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그 오빠들을 조심해 98화
그들의 저급한 기대대로 에른스트와 벨론티아가 척을 지는 일은 없다는 것을 한 번쯤 알려 줄 필요도 있었고.
황실과 에른스트, 그리고 벨론티아는 그렇지 않아도 전부터 관심을 집중 받아 구설에 오르기 쉬운 입장이었으니까.
나는 협탁 위에 있는 화병에 꽃을 꽂다 말고 소파에 앉은 유진을 돌아보았다.
그는 오전에 잠시 황궁에 들렀다가 금방 돌아와 나와 함께 에른스트의 저택에 머물러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놀고 있는 건 아니라 지금도 손에 서류로 보이는 종이를 들고 있었지만 말이다.
유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으나 내 마음속의 욕심이 이겼다. 나는 조용히 유진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 뒤에서 그에게 손을 뻗었다.
내 인기척을 느낀 그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지만 내 팔이 그의 목에 둘리는 것이 더 빨랐다.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유진의 어깨 위로 굽이치며 떨어졌다. 유진이 이렇게 내 손안에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이상했다.
사실은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 아직도 종종 꿈이나 환상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바람 소리 같은 얕은 웃음이 귓가에 부스러졌다.
"왜 뒤에서?"
"얼굴을 보면······ 부끄러우니까."
물론 먼저 뒤에서 끌어안아 놓고 할 소리가 아닌 것 같기도 했지만. 말해놓고 보니 오히려 더 쑥스러워져서 나는 유진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리 와."
그가 내 팔 위로 손을 올리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안 되는데. 지금 눈을 마주하면 더 부끄러워질 게 분명해.
"하리."
하지만 유진이 재촉하듯 내 이름을 부르기까지 하자 더는 버텨 낼 재간이 없어지고 말았다. 나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유진을 향한 내 방어벽은 너무나 허술했다.
결국 나는 끄응 신음하며 유진의 목을 안고 있던 팔을 풀고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곧바로 내 선택을 후회했다.
"아니야, 아무래도 난 그만 나가 봐야겠······."
하지만 도망갈 준비를 하자마자 유진에게 붙잡혀서 끌려가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예전에 그랬듯이 어느덧 나는 유진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 아주 가까이에서 쏟아지는 시선에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얼굴 보여 줘."
그러나 이번에도 여지없이 그가 내 손을 붙잡아 내렸다.
"이런 거, 아직 적응이 안 돼."
나는 유진의 시선을 피하면서 원망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가 아까 그랬듯 후후, 옅은 웃음을 흘렸다.
"아마 금방 익숙해질걸."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하는 건지, 아니면 내가 익숙해질 때까지 이러겠다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말이었다.
털썩.
응? 그런데 갑자기 등 뒤에 푹신한 무언가가 닿는 느낌이 들었다. 한순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곧 내가 소파 위에 눕혀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내 위에는 유진이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흠칫하며 굳었다.
"자, 잠깐만."
내 옆으로 유진의 팔이 버티고 있어서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그 상태로 그의 얼굴이 다가와 나도 모르게 손을 올려 가로막고 말았다.
"앗."
하지만 뒤이어 손가락을 아프지 않게 깨물려 깜짝 놀랐다. 정면에서 내려다보는 눈동자에 나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어버렸다.
내가 놀란 걸 알았는지, 유진이 내 손을 붙잡아 내린 뒤 이번에는 내 얼굴로 천천히 손길을 옮겼다.
부드럽게 얼굴을 어루만지던 손이 귀에 닿아서 내가 움찔하자, 이마 위로 그의 입술이 떨어졌다. 아마도 발그스름하게 물들었을 뺨에도 따스한 온기가 내려앉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짧게 시선이 마주친 직후 느리게 입술이 겹쳐졌다.
