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그 오빠들을 조심해 95화
따끔거리는 가슴에 알 수 없는 먹먹함이 밀려들었다. 방금 전 하리와 카벨 형의 앞에서 자신이 이상한 말을 하지는 않았던가?
원래 성격이 모난 탓인지 가끔 생각보다 더 모진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와 스스로도 깜짝 놀랄 때도 있었다.
'그렇게 미운 소리 하지 말라고 했지?'
그럴 때마다 하리는 그를 향해 혀를 차며 말했다.
'그래 놓고 너도 매번 후회하잖아.'
아까 식당에서 자신이 싫어졌느냐고 묻는 하리 때문에 덜컥 말문이 막혔던 것이 떠올랐다.
"멍청이."
싫어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오히려 나는 그 반대라서 지금 이렇게 죽을 것 같은데.
"······좋아해."
에리히는 여전히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로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내뱉어 본 적 없는 소리를 토해 냈다.
"네가 좋아."
아마 앞으로도 이 말을 그녀의 앞에서 소리 내 말할 일은 없을 것이다.
오기가 들어 너를 응원해 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그는 그녀의 행복을 바라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형의 행복 역시도.
"이리 와, 페니."
"멍!"
침대 밑으로 손을 뻗자 여전히 그의 주변을 맴돌고 있던 강아지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민 손을 타고 위로 올라왔다.
에리히는 페니를 끌어안고 눈꺼풀을 내렸다. 품을 파고드는 따끈따끈한 체온이 꼭 그를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아직 그는 완전한 어른이 아니었기 때문에 괜찮아지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릴 것이었다. 에리히는 두 눈을 감은 채 그 날이 서둘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26. 보고 싶었어
"약혼을 진심으로 감축드립니다, 전하."
얼굴을 보자마자 건넨 축사에 다이스가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화났어?"
"제가 왜 화가 나나요?"
"음, 만약 나라면 친구의 약혼 소식을 뒤늦게 알게 된 게 조금 서운할 것 같아서. 게다가 알다시피 내 약혼 상대자는 로자벨라잖아."
다이스는 거기까지 말한 뒤 애매한 미소를 얼굴에 그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자신 때문에 당황했을 것이란 사실을 예상하긴 했던 모양이었다. 그랬으면서 이날 이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니.
"약혼 발표가 갑작스러워서 놀라긴 했지만 화가 날 이유는 없죠."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게다가 솔직한 말로 지금은 내 문제로 머릿속이 꽉 차서 다이스와 로자벨라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내 반응을 본 다이스가 갑자기 의자를 당겨 탁자에 상체를 붙였다. 나는 방금 전보다 가까워진 다이스 때문에 흠칫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것쯤이야 아무려면 어떠냐는 듯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을 뿐이었다.
"실은 그 약혼 발표 때문에 로자벨라가 나한테 좀 화가 났어. 그래서 양에게 오늘 만나자고 청한 것이기도 하고."
"로자벨라 양이 화가 나다니, 어째서요?"
설마 다이스 혼자서 이 약혼을 감행한 거라던가······ 하는 건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약혼은 황실의 중차대한 일인 데다 로자벨라의 의사도 있어야 할 것이므로, 그 정도로 막 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사랑에 눈이 멀어도 그렇지.
역시 다이스는 그렇게까지 경우를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잇따른 그의 말에 나는 로자벨라가 화를 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약혼 시기 때문에. 원래는 겨울이나 내년 초쯤 발표하려고 했는데 그냥 내가 지금으로 밀어붙인 거거든."
과연 그렇게 된 거였구나.
사실 유진과 로자벨라가 파혼한 것이 불과 지난 계절의 일인데 그 후의 약혼 발표가 너무 빨라 당황스럽기는 했었다. 이렇게 되면 벨론티아에서 황손과의 약혼을 위해 일부러 유진과 파혼한 것이라 불미스러운 소문이 날 수도 있는 일이고.
"전하께서 잘못하셨네요. 왜 그러셨어요?"
"그야, 내 거라고 빨리 자랑하고 싶어서."
그리고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이어진 다이스의 대답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 사람, 철이 없는 거야, 아니면 그 정도로 로자벨라가 좋아서 견디지를 못 하겠는 거야? 평소의 모습을 보면 아마 후자인 것 같은데······ 게다가 지금 자기 스스로도 잘못한 걸 알고 있는 눈치고.
"이제 어떡하지?"
"뭘 어떡해요?"
"양은 같은 여자니까 알 것 아니야. 로자벨라의 화를 풀어주려면 어떻게 해야 해?"
"몰라요. 알아서 하세요."
"로자벨라가 며칠째 날 만나 주지도 않는다고!"
나는 절망적으로 외치는 다이스를 외면하며 찻잔을 기울였다.
지금 내 코가 석 자인데 누가 누굴 돕는다는 말인가. 나도 모르게 무심코 한숨이 새어 나오려고 해서 숨을 들이마셨다.
지금의 다이스와 로자벨라를 보면 어쨌든 간에 두 사람은 서로 마음이 통해 연인이 된 것이 확실해 보였다. 그러니 이른 약혼 발표 때문에 로자벨라가 화가 났다 해도 아마 그녀의 마음은 곧 풀어지지 않을까 싶었다.
그보다는 내가 문제인데.
나는 여전히 귓가에 울리는 다이스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자꾸만 바싹 마르는 입술을 찻물로 축였다. 긴장이 되어서 그런지 손바닥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것 같았다.
어느덧 나흘간의 시간이 지나 유진이 돌아올 날이 되었다.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기껏 저택을 나서 다이스를 만나러 왔지만, 여전히 내 정신은 오늘 만나게 될 유진에게 향해 있었다.
째깍, 째깍.
