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그 오빠들을 조심해 91화
그러니 나는 그의 행복에 내가 속해 있지 않아도 괜찮았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그가 행복해져도 웃을 수 있었다.
예전에 그랬듯, 나는 로자벨라가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유진에게도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말해줄 것이다.
'위선자. 거짓말쟁이.'
그 순간, 라벤더 코르디스가 나를 보며 그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나는 머릿속에 울리는 그 소리를 외면하며 뒤돌아섰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만이 내 유일한 진심이었고,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그것을 인정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
"왜 나와 있어?"
방금 전 어둠 속에서 눈이 마주쳤던 유진이 내 방으로 찾아와 물었다.
"그냥 조금 답답해서. 여기 있으니까 오빠가 탄 마차가 정문에서 들어오는 것부터 다 보이더라."
에른스트의 저택으로 돌아온 직후 나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테라스에 나와 있었다.
유진의 시선이 그런 나를 한 차례 스쳐 지나갔다.
"춥지 않아? 밤이라 공기가 조금 찬 것 같은데."
"여름인데 뭐가 추워."
이번에 맞춘 드레스는 목 부분이 넓게 파여 있어 어깨가 훤히 드러나 보였다.
연회장에서 걸치고 있던 얇은 숄은 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
카벨은 나와 함께 연회에 참석한 후 자신의 방에 들어가 쉬고 있는 중이었다.
유진이 다가오자 평소와 조금 다른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방금 전 만나고 온 사람과 결국 같이 술을 마신 모양이다.
"다이스 전하는 잘 만나 뵙고 왔어?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네."
"애초에 긴히 나눌 얘기도 없었어."
내가 카벨과 함께 연회에 참석한 동안 유진은 다이스의 청을 받아 황궁에 다녀온 참이었다.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아마도 이번 약혼 발표 때문에 유진을 만나고자 한 것이 아닐까 하고 나는 짐작했다.
"싸웠어?"
"그럴 이유가 없잖아."
유진이 내 말에 헛웃음을 흘렸다.
"이미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했는데 안 믿었나 보구나."
나직한 음성이 미지근한 밤공기 속에 퍼져 나갔다. 그리고 이어진 말에 나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난 다이스가 예전부터 로자벨라 벨론티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알고 있었어."
그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유진은 테라스의 난간에 걸터앉으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어쩌면 그게 일방적인 마음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고."
나는 유진이 나와 같은 생각을 했던 것을 알고 잠시 동안 침묵했다.
사실 그것은 나 역시도 그동안 남몰래 의심해 왔던 부분이었다.
다이스를 대하는 로자벨라의 태도가 다른 사람을 상대할 때보다 유하다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의 바보 같은 말에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이 미소를 짓는다거나, 신년제 때 다이스를 걱정해 일부러 그가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긴다거나 하는 점에서도 미심쩍은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지난번에는 다이스의 궁에서 마주친 일도 있었고.
"그래서 파혼한 거야?"
나는 충동적으로 그에게 물었다.
"전에 내가 물었을 때 로자벨라 양을 좋아한다고 했잖아."
내가 머뭇거리며 중얼거린 말에 유진의 시선이 다시 내게로 날아들었다.
연회가 있던 작년 늦가을의 밤, 로자벨라 양을 좋아하냐는 내 물음에 유진은 분명 '그래'라고 대답했었다. 물론 그것이 열렬한 애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쨌건 그는 긍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유진의 파혼과 다이스의 약혼이 계속 마음에 밟혔다.
"좋은 사람이냐 나쁜 사람이냐 하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단 한 번도 그녀를 이성적인 의미로 마음에 품었던 적은 없어."
유진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말은 진심인 것 같았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두 사람의 약혼 소식에 이렇게까지 무심한 모습을 보이기는 어려울 테니까.
"만약 그랬다면 파혼하지 않았겠지. 내가 다이스에게 약혼녀를 양보했다고 생각하다니······."
유진은 어떻게 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지 신기하다는 듯이 가느다란 웃음을 흘렸다.
"넌 여전히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구나."
"그야······."
그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반응했지만 나는 오히려 유진의 그런 점이야말로 참 한결같다고 생각했다.
"오빠는 좋은 사람이 맞으니까."
유진은 잠시 침묵한 채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작게 입술을 벌렸다.
"내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면 그런 말은 못 할 텐데."
그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유진에게 손을 붙잡혀 몇 발짝 더 그에게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그 직후 손가락 사이로 파고드는 온기에 움찔했다. 하지만 유진은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오히려 더욱 단단히 깍지를 끼며 손에 힘을 주었다.
"그동안은 내가 이렇게 욕심이 많은 줄 미처 몰랐는데."
나는 그의 다른 손이 내 얼굴을 느리게 어루만지는 것을 느끼며 몸을 잘게 떨었다.
"너는 이미 나한테 충분히 많은 걸 주고 있는데도 자꾸만 다른 걸 더 빼앗고 싶어져."
또다시 달음박질치기 시작한 가슴을 꾹꾹 잡아 누르고 싶었다.
안 돼, 그러지 마.
제멋대로 나오면 안 돼.
네가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야.
이미 한계까지 가득 차올라서 찰랑이는 마음이 자꾸만 밖으로 흘러넘치려고 했다.
지금의 그와 내 관계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내게 주는 게 아무리 달콤해도, 그것을 다른 의미라 멋대로 오해하면 안 되었다.
