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그 오빠들을 조심해 99화
사랑이 저주라고 했던 말과는 달리, 지금의 그녀는 조금도 불행해 보이지 않았다.
언제부터 다이스에게 마음이 향했던 것인지는 몰라도, 로자벨라의 얼굴이 지금까지 중에 가장 밝아 보여 나도 기뻤다.
"오늘 즐거웠어요."
"저도요."
시간이 지나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택을 나서는 나를 로자벨라가 직접 배웅해 주었다.
"가끔 찾아와 줘요. 앞으로도 한동안은 저택에 있을 예정이니까요."
"언제든 초대해 주시면 기쁠 거예요."
나는 그녀의 청을 기꺼이 수락한 뒤 벨론티아의 저택을 떠났다.
***
"어땠어?"
"뭐가요?"
"뭐긴 뭐야, 로자벨라 말이야!"
나는 다이스를 앞에 두고 측은한 눈빛을 띠고 말았다.
다이스는 내가 그의 궁에 도착하자마자 안에서 뛰쳐나와 이렇게 나를 닦달하고 있었다.
주위에 있는 시종장과 궁인들, 또 기사들이 그런 다이스를 보다가 슬그머니 시선을 회피했다. 그들도 제 주인의 체통 없는 모습이 꽤 민망한 눈치였다.
"아직도 나한테 화가 많이 난 것 같아?"
이 사람······ 원래는 좀 더 대범하고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로자벨라가 얽히니까 이렇게 되네.
하긴, 원래도 로자벨라에 관한 일에서는 좀 사람이 허술해지곤 했었지.
아니, 그건 그렇고. 누가 들으면 꼭 내가 다이스의 첩자인 줄 알겠네!
물론 지난번에 궁에 와서 그의 푸념을 들어준 것은 맞았지만, 그렇다 해서 내가 그의 지침을 받고 벨론티아의 저택에 방문했던 것은 아니었다.
"제가 로자벨라 양을 만난 건 어떻게 아세요?"
"그 정도야 당연히 알지."
내가 눈을 가늘게 좁히며 묻자 다이스가 뻔뻔하게 대꾸했다.
나는 골치가 아파져서 이마를 짚었다. 로자벨라의 말을 듣고 짐작하긴 했지만 역시 사람을 심어 놨구먼. 물론 감시 차원은 아니겠지만.
사실 사람을 심어 놨다기보다는 벨론티아의 사용인들을 구워삶아 놨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혹여나 로자벨라의 마음이 자신에게서 돌아설까 전전긍긍하며 그녀의 화가 풀리기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는 다이스의 모습이 눈에 훤했다.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시죠."
"그냥 지금 걸으면서 얘기해 주면 안 되나?"
아이고, 이 사람아.
나는 속으로 탄식하며 내 옆에서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구는 다이스를 쳐다보았다.
아를란타 전 백성의 사랑을 받는 황손 다이스가 이렇게 모양 빠지는 모습을 보이다니.
크흑, 역시 사랑은 사람을 변하게 할 정도로 위대하다 그건가.
"짐작하시는 것처럼 로자벨라 양은 화가 아주 많이 났어요."
마침내 방 안에 자리를 잡은 뒤 나는 입을 열었다. 다이스는 다과상을 들이라 명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재촉하듯 내 얼굴만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솔직히 로자벨라의 화는 조만간 풀어질 것처럼 보였지만 나는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 아니, 어떤 의미로 로자벨라는 이미 다이스를 용서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
하지만 그녀는 다이스가 좀 더 반성하기를 바라고 있었으니까.
"서, 설마 이제 내가 싫어졌대?"
그리고 다이스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염연히 말해서 나는 다이스보다 로자벨라의 편이었다.
"로자벨라 양의 마음도 헤아려 주세요. 오죽하면 저택 앞까지 찾아오신 다이스 전하를 그대로 돌려보냈겠어요?"
다이스의 어깨가 밑으로 축 처졌다. 한순간에 비 맞은 강아지처럼 처량한 분위기를 풍기는 다이스가 조금 불쌍해 보이기도 했다.
"그래도 이번 일로 다이스 전하와의 약혼을 후회하는 정도는 아닌 것 같으니 너무 절망하지는 마시고요."