시계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유독 선명하게 귀를 파고들었다.
유진이 없는 며칠 내내 그랬듯이 잠시 후에 있을 일을 상상하며 나는 눈을 감았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는 것이 어쩐지 무섭게 느껴졌다.
***
해 질 무렵 유진이 돌아왔다. 나는 1층 로비에 서서 저택 안으로 들어서는 그를 맞았다.
"어서 와, 오빠."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유진의 걸음이 멈추었다.
며칠 만에 보는 그의 모습에 기다렸다는 듯이 심장이 덜컹거렸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평소와 같은 태도를 보이며 마주한 얼굴을 살폈다.
나는 이어질 유진의 반응에 온 감각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 없는 얼굴과 고요한 눈빛에서는 며칠 전 밤의 흔적을 엿볼 수 없었다. 물끄러미 나를 응시하는 시선에 나도 모르게 손가락 끝을 움찔 떨었다.
유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그런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녀왔어."
짤막한 대답이 더없이 여상했다.
동요 한 점 드러나 보이지 않는 얼굴을 보니, 마치 나흘 전 밤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를 향한 그의 눈빛이나 표정, 또 말투가 지극히 담담해서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무언의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내가 없는 동안 잘 지냈어?"
유진이 이어서 내게 담담한 음성으로 지난 시간 동안의 안부를 물었기 때문에.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아, 그래······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 밤의 일은 이대로 없었던 일이 된 거구나.
"응, 별다른 일은 없었어."
그렇다면 나도 그 일이 있기 전처럼 유진을 대하면 되었다.
"에리히는 주말에 잠깐 왔다가 다시 학술원으로 돌아갔고, 나는 오늘 황손 전하를 뵙고 오는 길이야."
"그가 먼저 너를 보자고 했어?"
"응, 그런데 특별한 얘기를 한 건 아니고 그냥······."
하지만 아무리 괜찮은 척해도 정말 괜찮지는 못 했던 모양이다. 태연한 모습으로 말을 잇는 데 애쓰느라 유진이 나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것도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나는 어느덧 다가온 손이 내 고개를 들어 올리고 나서야 가까이 다가온 유진의 존재를 깨달았다.
그래서 뒤이어 그의 입술이 내 입술 위에 겹쳐지는 순간에도 미처 아무런 반응도 내보이지 못했다. 눌러 찍듯 포개졌던 온기가 잠시 후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흔들림 없는 검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작게 벌어진 내 입술에서 얕은 숨이 뱉어져 나왔다.
"보고 싶었어."
눈앞이 어지러워질 정도로 단 음성이 귀에서 맴돌았다.
유진이 나를 내려다보며 조금 전 자신이 입을 맞췄던 내 입술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그런 그의 태도가 마치 연인을 대하는 듯했다.
"그새 많이 아물었구나. 꽤 아팠을 것 같은데."
나는······ 지금의 상황에 머릿속이 다시금 새하얗게 되어서 그저 숨을 죽인 채 마주한 얼굴을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목이 졸린 것처럼 단 한 마디도 입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
"황궁에 가기 전에 네 얼굴을 보러 잠시 들른 거야. 지금 바로 다시 나가봐야 돼."
유진이 그런 내 손을 붙잡아 당겼다.
나는 유진에게 붙들린 내 손등에 그의 입술이 내려앉는 것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바라보았다. 다시금 정면에서 눈이 마주쳤다. 유진이 내 손등에 입술을 묻은 채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럼 다녀올게. 기다리고 있어."
나는 그가 또다시 나를 남기고 떠난 후에도 한참 동안이나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27. 그 남자와 그 여자
"어서 와, 오빠."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여느 때와 같은 가느다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유진은 자신을 마중 나온 하리를 보며 걸음을 멈추었다.
이렇게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나흘 전의 밤 이후로 처음이었다. 바로 다음 날 유진은 새벽녘부터 저택을 떠나 오늘에야 다시 그녀의 앞에 섰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눈앞에 있는 사람을 느리게 훑고 지나갔다.
하리는 며칠 전의 일이 꿈이나 환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그를 대하고 있었다. 마치 그들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를 대하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그렇게 하면 정말 그날 밤의 일이 없던 것이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유진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잠시 동안 말없이 마주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여름인데도 하리는 목을 가리는 옷을 입고 있었다.
아마도 그 안에는 얼마 전 그가 제 욕심을 참지 못해 남긴 흔적이 새겨져 있을 것이었다. 지금 그녀의 입술 위에 자리 잡은 작은 상처 자국처럼.
계속된 침묵에 하얀 손이 살며시 치맛자락을 쥐었다. 그것을 보고 유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녀왔어."
저렇게 긴장하고 있으면서도 애써 태연한 낯으로 그의 앞에 선 것이 제법 대견했다. 그래서 일단은 그녀가 바라는 대로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내가 없는 동안 잘 지냈어?"
그의 여상한 물음에 하리는 잠시 멈칫하다가 대답했다.
"응, 별다른 일은 없었어."
마치 그동안 몇 번이나 연습했던 것처럼 그녀의 대답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에리히는 주말에 잠깐 왔다가 다시 학술원으로 돌아갔고, 나는 오늘 황손 전하를 뵙고 오는 길이야."
"그가 먼저 너를 보자고 했어?"
하지만 하리의 신경은 다른 곳으로 쏠려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유진이 주위에 있던 사용인들에게 눈짓을 보내 물러나게 한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응, 그런데 특별한 얘기를 한 건 아니고 그냥······."
"그래."
그는 성큼 걸음을 옮겨 하리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유진이 아주 가까이 접근하고 나서야 그의 존재를 알아차린 듯했다.
다음 순간 유진은 하리의 턱을 들어 올려 시야에 들어온 붉은 입술에 그대로 키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