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
그 오빠들을 조심해 92화
"말했잖아."
유진이 한숨 섞인 웃음을 흘리며 작게 속삭였다. 달래는 듯한 음성에도 내 심장은 여전히 거세게 뛰고 있었다.
"후회해도 늦었다고."
나는 그런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미처 대답할 새조차 주지 않고 그의 뜨거운 입술이 다시 한번 나를 덮쳤기 때문이다.
달아오른 여름 공기가 지펴진 불길에 열을 더했다.
두 번 다시는 지금까지의 그와 나로 돌아갈 수 없게 된 밤.
머리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별빛이 한없이 아득했다.
25. 미안해, 고마워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한순간 '어젯밤에 있던 일이 꿈이었나?' 하고 생각했다.
저택 안은 아주 조용했고, 발소리를 죽이고 돌아다니는 사용인들의 인기척만이 문밖에서 어렴풋이 느껴졌다.
시계를 보니 오전 11시가 거의 다 되어가고 있었다. 유진과 카벨은 한참 전에 저택을 나서고도 남았을 시간이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안심했다. 밤새 잠을 못 이루다가 동이 틀 무렵에야 가까스로 눈을 붙인 탓에 머리가 조금 아팠다.
"아."
협탁 위에 놓인 컵에 물을 따라 마시다가 갑자기 알싸한 통증이 느껴져서 신음하고 말았다. 손을 올려 아픈 곳을 더듬거리자 입술 위에 선명히 자리 잡고 있는 상처가 만져졌다.
그래, 어제의 일은 꿈이 아니었다. 꿈일 수가 없었다.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새삼스럽게 자각하고 나니 갑자기 머릿속이 터질 것처럼 더욱 혼란스러워지는 듯했다.
그래도 일단 방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기 위해 침대맡에 달린 줄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얼마 기다리지도 않아 금방 하녀가 안으로 들어왔다.
"씻으실 물을 준비하겠습니다."
"응, 고마워."
그렇게 욕조에 몸을 담그고 나와서 옷을 갈아입는데 시중을 들어주던 하녀가 갑자기 멈칫했다. 하지만 그것은 한순간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버렸다. 잠시 후 그녀가 나를 향해 조심스럽게 묻기 전까지는.
"저, 목 부분이 덜 파인 드레스로 다시 준비할까요? 아니면 얇은 스카프나 목걸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아니, 지금 이 옷이 좋아. 그리고 어차피 저택 안에만 있을 건데 다른 장신구는 필요 없어."
"네, 그럼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모아서 가리는 방향으로 해보겠습니다. 피부 위에 분을 살짝 바르면 충분히······."
그 말을 듣고 나니 뭔가 이상해서 나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던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 거울을 확인한 뒤 말문이 막혀서 훅 숨을 들이마시고 말았다. 목덜미에 새겨진 아주 선명한 붉은 자국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냥 드레스를 다시 고르는 게 낫겠어."
나는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하면서 목소리를 쥐어짰다. 그래도 하녀가 이후 별다른 말 없이 내 시중을 들어줘서 다행이었다.
"휴버트."
"하리 아가씨, 일어나셨습니까."
일층으로 내려가자 휴버트와 다른 사용인들이 나를 맞아주었다. 그들은 간밤에 있던 연회 때문에 피곤해 내가 늦잠을 잤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 시간이 되도록 나를 깨우지 않은 것을 보면 유진이나 카벨이 미리 언질을 주었던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약간 망설이다가, 이미 이 저택에 있는 게 나뿐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일단 유진과 카벨에 대해 물었다.
"오빠들은요?"
"카벨 도련님은 기사단으로 출근하셨고, 공작님은 새벽 일찍 라수스로 출발하셨습니다."
뭐? 그의 말을 듣고 나는 당황했다. 그런 나를 보고 휴버트는 한층 더 당황한 눈치였다.
"혹시 모르셨습니까? 공작님께서 오늘부터 나흘간 저택을 비우실 예정입니다만."
알고 보니 유진은 라수스로 시찰을 나가 나흘 후 돌아올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듣지 못했던 일이었기 때문에 당황한 채로 방으로 돌아왔다.
어찌 보면 나로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오늘 당장 그를 보지 않아도 돼 생각할 시간을 벌게 된 셈이었으니까. 하지만 해소되지 않은 의문으로 속이 답답하기도 했다.
있잖아, 어제 그건 무슨 의미였어?
왜 나한테 그런 행동을 했는지 유진에게 묻고 싶었다. 어젯밤 나누었던 대화는 솔직히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너무 경황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간신히 정신을 붙잡고 있는 것이 한계였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어제 유진은 술에 취했었으니까······.
······혹시 실수인가? 그런 건가? 한순간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라거나.
거기까지 생각한 뒤 나는 침대 위에 고이 놓인 베개를 주먹으로 팡팡 내려쳤다.
"아, 뭐야."
어젯밤에 그런······ 그런 짓을 나한테 해놓고 말도 없이 사라지다니.
정작 지금 당장 유진의 얼굴을 본다면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도망갈 게 분명했으면서 나는 괜히 그를 원망했다.
조금 전까지 손으로 때리던 베개를 끌어안고 그대로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유진이 남긴 자국을 가리기 위해 목까지 올라오는 옷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조금 답답했다. 아직까지도 입술이 얼얼하게 아렸다.
이렇게 가만히 누워 있으려니 자꾸만 기억이 어젯밤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유진과 맞닿았던 곳들에 전부 뜨끈하게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어떡하지······."
나는 가만히 누워서 얕게 숨을 내쉬다가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이런 상황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제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을 내릴 수가 없어서 나는 얼굴을 감싸 쥔 채 침대에 몸을 묻었다.
