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그 오빠들을 조심해 94화
그 후에도 하리는 마치 자신이 누나라도 된 것처럼 '이제 그만 굶고 밥을 먹어라', '방에 틀어박혀 있는 건 그만하고 밖으로 좀 나와라', '언제까지 계속 그러고 있을 거냐' 같은 걱정 섞인 잔소리를 하며 그의 방을 들락거렸다.
"꺼지라고 했잖아!"
그게 또 마음에 들지 않아서 에리히는 그녀에게 더욱 날카롭게 굴었다.
동갑인 주제에, 마치 어린애를 달래듯 그에게 인형을 주고 간 것도 짜증이 났다. 그래서 몇 번인가 하리가 보는 앞에서 그녀가 주고 간 토끼 인형을 내던졌다.
그래도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어보면 그 인형은 항상 그의 침대 옆에 놓여 있었다.
언젠가부터 에리히는 밤마다 그 인형을 안고 자게 되었다.
"낮잠 잘래?"
에리히가 밤을 새운 지 이틀째, 점심 무렵 방으로 들어온 하리가 제법 심각한 얼굴로 그에게 권했다.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한 것이 설마 티 나는 걸까?
"필요 없어. 안 졸려."
하지만 에리히는 고집을 부렸다.
"하리 아가씨, 멤마 부인이 오셨습니다."
하리는 그에게 재차 권하려는 듯했지만 곧 가정교사가 왔다는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 방을 나섰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녀는 에리히를 걱정하는 기색이었다.
혼자 남은 에리히는 미간을 구겼다. 아무래도 그가 수면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쓸데없이 눈치만 빨라서는.
그리고 그날 밤, 에리히에게 한계가 찾아왔다.
역시 사흘이나 밤을 새우는 것은 무리인 것 같았다. 하지만 또다시 넋을 놓고 잠들었다가 다음 날 아침 섬뜩함을 느끼며 깨어나 몸을 살피기는 싫었다.
그런데 자꾸만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잠이 들 것 같아서 에리히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방 안을 서성이다가 문을 열었다. 오랜만에 놀이방에나 가서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런 그의 뒤로 페니가 따라붙었다.
"같이 갈 거야?"
페니는 그렇다고 대답하듯 꼬리를 흔들었다. 에리히는 몸을 굽혀 페니를 안아 들고 방을 나섰다.
그런데 조금 걷다 보니 숨이 차기 시작했다. 페니를 안고 있는 팔도 저릿했다.
그동안 그가 약해진 걸까, 아니면 그새 페니가 자란 걸까?
왜인지 자신이 약해진 게 맞는 것 같아서 에리히는 얼굴을 구겼다. 요즘 들어 틈만 나면 그에게 산책하러 가라고 잔소리를 하던 하리가 떠올랐다.
결국 그는 무릎을 굽혀 페니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사흘째 잠을 자지 않은 탓인지 현기증마저 이는 것 같았다. 에리히는 복도에 쭈그리고 앉아 페니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때,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피로 때문에 에리히의 인지 능력은 평소보다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그래서 그는 외부의 자극에 매우 느리게 반응하여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앞에서 다가오고 있는 하얀 형체를 발견했다.
그것은 하리였다. 그녀는 마치 본의 아니게 늦잠을 자 놓고 제풀에 놀라 방에서 뛰쳐나온 것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에리히를 발견했는지 곧 하리의 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아구, 바보같이 왜 또 넘어졌어?"
그녀는 거의 날 듯이 뛰어 에리히의 앞으로 곧장 다가왔다. 그리고 그를 일으켜 세운 뒤 탁탁 무릎을 털어주었다.
에리히는 졸음이 묻어 있는 하리의 얼굴을 멍청히 내려다보았다.
도대체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기분 탓일까? 왠지 하리의 행동이 매우 익숙해 보이는 것 같은데······.
