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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오빠들을 조심해!-96화 (96/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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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오빠들을 조심해 96화

아, 그제야 가슴속에 충족감이 들어찼다.

역시 가만히 보고만 있는 거로는 부족했다. 이렇게 직접 마주한 사람을 손으로 만지고 입을 맞추자 이제야 숨통이 트이며 살 것 같았다.

오랫동안 참아왔던 욕망을 지금 터뜨리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 분명해서 유진은 아쉬운 대로 이것으로 만족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얼어붙어 있는 하리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녀는 설마 그가 또 이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것 같았다. 심지어 지금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지난번처럼 단둘만 있던 테라스도 아닌 탁 트인 1층의 현관이었다.

"보고 싶었어."

나직하게 속삭이는 말에 눈앞에 있는 보라색 눈동자에 서서히 물살이 일었다. 잘게 떨리는 그 움직임이 가련하면서도 사랑스러웠다.

그녀의 동요가 그로 인한 것이라는 사실마저 기꺼웠다.

"그새 많이 아물었구나. 꽤 아팠을 것 같은데."

어쩌면 하리는 이대로 자신이 모르는 척하면 그 역시도 며칠 전 밤에 있었던 일을 없던 것으로 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만약 그런 걸 기대했다면 미안한 일이었다.

사실 유진이 하리를 며칠 동안 내버려 둔 것은 실로 이기적이고도 나쁜 생각 때문이었다.

그녀가 하루 종일 그의 생각만 했으면 좋겠다고 바랐기 때문에.

간밤에 있던 일을 몇 번이고 되새기고 또 되새겨서, 그때 보인 그의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었던 것인지, 또다시 만나게 될 그의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인지, 그리고 앞으로의 그들의 관계가 어떻게 변하게 될 것인지 수없이 고민하고 혼란스러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리의 머릿속이 오직 그 한 사람으로만 꽉 차 있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입안이 달았다.

"황궁에 가기 전에 네 얼굴을 보러 잠시 들른 거야. 지금 바로 다시 나가 봐야 돼."

그리고 지금 하리의 얼굴을 보니 유진의 바람대로 며칠 동안 그녀의 안은 온통 그 혼자만이 독차지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 사실이 그렇게 만족스러울 수가 없었다.

유진은 여전히 굳어 있는 하리의 손을 붙잡아 올렸다. 그리고 그득한 애정을 담아 그 위에 입을 맞추었다.

"그럼 다녀올게. 기다리고 있어."

생각 같아서는 이대로 그녀를 끌어안은 채 시간이 멈추어버리면 좋을 것 같았다.

***

"제 생각에는 이번 일에 공작님이 개입하신 것 같은데, 맞습니까?"

황궁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로웬그린이 눈을 가늘게 좁히며 유진을 향해 물었다.

"얼마 전부터 황손 전하와 꽤 자주 만나시지 않았습니까? 벨론티아에도 전보다 방문이 잦으셨지요? 그 후에 돌연 파혼하시더니, 또 이번에는 벨론티아 양과 황손 전하의 약혼 발표까지."

유진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로웬그린은 다음 순간 시야에 들어온 그의 얼굴을 보고 그것이 긍정의 의미임을 깨달았다.

사실상 개입이라기보다는 주도라고 하는 편이 맞았다. 그는 하리에게 약혼녀였던 로자벨라 벨론티아까지 신경 쓰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며칠 전 밤에도 하리는 그의 앞에서 로자벨라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 것을 보니 역시 그의 판단은 옳았던 것으로 생각되었다.

게다가 그는 정혼자를 따로 둔 채로 하리를 음지에 숨겨 놓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유진은 구태여 그런 것들을 로웬그린에게 설명하지는 않았다.

"혹시 하리 아가씨 때문입니까?"

한편 전부터 설마 하던 로웬그린은 마침내 오래된 의심을 입 밖으로 꺼냈다.