하지만 그는 내 말에 단비를 맞은 꽃처럼 생기를 입고 활짝 피어났다. 하여간, 로자벨라에 관한 일에서만큼은 참 알기 쉬워지는 사람이었다.
"아무래도 벨론티아에 매일 선물을 보내야겠어! 로자벨라가 뭘 좋아할까? 역시 여자들은 꽃인가? 아니면 보석?"
다이스는 금세 되살아나 어디에선가 종이와 펜을 가져왔다. 그리고 로자벨라에게 보낼 선물의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과연 로자벨라의 철벽같은 마음마저 움직이게 한 대단한 열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이번 기회에 내 보물 창고를 통째로 다 털까?"
"뭐든 너무 과하면 좋지 않다는 말도 있잖아요, 전하."
물론 그렇다 해서 다이스의 보물 창고를 통째로 터는 건 지나쳤기 때문에 나는 그를 말리기 위해 진땀을 빼야만 했다.
"저어, 에른스트 공에게 내가 많이 고마워하고 있다고 전해 줘."
그러던 어느 순간, 다이스가 펜으로 이마를 긁적이며 약간 쑥스러운 어투로 말을 꺼냈다. 나는 그의 입에서 나온 익숙한 이름에 다이스와 함께 로자벨라의 선물을 고민하던 것을 멈추었다.
"유진 오빠에게요?"
"아마 그가 아니었으면 나는 용기 낼 생각을 하지 못했을 거야. 그럼 지금 같은 행복도 모르고 있었겠지."
그렇게 말하며 다이스는 약간은 멋쩍은 듯이 어렴풋하게 웃었다.
"양에게도 고맙고 공에게도 고마워. 나는 전부터 에른스트의 사람들에게 도움만 받는 것 같아."
나는 다이스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뒤이어 귓가에 흘러든 목소리에 덩달아 작게 웃고 말았다.
"그러니 혹시 나중에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 말하라고. 난 그대들의 편이니까."
그는 퍽 호기롭게 말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에른스트의 든든한 힘이 되어주겠다고 다짐이라도 하듯이. 이미 지금까지 그가 보여 준 호의 자체가 고마운 것이었는데도.
"꼭 기억해 뒀다가 말할 거예요. 그때 가서 잊으셨다고 하면 안 돼요."
"왜 이래, 난 한 입 가지고 두말하지 않는 사람이야."
나는 장난스럽게 말하는 다이스를 보며 피식 웃어버렸다.
***
궁 밖으로 나서자마자 강렬한 직사광선이 머리 위로 내리쪼였다.
"오늘은 날씨가 좀 덥네요."
"양산을 들어드릴까요?"
요즘 들어 에단이 전에 비해 나한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온 느낌이었다.
역시 지난번 라벤더 코르디스와의 일이 있고 난 후부터인가. 지금도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내 양산을 들어주겠다고 말하고 있고.
사실 자신의 호위 기사에게 양산을 들게 하는 귀부인들이 하나도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것을 수치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에 에단의 말은 퍽 의외였다.
게다가 그는 평소에도 고지식한 편이었기에 더욱.
이건 꼭 나를 경계하던 야생의 고양이가 슬금슬금 다가오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지.
"햇볕이 강해서 경도 더울 것 같은데 그러지 말고 같이 쓸래요?"
"전 괜찮습니다."
내 권유에 에단이 흠칫하며 곧바로 거절했다.
아니, 왜 그렇게까지 정색하실까? 남녀가 유별한데 같이 양산을 쓰자는 말을 해서 그런가?
하지만 뭐 어때서. 호위 기사가 더워 보이면 양산 좀 같이 쓸 수도 있고, 그런 거지.
그래도 에단이 너무 칼같이 단호하게 거절해서 나도 그냥 그만두었다.
같이 쓸 것도 아닌데 에단의 손에 양산을 들게 하기도 좀 그래서 그의 권유도 불발로 돌아갔다.
"앗, 카벨 오빠!"
그러다 문득 나는 카벨을 발견했다.
그는 몇몇 기사와 함께 제복을 갖춰 입고 내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기사단은 하루 종일 연무장에만 틀어박혀 있어서 직접 찾아가지 않는 한 지금처럼 우연히 마주치기란 하늘의 별 따기 같았는데, 오늘은 어쩐 일이지?