바로 그때, 그의 다리를 털어주던 하리의 손이 멈칫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실내용 신을 신고 있는 그의 발에 못 박힌 것 같았다. 왜인지 그녀는 그가 맨발이 아니라는 사실에 당황한 것 같았다.
"어······."
다음 순간, 하리가 고개를 들었다.
허공에서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는 깜짝 놀란 듯 펄쩍 뛰며 뒷걸음질 쳤다.
그에게 먼저 서슴없이 다가올 때는 언제고, 이제 그녀는 경계심이 가득한 눈동자로 그를 보고 있었다.
"아, 안녕?"
당황한 얼굴의 하리가 곧이어 그를 향해 더듬거리며 인사말을 날렸다. 에리히는 그런 그녀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 뭐야?"
옆에서는 페니가 하리를 향해 반갑게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에리히의 서늘한 음성에 하리가 어색하게 대답했다.
"나는, 음, 잠이 안 와서 나왔지?"
에리히는 마주한 눈동자에 미처 감추지 못한 물살이 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넌 왜 이 시간에 방에서 나왔는데?"
하리는 퍽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그에게 되물었다.
에리히의 머릿속에서는 천천히 퍼즐이 맞춰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와 마찬가지로 동요를 숨기고 무덤덤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도 잠이 안 와서."
"그렇구나. 우유 데워 줄까?"
평소라면 '내가 애야?'라거나, '필요 없으니까 너나 먹어'라는 소리를 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에리히는 하리의 말에 아무런 말 없이 그저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자러 갈 거야."
가까스로 그렇게 말한 후 뒤돌아섰다.
"잘 자, 에리히."
등 뒤에서 작게 울리는 그 목소리가 어쩐지 낯설지 않았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와서 에리히는 그대로 문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페니가 그런 그에게 다가와 무릎을 감싸고 있는 손을 핥았다.
속에서 마구 들썩이는 이 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영문을 알 수 없게도 눈에서 눈물이 비집고 나오려 했다.
몹시 비참하고 굴욕적인 기분이 드는데, 그와 상반된 안도감이 함께 밀려드는 것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더 이상은 혼자서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일까?
이제껏 그가 가장 두려워했던 시간 동안 사실은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에 안심이 되면서도 자신의 가장 들키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본 사람이 하필이면 하리라는 사실에 씻을 수 없는 수치심이 들었다.
결국 에리히는 복잡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그날 밤 조금 울고 말았다.
그리고 그 후 지쳐서 기절하듯이 잠들었다.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날 이후에는 이상하게도 밤에 잠드는 것이 무섭지 않았다.
***
"정말이지, 유진도 누구를 닮아서 그렇게 고집이 센지 모르겠구나. 그냥 얌전히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될 텐데. 그렇게 앞뒤가 꽉 막힌 건 오빠를 닮았다니까."
여느 때처럼 레놀드 부인은 에리히를 옆에 두고 험담을 늘어놓았다.
"에리히, 너는 착한 아이니까 네 형처럼 되지 말렴. 유진도 그렇고 카벨도 그렇고, 네가 보고 배울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애들이야. 넌 그저 이 고모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된단다. 알겠지?"
에리히는 그녀의 말을 듣는지 아닌지 모를 표정 없는 얼굴로 페니를 쓰다듬고 있었다. 아마 평소라면 레놀드 부인이 무슨 말을 하든 아무런 반응도 내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고모."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에리히는 허공을 보고 있던 눈길을 움직여 레놀드 부인을 응시했다.
"저한테 우리 가족 욕하는 거 이제 그만해요."
그녀는 망부석 같던 에리히가 처음으로 먼저 입을 연 것에 놀란 듯했다. 그리고 곧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에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머, 에리히. 무슨 소리니? 내가 언제 너한테 네 가족 욕을 했다고······."
"고모 말처럼 저는 반벙어리지 반귀머거리가 아니잖아요."