***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형은 파혼하고 약혼녀였던 여자는 황손이랑 약혼 발표라니."
이틀 후 주말, 집으로 돌아온 에리히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읊조렸다. 그는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련의 사태에 의문을 느끼는 기색이었다.
"넌 형한테 뭐 들은 거 없어?"
"그냥, 신경 쓸 것 없다고 하던데."
나는 어색한 태도를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며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 다행히 에리히는 나한테 별다른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집에 오면 얘기 좀 하려고 했는데 결국 만나지도 못 하겠네."
그는 투덜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런 에리히의 등 뒤로 페니가 컹컹 짖으며 따랐다.
"에리히, 난 방에 있을 테니까 네가 페니랑 놀아줘."
"알았어."
나도 그들을 뒤로한 채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복도의 반대쪽에서 걸어오는 하녀와 마주쳤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을 보고 나는 발길을 멈추었다.
"유진 오빠 거야?"
"예, 아가씨."
"이리 줘. 내가 오빠 방에 가져다 놓을게."
"아가씨께 어떻게 그런 일을······."
"괜찮아. 오늘 바빠 보이는데 가서 다른 일을 보도록 해."
망설이던 하녀는 웃으며 재촉하듯 내민 내 손에 결국 들고 있던 것을 건네주었다. 그것은 이틀 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유진이 입고 있던 옷이었다. 하녀가 세탁을 끝내 그의 방으로 가져다 놓으려고 했던 것 같다.
나는 옷걸이에 걸린 옷을 들고 다시 멈추었던 걸음을 뗐다. 유진의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조용한 공기가 나를 맞았다.
문 앞에서 몇 발짝 걸음을 옮기다 말고, 나는 방 한가운데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멈추어 섰다.
당연한 말이지만, 유진의 방에서는 유진의 느낌이 풍겼다. 그 속에서 이틀 전 밤에 유진이 입고 있던 옷까지 품에 안고 있으려니 서서히 마음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유진이 없는 날들이 너무 길었다. 앞으로 이만큼의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게 아득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유진을 만나는 일이 조금 두렵기도 했다.
만약 실수였다고, 미안하다고 말하면 어떡하지. 그것만이라면 차라리 괜찮았다. 그런데 혹시 이틀 전의 일을 그가 후회하고 있어서 더 이상 예전처럼 내 얼굴을 볼 수 없다고 하면, 그래서 나를 피하거나 외면하면······.
"그럴 바에는 차라리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게 나아."
나는 아무도 듣지 않을 말을 혼자서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날 유진이 술에 취해서 실수한 게 맞는 것 같았다. 그럼 차라리 그 일을 잊은 거면 좋겠다. 과음해서 다음 날 아침 일어났을 때 전날의 기억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럼 나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행동할 거야······.
품에 있는 옷을 꽉 끌어안으면서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렇게 하면 유진의 흔적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툭!
바로 그때, 등 뒤에서 어떤 소리가 들렸다.
"너······."
깜짝 놀라 뒤돌아서자 문 앞에 서 있는 에리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손에서 떨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공이 몇 번 카펫 위를 튕기다가 내 앞으로 굴러왔다. 에리히의 옆에 있던 페니가 쫓아와 그것을 입에 물었다.
에리히는 유진의 방에서 그의 옷을 끌어안고 있는 나를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마침내 그가 숨죽인 음성으로 묻는 순간, 나는 그에게 거짓말이 통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마주한 얼굴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 가는 광경이 심장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웃기지 마."
에리히는 나를 향해 차갑게 뇌까린 후 뒤돌아섰다. 나는 그가 내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그저 굳은 채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
"어, 에리히는? 밥 안 먹는대?"
그날 저녁 에리히는 식당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나는 카벨의 물음에 애써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응, 생각이 없나 봐."
카벨은 무슨 밥을 생각으로 먹냐면서 투덜거렸지만 내 귀에는 그의 말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날 저녁 늦은 시각, 나는 혼자 방에 있다가 문득 방문을 긁는 소리를 들었다. 페니인가 싶어서 문으로 다가가는데 갑자기 문고리가 돌아갔다. 열린 문틈으로 페니가 달려들었다.
나는 직접 문을 열고 들어온 페니를 보며 약간 어안이 벙벙하게 입을 열었다.
"역시 그때도 네가 에리히 방을 열고 들어간 게 맞았구나?"
"멍멍!"
그런데 페니는 평소와 달리 내 주변을 돌다가 발목 부근까지 내려온 치맛자락을 물어 당겼다. 나는 의아하게 그 모습을 보다가 결국 페니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방을 나서자 옷자락을 잡아끌던 힘이 사라졌다.
아, 그냥 가는 건가? 하지만 다음 순간 앞에서 뛰어가던 페니가 나보고 따라오라는 듯이 컹컹 짖으며 뒤돌아보았다. 나는 의문을 느끼며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우리가 향한 곳은 불이 꺼진 식당이었다. 창밖에서 새어 드는 은은한 빛을 제외하고는 어둑한 실내였다.
"멍!"
"쉬이. 페니, 조용히 해."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에리히를 발견했다. 그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페니를 상대하다가 이윽고 그 뒤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놀랍게도 에리히의 앞에 있는 건 술병이었다. 본의 아니게 그의 일탈을 목격하게 된 나도 움찔하고, 나한테 혼자 술을 마시는 모습을 들킨 에리히도 움찔했다.
하지만 곧 그는 나를 못 본 셈 치기로 했는지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돌렸다.
"에리히, 너······."
"뭐, 형한테 이르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