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그 오빠들을 조심해 100화
언제나 그렇듯 카벨이 떠난 자리는 급격히 조용해졌다.
"그만 가시죠, 아가씨."
"네, 가요."
아이구, 둘째만 상대하면 기운이 쭉쭉 빠지는 것 같다니까?
나는 점이 되어 가는 카벨의 뒷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에단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29. 그 남자들과 그 여자들
"요즘 너무 놀기만 하는 거 아니야?"
싱그러운 녹빛이 시야 가득 이지러지는 화창한 날이었다. 유진과 하리는 함께 에른스트 저택 내의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로웬그린 씨가 화나서 쫓아오면 어떡하려고 그래?"
과연 하리의 말처럼 근래의 유진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벌레처럼 굴었던 과거가 아예 없는 것처럼 한가로운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하리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하는 말에 유진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담담히 대꾸했다.
"요즘은 할 일이 별로 없어서 한가한 것뿐이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밀린 일을 처리하느라 바빴으니 그만 쉴 때도 되었지."
하지만 물론 현실은 그의 말과 달랐다. 지금쯤 서류의 산에 파묻혀 그를 원망하고 있을 로웬그린의 모습이 눈에 훤했다.
"하긴, 얼마 전까지 오빠가 많이 바쁘긴 했어."
물론 그런 것을 모르는 하리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예쁘게 웃었다.
유진은 그런 그녀의 손을 조금 더 세게 힘주어 붙잡았다.
지금처럼 하리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더없이 소중했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이렇게 손만 붙잡고 있어도 마음 한구석이 풍선처럼 크게 부풀어 올라 저 하늘로 둥실 떠오를 것 같았다.
"있잖아."
잠시 후, 그와 나란히 서서 정원을 걷던 하리가 살며시 그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오빠가 다이스 전하와 로자벨라 양을 도와줬어?"
유진은 그녀가 다이스에게 무슨 말인가를 들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간파했다.
하지만 당사자인 다이스조차 모르는 유진의 속내를 하리가 알 리도 만무했다.
"서로 좋아하는데 모르고 있으니까 도와줬구나."
역시 그녀는 대답이 없는 유진을 보고 알아서 오해했다.
그 생각이 너무 순진해서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하리는 이미 유진이 다이스의 마음을 아는 시점에서 로자벨라와 약혼했던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또 그 둘의 마음을 유진이 자기 좋을 대로 이용했다는 것도, 그리고 애초에 쓸모가 없었다면 그들의 마음 따위는 그에게 있어 하등의 의미도 가치도 없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굳이 알려 줄 필요가 없었다. 지금도 그를 향해 웃어 보이고 있는 하리의 모습이 몹시도 사랑스러웠으니까.
"그것 봐. 아닌 척하면서 착한 일은 혼자 다 하고."
그녀는 마치 유진이 자랑스러운 것처럼, 또 유진이 한 일을 칭찬해 주고 싶은 것처럼 어딘가 뿌듯해 보이는 얼굴로 그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하리는 이렇게 간혹 그를 애 취급하듯 머리를 쓰다듬거나 할 때가 있었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때도 그녀는 가끔 유진의 앞에서 아이답지 않은 모습을 보여 그를 놀라게 하곤 했다.
지금 하리의 행동은 마치 그들이 함께하지 못했던 유년 시절을 보상이라도 해주려는 것 같았다.
유진은 이렇게 자신을 어린애 대하듯 구는 하리를 볼 때마다 불만이었지만······.
"응, 역시 유진 오빠야."
그래도 역시 이 미소와 손길은 좋아했기 때문에 그냥 그것을 뿌리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사방에서 그윽한 향기가 풍겨 나왔다. 시야 가득 붉은 장미가 두드러진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하지만 유진의 눈에는 오직 단 한 사람만 비치고 있을 뿐이었다.
오직 그것만으로도 그의 세계는 완전했다.
***
다음 날, 하리는 전부터 교류가 있던 기데온 백작 부인의 살롱에 초대받아 그 자리에 참석했다.
그리고 자리가 파한 후에도 기데온 부인에게 붙잡혀 장장 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다가 가까스로 풀려났다.