지금 라수스에서 돌아오자마자 황궁 대신 에른스트의 저택으로 향한 것도 그렇고, 또 안으로 들어갔다 나온 유진이 묘하게 말랑말랑한(물론 이런 말을 유진이 들으면 대번에 섬뜩한 눈빛을 보일 것이 분명했지만)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것도 영 미심쩍었다.

물론 로웬그린의 의심은 비단 오늘 일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하면?"

놀랍게도 유진은 굳이 숨길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조심스러운 질문이 무색하게도 무심한 어투의 반문이 돌아왔다. 그 말을 듣고 로웬그린은 경악해 입을 벌렸다.

"맙소사. 아니, 물론 평소에 아가씨를 대하는 태도가 어디를 봐도 수상쩍기는 했지만······."

혼자서 그냥 의심만 하고 있는 것과 그 의심을 본인에게 직접 확인받는 것은 또 달랐다.

하지만 로웬그린이 혼자서 어버버거리든 말든 내버려 둔 채로 유진은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마차의 문을 열었다.

"시간 없어. 나중에 들어줄 테니까 지금은 일단 따라와."

"아니, 어차피 그렇게 급할 것도 없잖습니까?"

"하리가 기다려."

다시 한번 어버버거리는 로웬그린을 뒤로한 채로 유진은 알현장을 향해 앞서 걸음을 옮겼다.

사실 시찰 보고라고 해봤자 그다지 중요한 사안은 없어서 이야기는 금방 끝맺어졌다.

"에른스트 공!"

황제를 알현하고 나오는 길에 유진은 다이스를 만났다.

그는 유진을 보고 잘 만났다는 듯이 '로자벨라가 약혼 발표를 서두른 것 때문에 화가 났는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따위를 그에게 논의하며 울상을 지었다.

아마도 유진이 로자벨라의 전 약혼자이기 때문에 그녀의 화를 풀 방도를 알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유진이 그런 하잘것없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듣자 하니 오늘 하리를 궁에 부른 이유도 이런 시시한 일을 상의하기 위해서였던 듯했다.

비록 사적인 감정 없이 이루어진 약혼이기는 하나 전 약혼자였던 유진에게 이런 것을 묻다니, 속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그만큼 그를 믿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들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해 지금의 관계가 되는 데 일조한 것이 유진이기 때문에 의지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물론 어느 쪽이든 그에게는 시답잖을 뿐이었다.

유진은 알아서 해결하라는 말을 던진 뒤 홀연히 궁을 빠져나왔다.

그가 관심을 두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두 사람의 약혼 전까지의 과정이었으므로 그 이후의 일이야 어찌 되든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다이스는 그의 반응을 퍽 매몰차다고 느끼는 듯 섭섭함을 표했지만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약혼녀와의 일쯤은 혼자 알아서 해결하는 것이 옳았다.

그리고 유진은 다시 에른스트로 향했다. 이번에는 귀찮은 짐인 로웬그린을 떨군 채였다.

어둠에 삼켜진 그의 눈동자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난 나흘간의 시간 동안 유진 역시 마음이 마냥 편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는 그날 밤의 일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지난 일을 상기하는 유진의 얼굴에 언뜻 깨진 유리 조각 같은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래. 후회라니, 당치도 않았다.

그는 그때처럼 배부른 만족감에 도취했던 적이 없었다. 원하는 것을 처음으로 제 마음껏 욕심내 탐하고 또 탐하는 동안 이제껏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던 가슴속의 빈자리가 빠른 속도로 충족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조금 성급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은 지금도 들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무리였다. 이 이상 참는다면 아마도 그는 숨이 막혀 죽을 것이 분명했다.

잠시 후 유진은 에른스트의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마침내 다시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하리가 그를 향해 소리 죽인 음성으로 물었다.

