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
그 오빠들을 조심해 93화
내가 입을 열자 쌀쌀맞은 음성이 되돌아왔다.
그래도 대답해 주는구나. 나는 평소라면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을 그 사실에 안심했다.
"나도 줘."
자리에 조용히 서 있던 내가 내뱉은 말에 에리히의 눈길이 다시금 내 쪽으로 미끄러졌다. 당연히 허락해 주지 않을 걸 알았기 때문에 대답을 듣기 전에 먼저 자리에 멈추었던 걸음을 뗐다.
"넌 눈치도 없어? 난 너랑 같이 술 마시고 싶은 기분 아니거든."
내가 옆에 자리를 잡자 생각했던 대로 싸늘한 거부의 말이 귓전에 울렸다. 나는 그것을 못 들은 척하고 앞에 놓인 술병을 집어 들었다. 거침없이 손을 움직여 병째로 술을 마시는 나를 보고 에리히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입을 벌렸다.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 지독히도 썼다. 나는 다시 술병을 내려놓고 숨을 크게 한 번 들이마셨다가 내쉰 뒤 에리히를 향해 물었다.
"이제 내가 싫어졌어?"
지금 막 마신 독한 술 때문인지 목소리가 조금 잠긴 것처럼 흘러나왔다. 내 말을 듣자마자 에리히가 입을 딱 다물었다. 딱딱한 시선이 내 얼굴에 잠시 동안 못 박혔다.
하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고 내 손에 들린 병을 빼앗아서 방금 전 내가 그랬듯이 목구멍으로 술을 콸콸 들이부었다.
"너, 짜증 나."
잠시 후 에리히가 입가를 훔치며 냉랭하게 읊조렸다.
"그렇게 눈치 보지 마. 내가 언제 네가 싫어졌다 그랬어?"
그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래도 그의 말을 듣는 동안 나는 마음속의 불안감이 서서히 덜어지는 것을 느꼈다.
"나한테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은 필요한 거잖아. 지금 나더러 널 아무렇지 않게 대하라고 하면 그게 더 너무한 거야."
나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말에 마음이 놓였다. 설령 그것이 그의 온전한 진심이 아니라고 해도, 나를 배려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내가 품은 이 마음을 다른 누구도 아닌 세 형제에게 비난받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피가 차게 식는 것 같았다.
"그리고 네가 뭐 그렇게까지 죽을죄라도 지었냐?"
하지만 에리히는 마치 그런 내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해주었다.
"그냥······ 좋아하는 것뿐이잖아. 그게 뭐가 그렇게 큰 잘못인데?"
그의 손이 얼굴을 덮고 있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귓가에 흘러드는 음성이 아까의 나처럼 잠겨 있었다. 물론 잠시 후 다시금 고개를 들고 나를 보는 에리히의 얼굴에는 그런 기색이 조금도 엿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에게 위로받았다고 느껴졌다.
"그러니까 그딴 얼굴 집어치워. 넌 그나마 바보 같이 웃을 때가 더 나으니까."
옆에 있던 페니가 끙끙거리며 에리히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렇다고 내가 널 응원한다는 건 아니야. 착각하지 마."
그의 얼굴이 달빛에 하얗게 빛났다. 나는 그의 시선을 한동안 말없이 받아 내다가 이내 손을 들어 눈가를 문질렀다. 그리고 가까스로 작게 소리 내 속삭였다.
"······고마워."
그렇게 잠시 동안 우리는 어둠 속에서 침묵을 공유했다. 어느덧 식당으로 들어온 누군가가 불을 켜서 우리를 발견할 때까지.
"헉! 야, 너희 지금 뭐 해!"
환해진 시야로 카벨의 모습이 비쳤다. 그는 밤늦게 출출해 식당을 찾았다가 우리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듯했다. 경기를 일으키듯 펄쩍 뛰던 그의 시선이 곧 에리히와 나 사이에 놓인 술병에 못 박혔다.
"너희들! 둘 다 딱 걸렸······."
"마침 잘 왔네."
"그래, 이리 와서 앉아."
