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
그 오빠들을 조심해 97화
그리고 그녀의 예상대로 유진은 지금 마주하고 있는 하리의 눈동자를 통해 지금껏 그 안에 숨겨져 있던 것들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눈을 마주할 때마다 가끔 헷갈렸어."
아······ 마침내 드러나 보인 그 연약한 마음이 이토록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어쩌면 내 마음대로 합리화하고 착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어. 하지만 역시 아니야."
유진은 참지 못해 그 반짝이는 잔상을 쫓아 손을 뻗었다.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인 거야. 그렇지?"
밤공기에 흩뿌려지는 속삭임에 벅찬 희열과도 같은 뜨거움이 어렸다.
"나 혼자만 널 볼 때마다 이렇게 지독하게 애끓는 마음이 들고, 나 혼자만 네 생각을 할 때면 이렇게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게 아닌 거야."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의 일방적인 마음이 아니고, 지금 눈앞에 있는 그녀 역시도 그를 원하고 있다고.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는 눈빛이, 작게 벌어진 입술 틈으로 내뱉어지는 가쁜 숨결이, 그리고 그의 손안에서 느껴지는 애처로운 떨림이 전해 주고 있었다.
"그럼 말해줘."
그 모든 것이 자신으로 인한 것이라는 사실에 어떤 의미로는 황홀할 정도였다.
"내가 착각하는 게 아니라고, 너도 나와 같다고 말해."
유진은 마주한 사람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탐욕스럽게 요구했다.
당장에라도 울 것처럼 흐려진 눈동자가 애처로웠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이런 건 생각해 본 적 없어."
마침내 가냘픈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흘러들었다.
"그냥······ 동생으로 있으려고 했어.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말할 생각도 없었어. 모든 걸 다 알고 만약 오빠가 더 이상 나를 볼 수 없다고 하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런데 같은 마음이라고? 나 혼자만 가지고 있던 마음이 아니라고?"
파르라니 떨리는 입술에서 새어 나온 말이 몹시 달면서도 썼다.
유진은 어쩌면 그들의 마음이 동일하다 해도 하리가 그를 거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에 두려움이 없을 리 만무했으니.
물론 설령 그렇다 해도 그녀를 놔준다는 것은 그의 선택지에 없었다.
"하리, 나는 매일 너한테 애원하고 싶었어."
그리고 그녀라면, 매달리는 그를 버리지 못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제발 나를 봐 달라고. 그리고 내 옆에 있어 달라고."
비겁하다고, 치사하다고 욕하려면 얼마든지 해도 좋았다. 이 이상으로 얼마든지 나쁜 사람이 되어도 괜찮았다.
"그리고 제발······."
그렇게 해서 그녀가 그의 곁에 있어 준다면.
"나를 사랑해 달라고."
그 순간 하리는 훅 숨을 들이마셨다. 거듭 귓가에 고이는 갈구하는 듯한 속삭임에 어쩐지 눈앞이 아득해졌다.
"늘 그렇게 네게 말하고 싶었어."
지금 이 상황이 지극히 비현실적이었다.
유진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혼란과 불안 속에 잠식되어 가고 있었는데, 지금은 다른 감정으로 가슴이 꽉 차서 당장에라도 터질 것 같았다.
그녀에게 '사랑해 달라'고 말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에게, 사랑해 달라고······.
"······내가 좋아?"
하리는 떨리는 입술을 열어 아직까지도 그녀의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사람을 향해 물었다.
"네가 아니면 안 돼."
유진은 그녀를 기다리게 하지 않고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답했다. 마치 세상에 존재하는 답이 오직 그것 하나뿐이라는 것처럼.
"날 사랑해?"
유진의 얼굴이 창밖에서 새어 드는 빛에 물들어 있었다. 고요한 공기 속에 오직 그의 목소리만이 선명히 다가들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세상 누구보다 사랑해."
유진은 맞잡은 손에 얼굴을 묻었다. 처음으로 소리 내 말한 진심에 목이 멨다. 우스울 정도로 흔해 빠진 상투적인 고백이었다.
하지만 한심하게도 다른 멋들어진 말 같은 건 조금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 널 사랑해."
그저 제 감정에 취해, 또 지금 마주한 사람을 향한 이 속수무책의 감정에 집어 삼켜져 몇 번이나 같은 말을 속삭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사랑하고 있어."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그 말이 마법이라도 된 것처럼 이 순간 눈앞에 있는 사람을 향한 마음이 점점 더 깊어지는 것 같았다.
"하리."
이미 이보다 더 원하고 갈망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멍청한 착각이었다. 이 감정에는 끝이 없다는 것을 바보같이 모르고 있었다.
"나는 아마도 지금 네게 이 말을 하기 위해 오늘까지 살아왔던 것 같아."
사랑에 빠진 남자의 얼빠진 몽상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아마도 그는 오늘 그녀에게 이 말을 전하기 위해 지금껏 그 기나긴 시간을 달려왔던 것이라고, 진심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그의 손에서 빠져나간 온기가 곧이어 그의 뺨 위를 맴돌았다. 그 따스함에 이끌려 유진은 고개를 들었다.
"나를 사랑한다고······?"
자그마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서 아른거렸다.
방금 전 그가 했던 말을 되뇌듯 소리 내 읊조리는 것일 뿐, 다시금 확인하려 묻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설령 그렇다 해도 그는 몇 번이고 다시 말해줄 수 있었지만.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어?"
"아니."
유진은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감싼 그녀의 손을 덮었다.
"내 옆에 있어."