독특하게도 기데온 백작가의 정문까지 향하는 길은 하나의 거대한 화원으로 꾸며져 있었다.
"앗!"
꽃향기를 맡으며 걷던 도중에 하리는 갑자기 균형을 잃어 비틀거리고 말았다.
자리에 멈추어 서서 확인해 보니 참으로 통탄할 만하게도 구두의 한쪽 굽이 부러져 있었다.
"부축해 드릴까요, 아가씨?"
오늘은 에단 비숍의 휴일이기 때문에 대신 하리의 호위를 맡은 기사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의 말처럼 이대로는 양발의 굽의 높이가 맞지 않아서 정문 앞에 세워진 마차까지 혼자 걷는 것이 어려울 터였다.
하지만 하리는 잠깐 입술을 오므리며 부러진 구두 굽을 불만스럽게 내려다본 뒤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반응했다.
"괜찮아요. 그냥 반대쪽 굽도 없애죠, 뭐."
뒤에 서 있던 기사가 그 말의 의미를 미처 깨달을 새도 없이 곧바로 하리의 다리가 들어 올려졌다.
콱!
그리고 옆에 있던 디딤돌에 그녀의 구둣발이 날아가 꽂혔다.
"음? 아직 덜 됐네."
하지만 한 번으로는 부족했는지, 굽이 반쯤 떨어져 덜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하리는 치맛자락을 붙잡고 방금 전보다 더 힘을 줘서 발을 굴렀다.
귀족 아가씨답지 않게 호쾌한 그 모습을 호위 기사가 동공을 흔들며 바라보았다.
"거기 에른스트 양 아니신가요?"
깨끗이 떨어져 나간 굽을 보고 상쾌한 기분이 되어 있던 하리는 뒤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고 눈가를 찌푸렸다.
왜냐하면 그녀에게 다가온 사람이 다름 아닌 라벤더 코르디스였기 때문이다.
"저런, 호위 기사가 바뀌었네요? 역시 패륜아 호위 기사를 옆에 데리고 다니기는 좀 그랬나 보죠?"
하리가 기데온 백작 부인에게 붙잡혀 저택에 남아 있던 것처럼, 라벤더는 그녀의 딸인 기데온 영애와 친분이 있어 담소를 나누다 나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정문으로 향하는 중에 낯익은 얼굴이 보여 말을 걸고 말았다.
하리와 그녀의 옆에 있는 호위 기사를 훑어보는 라벤더의 얼굴에 비틀린 미소가 떠올랐다.
"그나저나 방금 전의 그 꼴은 도대체 뭔가요?"
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마주한 사람을 향해 서늘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눈앞에 있는 이가 반갑지 않은 것은 둘 다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양은 예법 공부를 다시 해야겠네요. 에른스트, 더 나아가서 아를란타의 정숙한 숙녀들의 품위를 혼자서 다 갉아먹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해요?"
라벤더의 입에서 가시 돋친 말이 쏘아져 나왔다. 하리 에른스트가 자신의 말에 모욕감을 느끼며 뺨을 붉히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앓던 이가 빠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뒤를 이은 것은 '풋' 하는 가느다란 웃음소리였다.
라벤더가 그 소리에 눈꼬리를 추어올리자 하리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아, 미안해요. 양의 말이 너무 우스워서 그만."
그리고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라벤더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구기고 말았다.
"전 이까짓 일 하나로 품위 걱정을 할 만큼 제 가치를 낮은 곳에 두지 않아서요."
심지어 하리는 앞에 있는 라벤더를 위아래로 한 차례 훑어본 뒤 측은한 표정을 짓기까지 했다.
"하지만 코르디스 양은······ 그래요. 하는 걸 보니 평소에 각별히 신경을 쓰면서 살아야 할 것 같네요. 어쩜 상상만 해도 피곤한 인생이기도 해라. 양이야말로 기회가 될 때 예법 공부를 처음부터 다시 하는 게 좋겠어요."
그 동정하는 듯한 눈빛에 라벤더는 폭발했다.
지금 이 천박한 계집애가 감히 누굴 저따위 눈으로 깔아 보는 거야?!
