테라스로 나갈까?"
그런데 그들과 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진이 내게 휴식을 권해 왔다.
나는 일단 그가 이끄는 대로 회장 안에서 벗어나 테라스로 향했다.
자리에 앉아 잠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진이 이내 내게로 손을 뻗었다.
"그런 얼굴을 할 거라면 날 말리지 않는 편이 나았을 텐데."
나는 귓가에 흘러드는 잔잔한 음성에 움찔하여 반문했다.
"내 얼굴이 어때서."
"남몰래 잘못한 걸 숨기고 있는 어린애 같아."
하지만 대답을 듣고 나서는 괜히 물었다 싶어서 후회했다. 속마음을 숨기는 데에는 도가 텄다고 생각했는데, 유진은 그런 나를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가 우리의 관계를 지금처럼 숨기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은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유진이 지금 당장 그의 뜻대로 하지 않는 것이 나를 배려해 주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그런 주제에 또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남매로 본다는 사실에 마음이 불편해지다니. 내가 생각하기에도 모순적이었다.
"무서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마주한 검은 눈동자에서 나를 향한 감정이 전해져 왔다. 그것을 보는 동안 갑자기 지금까지 내 안에 존재하고 있던 망설임이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나도 참 아직 바보 같구나. 쓸데없는 생각만 많아져서는.
솔직히 나와 상관없는 타인의 시선은 별로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나와 관계가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직까지 망설여졌다. 특히 카벨과 에리히의 반응이 걱정되기도 했다.
"아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진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무섭지 않아."
또 나는 다른 누구보다 유진을 믿었다.
"오빠가 있으니까 괜찮아."
나는 내 뺨을 감싼 그의 손을 붙잡고 거기에 얼굴을 더 깊숙이 파묻었다. 그러고는 유진의 손에 살며시 뺨을 비볐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근거 없이 용감해지는 것일까? 그와 함께라면 무엇이든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에······ 에른스트 공······."
그때, 테라스의 문밖에서 작은 소음이 새어 들었다. 안쪽에서 커튼을 내려 바깥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언뜻 들어 보니 유진을 찾아온 사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별안간 문밖에 서 있던 에단이 테라스의 문을 두드려 왔다.
"가 봐야겠네."
"안 가도 돼."
유진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지금 함께 있는 시간을 방해받은 것이 마뜩잖은 기색이었다. 하지만 또 한 번 노크 소리와 함께 손님의 방문을 알리는 에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으니까 빨리 다녀와."
나는 작게 웃으며 유진을 재촉했다. 그는 조금 더 버티다가, 세 번째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제야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방 올게."
유진은 괜찮다는 내게 굳이 겉옷을 벗어 어깨에 걸쳐 준 뒤 테라스를 나섰다.
그러고 나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가씨. 바스티에 공자가 만남을 청하고 있습니다. 안으로 들일까요?"
밖에서 들려오는 에단의 목소리에 나는 문을 열 것을 허락했다. 그러자 곧 열린 문틈으로 요하네스가 들어섰다. 그는 테라스에 혼자 있는 나를 보고 미소 지었다.
"역시. 밖에 비숍 경이 있는 걸 보고 네가 여기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루이제는?"
"친구와 함께 있어."
요하네스가 조금 전 유진이 앉았던 곳에 자리 잡았다. 그러는 동안 그의 푸른 눈동자가 내 어깨 위에 걸쳐진 유진의 옷에 잠깐 머물렀다.
"유진 형은 어디에 가고 혼자 있어?"
"잠깐 만나야 할 사람이 생겨서 자리를 비웠거든."
그러고 보니 요하네스와도 상당히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하기야 그동안 나는 외출을 잘 하지 않았고, 요하네스는 바스티에 백작에게 일을 배우고 있었으니 어쩔 수 없기도 했지만.
"유진 형의 파혼 소식도 그렇고, 다이스 전하의 약혼 소식도 그렇고, 항상 다 갑작스러운 것 같아."
그래서 요하네스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처음이었다. 내가 처음에 놀랐던 것처럼, 그 역시도 뜻밖의 소식에 많이 놀랐던 모양이었다.
"벨론티아 양은 근래 들어 외출을 삼가고 있다면서?"
"지난번에 우연히 밖에서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 후로도 외출은 잘 안 하는 것 같더라."
"아, 만난 적이 있어?"
"응, 다음에 벨론티아의 저택에서 만나기로 약속도 했어."
요하네스는 로자벨라와 내 관계가 이전과 변함없는 것 같자 다소 안심한 것 같았다.
솔직히 그가 그럴 이유는 없었지만, 워낙에 다정다감한 성격인 요하네스이다 보니 여러모로 신경 써 주었던 듯했다.
"확실히 놀라긴 했어. 유진 형은 어떤 경우에도 파혼 같은 건 안 할 사람 같았는데."
요하네스의 말을 듣고 나는 살짝 시선을 내리깔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도 요하네스처럼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지금의 유진과 내가 이런 관계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리, 이런 식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때, 잔잔한 목소리가 다시금 내 귓가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나는 퍼뜩 고개를 들어 요하네스를 응시하고 말았다.
"나는 너를 바스티에로 데려오고 싶어."
요하네스는 곧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흔들림 없는 그의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덜컥 말문이 막혔다.
"갑작스럽게 말해서 미안해. 하지만 진심이야."
그의 말대로 너무나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하지만 요하네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그의 진지한 얼굴을 보면 조금 전 그가 한 말이 진담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예전부터 줄곧 나는 그런 마음이었어."
나를 바스티에로 데려가고 싶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를 정도로 아둔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예전의 나였다면 그런 요하네스의 청을 거부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지난 생에도 나는 그와 결혼할 예정이었고, 또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지금의 네가 거절할 것도 알아."
그래. 가증스럽게도 마음속에는 다른 사람을 품은 채로······.
"하지만 지금 당장이 아니라······."
더 이상 요하네스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미안해, 요한 오빠."
어중간한 회피로 그의 마음을 기만해서는 안 되었다. 그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도······ 염치없는 일로 생각되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요하네스에게만큼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앞에 있는 사람을 향해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열어 말했다.
"나는 그럴 수 없어. 왜냐하면 나는······."
"미안하지만, 하리를 바스티에로 보낼 일은 없어."
그 순간, 불현듯 옆에서 날아온 누군가의 목소리가 내 말을 가로채 갔다.
나는 곁으로 다가온 사람에게 이끌려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고개를 들자 싸늘한 빛을 발하는 검은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 에른스트일 테니까."
어느덧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유진이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요하네스를 향해 읊조렸다. 그리고 그 직후 우리는 함께 테라스를 벗어났다.
***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의 분위기가 다소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나는 아까부터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유진을 향해 물었다.
"화났어?"
"아니."
나직한 대답이 곧바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의 표정이 여전히 밝지 않아서 내 마음도 덩달아 편치가 않았다. 그래서 말없이 유진의 얼굴을 살피노라니, 곧 그가 억눌린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야."
그게 곧 화가 났다는 의미가 아닌가? 아무래도 방금 전에 요하네스랑 나랑 미묘한 상황에 처해 있었던 걸 보고 기분이 상한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