맞닿은 곳을 통해 전해져 오는 온기가 그를 충만하게 했다.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이 손을 앞으로도 계속 붙잡을 수만 있다면, 그리고 이 사람을 계속 품에 안을 수만 있다면, 그가 가진 다른 무엇이든 기꺼이 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네가 싫다고 해도 놔주지 않을 거야."
이대로 세상이 멈춘다 해도 행복할 것이 분명했다. 이대로 지옥에 떨어져도 좋았다. 그곳이 어디라 해도 분명 지금의 그에게는 낙원이 될 테니.
하리는 은은한 빛무리가 어린 눈동자로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가냘픈 숨소리가 정적 속에 부서졌다.
곧 보드라운 손길이 유진의 손에서 벗어나 그의 이마와 뺨 언저리를 느리게 스치다가······.
이윽고 먼저 다가와 그의 목을 감쌌다. 달큼한 향기가 어지럽게 밀려들었다.
유진은 천천히 팔을 올려 그의 품에 안긴 사람을 마주 끌어안았다. 등을 바싹 잡아당기고 머리카락 사이에 얼굴을 묻자 한결 더 짙어진 향기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밀착한 몸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 뛰는 소리가 울렸다.
"그래······ 놓지 마."
귓가에 번지는 자그마한 목소리가 꿈결처럼 아득했다. 어쩌면 이것은 이미 그의 꿈속인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영원히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
귓가에 울리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날 놓지 마."
시야에 번지는 빛과 어둠의 경계 속에서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 동안이나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게 오직 단둘뿐인 것처럼.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던 밤이었다.
28. 사랑, 저주 혹은 축복
"어서 오세요, 하리 양."
"오랜만이네요, 렐리아."
간만에 찾은 퀸 아라벨라의 의상실에서 나는 주인인 마담 렐리아와 인사했다.
"오늘은 혼자 방문해 주셨네요."
"네, 루이제는 다른 약속이 있어서요."
"다른 공자님을 뵌 지도 오래된 것 같아요."
그녀가 호호 웃으며 덧붙인 말에 나는 약간 애매하게 웃었다.
"하긴 원래 숙녀분들의 의상실에 함께 방문하는 남성분들이 굉장히 드물긴 하죠. 에른스트의 공자님들은 여러모로 특별하신 것 같아요."
'특별'이 아니라 '특이'하다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닙니까?
그녀의 말처럼 카벨과 에리히가 몇 번인가 의상실에 따라왔던 적이 있었다.
물론 그때마다 지루함을 감추지 못하고 몸을 배배 꼬거나 혼이 빠져나간 얼굴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럴 거면 뭐하러 굳이 의상실까지 나를 따라오는지 궁금했으나 그들은 내가 납득할 만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아니, 물론 카벨은 지난 생에도 직접 내 웨딩드레스를 골라 줬던 전적이 있지만 말이지.
나는 혼자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안쪽으로 마련된 방으로 향했다.
"아, 벨론티아 양. 지금 돌아가시나요?"
그리고 막 방 안에서 나오던 사람과 마주치고 말았다. 함께 걷던 마담 렐리아가 눈앞에 있는 사람을 향해 웃으며 다가갔다.
오랜만에 만나는 로자벨라 벨론티아였다.
그녀도 나를 본 직후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다이스와의 약혼 발표 이후 한동안 저택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오늘은 오랜만에 외출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예전 같으면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내게 다가오거나 인사를 건넸을 로자벨라가 지금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는 그녀가 그러는 이유를 어쩐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먼저 웃으며 로자벨라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로자벨라 양, 오랜만에 뵙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역시 예상대로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자 로자벨라의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지극히 작은 차이였지만 나는 그녀의 분위기가 방금 전보다 덜 딱딱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리, 반가워요. 염려해 주신 덕분에 저는 잘 지냈답니다."
세간에는 역시 우려하던 소문을 속닥거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유진과 파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약혼 발표를 한 황손 다이스와 로자벨라를 둘러싼 소문이었다.
그것을 의식해서인지 로자벨라는 내가 그녀를 전과 다른 태도로 대할까 봐 염려했던 것 같았다.
"늦었지만 약혼 축하드려요. 다이스 전하께는 일전에 만나 뵙고 말씀드렸지만 로자벨라 양께도 직접 축하드린다고 전하고 싶었어요."
"고마워요, 하리."
"다음에 언제 한 번 따로 이야기 나눌 기회가 되면 좋겠네요."
"저도 바라는 일이에요. 다음에 벨론티아로 양을 초대할게요."
사실 지난번 황성에서의 만남 이후 처음 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다시 만나면 어색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괜한 기우였던 듯했다.
로자벨라와 나는 웃는 얼굴로 짧은 대화를 나눈 뒤 나중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
"다음 주 중에 로자벨라 양하고 만나기로 했어."
내 말에 유진의 시선이 나한테 미끄러졌다. 그의 눈동자에 담긴 무언의 질문에 나는 대답해 주었다.
"지난번에 방문했던 의상실에서 만났거든."
"그런 말 안 했잖아."
유진의 눈매가 슬쩍 찌푸려졌다.
딱히 반대하거나 하는 느낌은 아니었고, 유진은 그냥 나에 대해 자신이 모르는 일이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장난스럽게 웃었다.
"에단이 없을 때의 일이라 몰랐지?"
"역시 휴일 같은 거, 주는 게 아니었어."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혼잣말이 진짜 영락없는 악덕 고용주 같았다.
평소 에단이 내 일상을 유진에게 보고하는 것쯤은 나도 얼추 알고 있었다.
그것이 감시의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도 알기 때문에 지금까지 나도 묵인했던 일이기도 했다.
어쨌든, 다음에는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로자벨라와 전과 변함없는 모습을 보이게 되면 더 좋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