아주 다정하고 상냥한 입맞춤이었다. 잡아먹히기라도 할까 봐 무서웠던 처음과 달리. 물론 미친 듯이 뛰어 대는 내 심장은 여전했지만.
그러던 어느 순간 스륵, 무언가가 풀어지는 느낌이 들더니 목 부근이 허전해졌다.
처음에는 이유를 몰랐지만 잠시 후 유진이 고개를 들고 나서, 그가 내 옷의 목 부분을 여미고 있던 리본을 풀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진의 손이 겉으로 드러난 내 목덜미를 쓸었다.
"거의 지워졌네."
오늘 아침에 나도 확인했던 자국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연회가 있던 밤에 유진이 마치 낙인을 찍듯 내게 남겼던 붉은 흔적.
나는 피부 위를 훑는 움직임을 느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나도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얼굴에 닿는 손길을 느낀 유진이 시선을 움직여 나를 마주했다.
사실 눈앞에 있는 사람을 만지고 싶은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런 말, 어쩐지 창피해서 입 밖으로 내지는 못 했지만.
나는 도대체 언제부터 유진에게 내 마음을 들켰던 것인지 아직도 알 수가 없었다.
아니······ 하지만 어쩌면 그에게 완벽히 숨기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던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야, 언제나 목 끝까지 가득 차올라 한 걸음만 잘못 옮겨도 그 안에 담긴 것이 모조리 흘러넘칠 것만 같던 나날들이 아니던가.
그런데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것 같던 사람이 지금 이렇게 얌전히 내 손길을 받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유진은 내가 그의 얼굴을 양껏 만지게 그냥 내버려 두었다.
"있잖아."
그래서 나는 원하는 만큼 실컷 유진을 만질 수 있었다.
"사랑해, 아주 많이."
그리고 지금 이것이 현실이라는 확신이 어느 정도 내 안에 뿌리내렸을 무렵, 나는 그를 향해 속삭였다.
사실은 나도 유진과 마찬가지였다. 나 역시 그에게 같은 말을 하기 위해 긴 시간을 기다려 왔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이 사람이 옆에 있어 준다면, 분명 나도 행복할 거야.
그리고 내 말을 들은 유진이 그 어느 때보다 벅찬 얼굴로 나를 꽉 안아주었기 때문에 내 예상대로 나는 아주 쉽게 행복해질 수 있었다.
***
"하리, 와 줘서 고마워요."
"저야말로 초대해 주셔서 고마워요, 로자벨라."
며칠 후 나는 로자벨라의 초대를 받아 벨론티아의 저택에 방문했다.
우리가 응접실에 자리 잡자마자 하녀들이 다가와 차를 내주었다. 테이블 위의 수반에는 달리아와 수국이 장식되어 있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나는 로자벨라를 향해 물었다. 기분 탓일까? 지난번에 짧게 마주쳤을 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어쩐지 로자벨라를 둘러싼 분위기 같은 것이 묘하게 전보다 편안해진 것 같았다.
그렇다 해서 나를 대하는 격식이 전보다 덜하다는 것은 아니었고, 그저 은연중에 풍기는 느낌 같은 것이 그랬다.
"나쁘지 않았어요. 하리는요?"
"저도 잘 지냈어요."
우리는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찻잔을 들어 올렸다. 잠시 후 찻물로 목을 축인 로자벨라가 지나가듯이 내게 물었다.
"그 사람은 어때요? 보나 마나 잘 지내겠죠?"
그녀가 말하는 사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유진일 것이었다.
약혼한 동안에도 그랬지만 파혼 이후에도 서로와 연락을 주고받거나 하는 일이 없던 두 사람이었다. 그래서 로자벨라는 유진의 근황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로자벨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애초에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관계가 있던 사람들도 아니니까 아마 잘 지내고 있겠죠. 알아요. 알지만 그냥 한 번 물어본 거예요."
방금 전의 질문에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듯한 담백한 말투였다.