그녀는 아마도 유진이 떠났을 때부터 그랬던 듯, 방 안에 불조차 켜지 않은 상태로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래도 창밖에서 새어 드는 불빛에 실내가 완전히 어둡지는 않았다.

유진은 문가에 서서 은은한 빛으로 물든 하리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내 걸음을 옮겨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을 열어 방금 전의 물음에 답해 주었다.

"네 안이 온통 나로 꽉 찼으면 좋겠다는 생각."

물론 그것은 하리가 원하던 대답이 아닌 듯했지만, 그녀에게 새로운 충격을 안겨 준 것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오빠는······ 그날 취했었잖아?"

잠시 동안 말이 없던 그녀의 입에서 이윽고 억눌린 음성이 새어 나왔다.

"유감스럽게도 취할 정도로 마셨던 기억은 없어."

그러니까 아마도 하리는 지난밤의 그가 술에 취해 그런 짓을 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진심으로 그렇게 여긴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뿐인지는 몰라도.

"없었던 일로 하고 싶은 게 아니었어?"

재차 이어진 소리 죽인 음성을 듣고 유진은 후 웃었다.

"그럴 리가 있나."

그 밤의 일을 없었던 것으로 지우다니.

"내가 원했던 게 이건데."

설령 그날 밤이 몇 번이나 되풀이된다 해도 그는 같은 일을 계속해서 반복할 것이 분명했다.

이제 그는 자신의 마음을 감추지 않기로 했다.

유진은 여전히 하리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값진 것만 주고 싶었다.

진부한 말로, 그녀가 원한다면 하늘에 있는 별이라도 따다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가 상처 입지 않도록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원하는 게 있으면 가져도 된다고 네가 허락해 줬잖아.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뭐든 해도 된다고 했지."

하지만 세상 사람 누구에게나 결코 양보할 수 없는 한 가지쯤은 있는 법이 아니던가. 유감스럽게도 유진에게는 그것이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너를 갖기로 했어."

알고 있다. 그녀가 욕심내도 좋다고 말하며 상상했던 것이 무엇이든, 아마도 지금 같은 상황은 아닐 것이었다.

"하리."

그래도 유진은 포기할 수 없었다. 이제는 정말이지, 어쩔 수가 없었다.

"고개 들어."

하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흔들리는 눈으로 잠시 동안 그를 올려다보다가 시선을 피하려는 것처럼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래서 유진은 하리가 앉아 있는 의자 앞에 무릎을 굽혀 몸을 낮추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가감 없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안 돼, 싫어."

시선이 마주하는 순간, 하리의 표정이 허물어졌다.

그녀는 정면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피해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곧 다가온 유진의 손이 떨리는 그녀의 손을 붙잡아 뗐다.

이번에는 피할 틈조차 없었기 때문에 하리는 자신의 얼굴을 그에게 고스란히 드러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온전히 담아내고 있었다. 그 안에 작게 어린 빛이 꼭 부서진 별 조각 같았다. 맹목적인 애정이 깃든 눈빛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지난번과 비슷한 예감이 들었다. 조금 더 이 눈을 마주하면, 모조리 파헤쳐지고 말 거야.

"그······ 렇게 보지 마."

하리는 저도 모르게 거의 애원하듯이 속삭이고 말았다. 무방비한 상태로 뒤집어쓴 감정의 홍수에 그녀는 휘청이고 있었다.

"내가 널 어떻게 보고 있는데?"

여전히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로 유진이 조용히 물었다.

"세상에 나밖에 없는 것처럼. 그렇게 나만 보인다는 듯이······."

정면에서 부딪쳐 오는 눈빛에 숨이 막혔다. 유진이 그녀를 이런 눈으로 쳐다볼 때면 세상에 오직 그와 자신 단둘만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당신이 그런 눈으로 나를 볼 때면, 숨을 잘 못 쉬겠어."

시간이 멈추고 몸이 결박당한 것처럼 피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었다. 그저 자신의 안을 속속들이 내보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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