카벨이 우리에게 삿대질하며 외치는 순간, 에리히와 내가 그를 불렀다.
"엥?"
카벨은 자신을 반기는 우리의 모습에 엉거주춤 손가락을 내렸다.
찔려서 변명을 하거나 그의 눈치를 볼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가까이 오라고 부르기까지 하는 우리가 이해되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도 어쨌거나 말을 잘 듣는 둘째 진상이어서, 그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우리를 향해 어기적거리며 걸어왔다.
에리히와 나는 어벙한 얼굴을 하고 있는 카벨을 옆에 앉히고 그의 손에 술병을 들려 주었다.
"보호자랑 같이 마시면 합법이잖아? 이제 형도 공범이야."
"역시 카벨 오빠야. 어쩜 이렇게 필요할 때마다 딱 나타나? 자, 오빠도 이리 와서 한잔해."
어차피 이제 18살이었기 때문에 에리히와 내가 술을 마신 것이 딱히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미 파티장 같은 곳에서 알코올이 들어간 음료를 마시는 정도는 우리 나이에 보편적인 일이었다.
단지 우리 같은 경우에는 유진과 카벨이 워낙 엄해서 그렇지. 하지만 유진이라면 또 몰라도 카벨 정도는 얼마든지 구워삶을 수 있었다.
"이, 이러면 안 되는데."
"안 되긴 뭐가 안 돼? 믿을 만한 보호자가 같이 있으면 괜찮아."
"맞아, 카벨 오빠만큼 믿음과 신뢰가 넘치는 보호자가 또 어디 있어?"
에리히와 내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맞장구를 치자 카벨이 표정이 슬슬 풀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어느새 우리는 지하 저장고에 있는 술까지 새로 가져와서 셋이서 대작을 하고 있었다.
"있잖아, 남자랑 여자가 술을 먹고 어떤 일을 저질렀는데 그다음 날 한쪽이 말도 없이 어디론가 떠나서 며칠째 아무 연락도 없는 거야. 그게 무슨 의미 같아?"
내가 술기운을 빌어 슬쩍 묻자 카벨이 들고 있던 병을 쾅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외쳤다.
"어, 나 그거 알아! 기사단에서 비슷한 얘기 들었어!"
"넌 그 웃기지도 않은 책들을 한두 개 본 것도 아니면서 그런 거 하나 몰라?"
아까보다 분위기가 많이 풀어진 에리히도 코웃음 치며 말했다.
"보나 마나 튄 거잖아."
"맞아! 그건 그런 거지. '우리 어제 일은 쌍방 실수로 치고 그냥 잊으면 안 되겠니?' 뭐 그런 의미랄까."
카벨도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나는 역시 그런 건가, 하고 생각했다.
"여기 닭튀김 추가! 양념 반 그냥 반으로!"
"도련님들, 아가씨······. 정말 이러시면 안 되는데······."
유진이 없는 틈을 타서 술자리를 깐 우리를 보고 주방장이 울상을 지었다. 아무래도 유진이 돌아온 후의 후폭풍이 두려운 모양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우리만 입 다물면 완전범죄라니까! 그러니까 우리 주방장은 닭이나 더 튀겨 와. 방금 말한 것처럼 반반으로! 그리고 지난번에 만든 무절임 있지? 그거 많이!"
하지만 카벨은 그런 주방장의 등을 팡팡 토닥여 다시 주방으로 들여보냈다.
"자, 마셔, 마셔! 내가 다 책임질게! 난 세계 최고의 보호자니까! 음하하핫!"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둘째 진상은 다른 때보다 조금 더 맛이 가 있었다. 하지만 에리히는 그런 카벨을 오히려 더 띄워 주며 같이 술을 홀짝거렸다. 분명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닐 텐데도, 애써 나를 의연히 대해 주는 에리히에게 고마웠다.
그래서 나도 그와 있었던 일을 카벨의 앞에서 내색하지 않고 웃으며 그들을 대했다. 그래도 역시 찔끔 눈물이 나와서 괜히 옆에 있던 페니를 끌어안아 얼굴을 가려야 했다.