애초에 내 대답을 듣고자 했던 것이 아닌 듯, 로자벨라는 그렇게 자문자답한 뒤 엷게 웃었다.
나도 그녀를 따라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입을 열었다.
"다이스 전하께서 로자벨라 양의 근황을 궁금해하세요."
"어차피 소식을 다 전해 듣고 있을 거면서 뭐하러 그런 걸 궁금해하는 걸까요?"
쿨럭.
아무래도 로자벨라와 다이스 사이의 골이 깊은 모양이었다. 대번에 이렇게 냉소적으로 말하는 걸 보니.
게다가 다이스가 이미 로자벨라의 근황을 여러 방법으로 전해 듣고 있는 걸 알고 있었구나.
"그······ 지난번에 문전박대를 하셨다고······."
나는 이틀 전 만난 다이스가 하늘이 무너진 듯 좌절하며 내게 말했던 내용을 떠올렸다.
솔직히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 놀랐었다. 우아한 귀족 영애의 표본과도 같은 로자벨라가 약혼자를 가차 없이 문전박대하다니. 그것도 황손인 다이스를.
"네, 얼굴을 보기 싫더라고요."
그녀는 깔끔하게 인정했다. 그런 로자벨라를 보고 나는 등 뒤에서 식은땀이 삐질 나는 것을 느꼈다.
그, 그동안 미처 몰랐는데 이 언니, 화나니까 좀 무섭네. 생각보다 칼 같은 구석이 있고······ 앞으로 나도 화나게 만들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물론 로자벨라가 다이스에게 화가 난 이유는 백번 이해하고도 남았다. 나는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애당초 상의도 없이 약혼 발표를 하는 게 말이 되나요? 물론 약혼 수락을 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말이 지금 당장 공공연하게 그 사실을 밝히자는 의미는 아니잖아요."
"물론 그건 그렇죠. 로자벨라 양이 다이스 전하께 서운하실 만해요."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약혼 같은 건 하지 말 걸 그랬어요. 알고 보니 제멋대로에, 아이 같은 면도 있고. 물론 그런 점이 순수해 보이기도 하지만······."
로자벨라는 그 후 다이스에 대한 불만인지 칭찬인지 아리송한 말들을 좀 더 늘어놓았다. 나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다가 이윽고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좋아하시죠?"
다이스에 대해 투덜거리는 로자벨라의 얼굴은 불행해 보이지 않았다.
지난가을, 앞으로 시작될 자신의 결혼 생활에 대해 말하며 어렴풋한 허탈감 같은 것을 드러내던 때와는 달리.
그리고 유진과 자신의 사이에 신뢰와 존중 외에는 아무런 사적인 감정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무미건조하게 말했던 것과는 상반되게도, 지금의 그녀는 다이스를 향해 꽤 다채로운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로자벨라는 내 말에 잠시 동안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주에 걸린 것 같아요."
그리고 이내 작은 한숨을 내쉬며 읊조렸다.
"동화책에서 보면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축복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묘사하지만, 제가 생각했을 때 그건 저주예요."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상대방의 단점인 것이 분명한 부분들까지 모조리 장점으로 탈바꿈한 것처럼 느껴질 리가 있느냐는 말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로자벨라 역시 찡그린 얼굴로 어딘가 허무하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그녀의 그런 얼굴은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내 눈에는 지금의 그녀가 훨씬 좋아 보였다.
"아마 다른 사람이 내게 이런 무례한 짓을 했으면······ 그건 최소 10년은 얼굴을 보지 않을 만한 일이죠."
다이스의 한결같은 순정이 로자벨라를 이렇게 만든 것일까?
조금 전 로자벨라를 처음 보았을 때, 그녀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전보다 편안해졌다고 느껴진 이유를 어쩐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나는 얼마 안 가서 너무 쉽게 그 사람을 용서해 주고 말 테니까. 그러니 지금은 어디 한 번 속 좀 끓여 보라고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