"웃기지 마, 네까짓 게 뭐라도 된 양······!"
"너야말로 네가 뭐라도 된 양 굴지 마. 넌 네가 그렇게 잘난 것 같아?"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자마자 싸늘한 음성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라벤더는 방금 전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한순간 깨닫지 못했다.
"왜, 난 너한테 예의 격식 다 버리고 말할 수 없을 줄 알았어?"
그리고 입술을 뻐끔거리는 그녀를 향해, 하리가 다시금 냉소적으로 읊조렸다.
"너 같은 걸 뭐라고 하는 줄 알아? 지랄이 풍년이다, 혹은 입으로 똥을 싸고 있다."
"뭐, 뭐?!"
천사처럼 예쁜 얼굴을 하고 그 고아한 입술로 내뱉는 말이 몹시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하리 에른스트는 그런 순간에도 성가라도 부르고 있는 것처럼 더없이 고귀해 보였다.
"네가 말할 때마다 똥내가 난다는 소리야."
"이 정신 나간 계집애가 지금 나한테 뭐라고······."
"멍청함 좀 그만 뽐내고 정신 차려. 네가 나한테 이런 식으로 굴어 봤자 아무것도 안 나와. 좀 더 똑똑하게 구는 게 어때? 내가 너라면 그냥 날 없는 사람인 셈 치고 무시하는 쪽을 택할 텐데, 내 존재감이 어지간히 큰가 봐?"
라벤더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시원하게 욕이라도 한 바가지 퍼 주고 싶은데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도 황당해서 그런지 목구멍에서 아무런 소리도 터져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부들거리는 라벤더를 향해 하리가 마지막으로 차갑게 일갈했다.
"그런데 어쩌지. 나한테 넌 아무것도 아니거든. 그러니까 볼 때마다 이런 식으로 귀찮게 치근대지 좀 마. 너한테 낭비할 시간 없으니까."
그렇게 말한 뒤 하리는 호위 기사를 데리고 라벤더에게서 뒤돌아섰다.
"아아악!"
라벤더는 코르디스의 저택으로 돌아와 화장대 위에 있던 것들을 손으로 전부 다 쓸어버렸다.
기데온 백작가의 화원에서 하리에게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천치처럼 당하기만 했던 게 분했다.
'사람을 잘못 보셨네요, 코르디스 양.'
얼마 전 무도회에서 있었던 요하네스 바스티에와의 만남이 가열된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제가 그녀의 의사에 반하는 일을 할 리가 없잖습니까?'
그리 대단한 모의를 하자 속살거렸던 것도 아니고, 그저 하리 에른스트를 마음에 품은 요하네스 바스티에를 조금만 이용하려고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하리 에른스트를 갖고 싶지 않냐'고 사탕발림을 하며 손을 잡자고 한 라벤더의 권유를 일말의 고려조차 하지 않고 거절했다.
'무슨 속셈인지는 몰라도 당신이 만약 하리에게 위해를 끼친다면 저도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그러고는, 그녀의 제의를 거절한 것으로도 모자라 저따위 협박까지 더했다.
그때의 일을 다시금 생각하자 머리끝까지 열이 뻗쳤다.
왜? 도대체 왜? 왜 저 계집애한테는 모든 게 다 이렇게 쉬운 거야?
하리 에른스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자신의 안에 있던 모든 것이 하나씩 무너져 가기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출신조차 불분명한 더러운 뒷골목의 여자애. 그런데 의상실에서 처음 만난 하리 에른스트는 두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봐야 할 정도로 눈부신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다.
에른스트 부인의 죽은 딸과 닮았다는 은발과 선명한 빛을 발하는 자안을 비롯해, 그녀는 어딘가 신비롭고 묘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열여섯의 천진난만한 소녀 같다가도, 가끔은 깜짝 놀랄 정도로 어른스럽고 성숙해 보여 사람의 혼을 빼놓았다.
그리고 그녀의 온몸에 흐르는 그 품격과 우아함. 마치 태생부터 그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의연한 모습까지.
거기에 홀려 한순간 넋을 놓고 말았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