25.5 그 오빠, 에리히
9살의 에리히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그의 부모님이 죽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무렵의 일이었다.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아침이 오면 몸이 언제나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고, 마치 밤중에 침대에서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팔다리가 쑤실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목욕을 하다가 무릎에 멍이 들거나 손바닥이 까져 있는 것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것이 이상해서 몸을 좀 더 자세히 살피자 마치 맨발로 온 집 안을 쏘다니기라도 한 것처럼 까만 발바닥이 눈에 띄었다.
그렇게 이상한 점을 하나씩 발견할 때마다 뒷덜미가 쭈뼛 곤두설 정도로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자 겁이 나서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다.
부모님이 죽고 에리히는 지극히 폐쇄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다. 큰 형이라면 부모님 대신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었지만, 유진은 갑작스러운 승계 이후 바빠져 저택에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어느 날인가에는 아예 잠을 자지 않고 버텨 보았다.
하루는 꽤 참을 만했다. 평소에도 언제나 피곤한 낯을 하고 있던 그였기 때문에 누구도 그가 밤을 새운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니, 관심 자체를 두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맞았다.
"에리히, 너······."
다만 하리만이 방에서 아침밥을 먹는 그를 찾아와 기웃거렸다. 에리히는 눈앞에서 얼쩡거리는 여자애를 향해 쌀쌀맞은 시선을 던졌다.
"뭐야?"
"아니, 어제 잘 잤어?"
그 순간 에리히의 눈빛이 약간 날카로워졌지만 애써 동요 어린 마음을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평소랑 똑같아. 그런 걸 왜 물어?"
"몸 상태 좋으면 페니랑 같이 산책하러 가지 않을래? 너 너무 방에만 있는 것 같아서."
잇따라 나온 대답이 꽤 자연스러워서, 에리히는 그냥 자신이 예민하게 반응한 것이라 생각했다.
"산책은 페니랑 둘이 갈 거야."
"그래! 밥 먹고 꼭 나가야 돼. 꼭이야?"
자신의 말에 반색하는 그 얼굴을 보다가 에리히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상한 여자애. 그가 허구한 날 방에만 처박혀 있든, 잠을 잘 자든 못 자든, 밥을 잘 챙겨 먹든 아니든 자기가 무슨 상관이라고.
부모님이 죽고 나서 그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이제 저택 안에 거의 없다시피 했다. 물론 형들이 있긴 했지만 유진은 바빴고, 카벨은 자기 마음을 추스르기에도 벅차 보였다. 그나마 집사인 휴버트가 유진의 명을 받아 그를 돌봐주었지만, 결국은 그래 봤자 남이었다.
에리히는 매일 저택에 방문하는 레놀드 부인에게 마음을 의지하기 시작했다. 과연 한 핏줄이기 때문인지 그녀의 얼굴은 아버지와 조금 닮은 구석이 있었다.
그녀가 안아줄 때면 어머니에게 안긴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불안정하던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곤 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임시적인 위안이 될 뿐, 정말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그녀에게 의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리는 에리히에게 있어 상당히 어중간한 위치에 존재해 있었다.
에른스트의 울타리 안에 있지만 온전한 가족이 아니었고, 또 그렇다 해서 완전한 남이라 하기에는 같이 지낸 세월만큼 나름대로 정이 들어 있었다.
장례식날 그녀는 부모님의 관 앞에 서서도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레놀드 부인은 틈만 나면 에리히의 앞에서 그런 하리를 욕했다.
하지만 에리히는 다른 사람들이 말하듯 정말 그녀가 슬프지 않기 때문에 울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쩐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그 사실이 퍽 분했다. 실상 그 자리에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엉엉 소리 내 울고 만 것은 에리히 혼자뿐이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대신하던 큰형도, 늘 그와 티격태격하며 유치하게 다투곤 하던 하리도 결국은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눈물 한 방울 떨구지 않았다.
어른스러운 두 사람 사이에서 마치 그 혼자만 어린애가 된 것 같아 몹시 분한 마음이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