그나저나 우리 둘째, 저렇게 차려입고 걸으니까 각이 사는구나.
저런 걸 보면 가끔 카벨을 두고 멋지다고 하는 영애들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앗, 하리······!"
내 부름에 카벨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옆에 있던 기사들도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데 카벨이 다음 순간 그들을 돌아보더니 무어라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왜 다른 기사들이 갑자기 사색이 되어서 자리를 떠나는 거야?
그러고 나서야 카벨은 나를 향해 부리나케 달려왔다.
"내가 우리 기사단에 오지 말라고 했잖아?!"
"여기 기사단 아닌데?"
여기가 너희 기사단으로 보이니?
내 말을 들은 카벨이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흠칫했다.
"난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어. 우연히 마주친 것까지 내가 어쩔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는 지난번부터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자신의 기사단에 내가 방문하는 걸 기피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지금의 기사단은 영 수질이 좋지 않으니 자기가 깨끗이 물갈이를 한 뒤 나를 데려오겠다나, 뭐라나.
"왜 그래, 좀 서운한데? 나 안 반가워? 난 오빠 봐서 좋은데."
사실 카벨이 생각하고 있을 법한 게 뭔지, 어쩐지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그냥 혀를 쯧쯧 차며 열심히 하라고 그의 등을 다독여 주었다.
그러자 금세 헤벌쭉해지는 얼굴이 볼만했었다.
지금도 내가 슬쩍 던진 말에 카벨의 입꼬리가 부들거렸다. 좋아하는 것이 만면에 드러나 보이는데 안 그런 척 무게를 잡는 모습이 나름대로 귀여웠다.
"그으래? 날 만난 게 그렇게 좋단 말이지? 얼마만큼 좋은데?"
짜식, 그런 걸 꼭 그렇게 입으로 확인해야겠냐?
"당연히 엄청 많이 좋지!"
그래도 일단은 장단을 맞춰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카벨이 흐흥, 콧소리를 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뿌듯해했다.
그러다 문득 그의 시선이 내 뒤에 서 있는 에단에게 가 닿았다.
"윽······."
그 직후 어째서인지 카벨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나는 카벨의 손가락이 뒤이어 에단을 삿대질하는 것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에단 비숍! 난 지난번에 댁한테 진 게 아니야! 어쩌다 한 번 운 좋게 이긴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고 우쭐하지 마! 알았어?!"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으르렁거리는 카벨을 보다가 에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둘이 대련한 적 있었어요?"
내 물음에 에단이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부터 고집을 꺾지 않으시기에 한 번 상대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억, 그렇구나. 카벨이 전부터 에단하고 겨뤄 보고 싶다며 벼르더니 결국 성공했구나. 그런데 졌구먼, 졌어.
나는 바싹 약이 올라 보이는 카벨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차다가 문득 생각난 것을 그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오빠, 지금 어디 가는 길 아니었어?"
그런데 이어지는 카벨의 대답이 참으로 대책 없었다.
"임무 보고 때문에 기사 단장한테 가는 중이었는데 다른 놈들 보냈으니까 괜찮아!"
뭐? 괜찮긴 뭐가 괜찮아?!
"뭐야, 그럼 빨리 가 봐야지! 임무 보고라면 오빠도 직접 가서 해야 하는 거잖아?"
모르긴 몰라도 기사단장에게 직접 보고하는 일인데 이렇게 동료 기사들만 보내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직접 가서 얼굴 도장도 찍고 그래야지!
"빨리 가, 빨리!"
카벨은 나한테 쫓겨나면서도 찡찡거렸다. 하지만 그래도 정말 말처럼 직접 얼굴을 보이지 않아도 되는 일은 아닌지, 결국은 하는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발길을 뗐다.
"그럼 나 갈게! 내가 보고 싶어도 조금만 참아!"
알았으니까 빨리 가라, 이놈아!
역시 방금 전까지는 그냥 만용을 부렸던 것인 듯, 카벨은 엉덩이에 불이 붙은 것처럼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그러면서도 나한테 저런 황당한 인사를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