그것은 며칠 전 레놀드 부인이 에른스트를 떠나기 전 하리와 그의 앞에서 내뱉었던 말이었다. 그녀는 설마 에리히가 그런 말을 할 줄 몰랐는지, 두 눈을 크게 부릅뜨고 있었다.
하기야 그동안 자폐증 증상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무반응으로만 일관하던 그였으니, 의외의 상황에 놀랐을 만도 했다.
에리히는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자신의 고모를 응시하고 있었다.
"제가 가만히 듣고만 있으니까 진짜 바보라도 된 것 같아요? 고모가 그렇게 나한테 형들 욕을 하면, 제가 세뇌라도 당해서 고모랑 똑같이 생각하게 될 것 같아요?"
"에, 에리히."
"그것도 아니면, 고모가 뭘 원하고 나한테 이렇게 달라붙는지 제가 정말 모를 것 같아요?"
그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서늘하고 조용했다.
"착각하지 마세요. 고모가 뭘 어떻게 해도 내가 형들보다 고모를 더 좋아하게 될 일은 없으니까."
레놀드 부인은 그런 에리히를 할 말을 잃은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하리한테도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 그만둬요."
에리히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덧붙인 뒤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눈에는 그 애보다 고모가 더 품위 없어 보여."
***
"그 애, 울었어."
하리가 카벨의 팔을 붙잡고 와 같이 식당에서 밥을 먹자고 했던 날, 에리히는 곧장 집무실에 있던 유진을 찾아가 말했다.
유진은 에리히가 방금 전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 대번에 눈치챈 듯했다. 그가 굳은 얼굴로 다시 한번 동생을 향해 되물었다.
"울어?"
"혼자 밥 먹기 싫대."
물론 진짜 그런 이유로 운 건 아니겠지만.
그리고 사실 울었다고 하기에도 어폐가 있었다. 하리의 눈에서는 눈물 한 방울 떨어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너희들이 밉다'는 말을 남긴 후 뒤돌아설 때 그 자색의 눈동자에 매달려 있던 건 분명 눈물이었을 터였다. 그 후 에리히도 카벨도 놀라서 한동안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카벨은 한껏 당황해서 우왕좌왕하더니 하리의 방으로 찾아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그 앞을 서성였다. 아마 지금도 어쩔 줄 몰라 하며 문 앞에서 머리를 싸매고 있을 것이었다.
"고모가 뭐라고 한 것 같아."
에리히는 책상 위에 올려진 유진의 손에 감정을 억누르듯 힘이 강하게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형, 뭔가 하려고 그러지?"
에리히는 예전부터 스스로조차 다소 영악하다 생각할 정도로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그래서 유진이 무언가 준비 중인 일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미안해."
그의 큰형은 굳어진 얼굴로 하지 않아도 될 사과를 했다.
"너희들이 이런 식으로 무언가를 참게 하려던 게 아니었어."
유진은 그들이 지금의 상황에 이르게 된 것에 적지 않은 자책감을 느끼는 듯했다. 그것이 그의 잘못도, 그의 책임도 아니었음에도.
나중에 생각해 보면 그 당시의 유진은 참으로 어린 나이였다. 아직 덜 성숙한 몸으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아이다운 치기를 드러내며 슬슬 한 번쯤 어른인 척해 볼 나이.
하지만 유진은 에리히에게 있어 언제까지나 따라잡을 수 없을 것처럼 한없이 크게만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그런 느낌은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에리히가 누구보다 존경하고 또 애정하는 사람. 그리고 그런 형이기 때문에······.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에리히는 침대에 드러누워 얼굴을 감쌌다. 그를 따라 들어온 페니가 발밑에서 짖었지만 지금만큼은 다른 데 신경 쓸 수가 없었다.
그가 좋아하는 여자아이는, 낯설 정도로 어른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형의 방에서 그의 옷을 끌어안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하지만 사실 그런 의문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이 감정의 정확한 시작 지점을 알 수 없는 것은 그 역시도 마찬가지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