나는 그저 그의 외로움을 파고들었을 뿐이니까. 이렇게 유진이 나를 만지는 것도, 단순히 함께 체온을 나눌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니까. 그리고 아마도 그 상대가 꼭 나여야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왜 거부하지 않아?"
문득 낮은 속삭임이 귓가에 울렸다. 유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순식간에 눈높이가 달라졌다. 그것은 분명 느린 움직임이었는데도,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서 달아날 생각 같은 건 할 수 없었다.
"이러면 내가 더한 걸 해도 네가 받아줄 거라고 착각하게 돼."
그와 내 사이에 있는 공기가 한결 더 팽팽해졌다. 나는 뺨을 감싼 손길을 피하고 싶은 마음과 거기에 기대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유진이 고개를 숙여 나와 이마를 맞대자 가까이에서 숨이 뒤섞였다.
"역시 미안해."
그러다 문득 혼잣말 같은 속삭임이 귀를 파고들었다.
"오빠······."
"난 네가 원하는 사람이 되어줄 수 없어."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가 되묻기 전에 다시금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솔직한 마음으로는 그렇게 미안하지도 않아."
깨진 달빛 같은 미소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지척에 있는 그의 검은 눈동자가 밤하늘보다 더 어둑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나한테 틈을 보인 네 잘못이야."
미처 상황을 인식할 틈조차 없었다.
그 말을 끝으로 곧바로 뜨거운 열기가 내 입술을 집어삼켰다. 무의식중에 뒷걸음질 친 내 뒤로 테라스의 난간이 닿았다. 하지만 곧 방금 전보다 더한 힘에 이끌려 몸이 앞으로 당겨졌다. 단단한 팔에 갇혀 훅 숨을 들이마시자 작게 벌어진 내 입술 사이로 불꽃이 파고들었다.
"읍, 아······!"
반사적으로 다문 입술 위로 따끔한 감각이 번졌다. 한순간 비릿한 맛이 느껴져 아랫입술을 깨물린 걸 알았다. 내 작은 신음에 입술을 훑는 움직임이 부드러워졌다.
"무방비하게 다가오는 널 볼 때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넌 모르겠지."
조금 전 내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깨물린 입술에서 느껴지는 통증만이 현실을 일깨워주는 듯했다.
"하고 싶은 건 뭐든 해도 된다니."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고막을 긁어 내렸다. 정면에서 쏟아지는 눈빛은 그 목소리만큼이나 어둡고 위태롭게 빛나고 있었다.
"내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알았다면 그런 겁 없는 말은 하지 못했을 텐데."
얼핏 다정하게까지 느껴지는 속삭임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숨을 헐떡이고 있는 내 입술을 매만지는 손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뒤이은 그의 명령은 그렇지 않았다.
"벌려.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유진과 내 거리가 무척 가까웠기 때문에 그가 한 마디씩 말을 이을 때마다 입술이 스쳤다. 나는 가쁜 숨을 내몰아 쉬며 몸을 떨다가 가까스로 소리 내 그를 불렀다.
"유진 오······."
하지만 유진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여 다시금 내게 입술을 겹쳤다. 상처 난 부위에 일순간 따끔한 느낌이 번지다가, 곧 밀려드는 거대한 자극에 사그라졌다.
참지 못해 흘린 신음도, 미처 숨기지 못한 떨림도 모조리 그에게 집어 삼켜졌다.
맞닿은 입술에서 나는 질척한 소리에 솜털까지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마주한 몸을 밀어내려 했지만 유진은 거대한 벽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허리를 휘감은 팔이 더욱 단단히 조여졌을 뿐이었다. 등줄기가 오싹할 정도로 선명한 자극에 다리가 풀려서 결국 떨리는 손으로 매달리듯이 그의 옷을 붙잡고 말았다.
"오빠, 흐윽, 그만······."
잠시 입술이 떨어지는가 싶다가도 어김없이 전보다 더 집요하게 숨을 갈취당했다. 쉴 새 없이 몰아붙이는 움직임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마치 통째로 그에게 잡아먹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어느덧 밑으로 내려온 그의 숨결이 목덜미 위를 스치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읏."
목에서 느껴지는 간지러운 느낌에 나는 어깨를 크게 떨며 바르작거렸다. 하지만 지금껏 그랬듯 그런 내 행동은 무의미한 시도로 그쳤을 뿐이었다.
"유진······ 아, 윽!"
느리게 등줄기를 훑는 손길에 발끝이 오므라드는 느낌이었다.
그와 맞닿은 곳마다 낯선 감각이 피어올랐다. 열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잠시 후 유진이 내 목에 파묻고 있던 입술을 떼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거리가 아주 가까워서 그의 눈동자에 어려 있는 열기까지 모조리 볼 수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널 울게 할까 봐 무서웠는데······."
유진의 손가락이 눈물 맺힌 내 눈가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기분 탓인지 그 손길조차 진득하게 느껴졌다.
"네가 나 때문에 우는 건 생각보다 괜찮은 기분이네."
나는 말문이 막힌 채로 어둑하게 미소 짓는 유진을 바라보았다. 서서히 얼굴선을 타고 내려와 귀를 스치는 손길에 절로 몸이 떨렸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내게 있어 그 누구보다 익숙한 사람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낯설었다.
"오빠······."
"오빠라니."
이번에는 아린 입술 위로 그의 손가락이 내려앉았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상처를 내려다보던 유진이 다시금 그 위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내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머금으며 마치 상처를 치료해 주려는 것처럼 느리게 핥았다.
"이런 짓을 당하고도 날 오빠라고 부르는 거야?"
정처 없이 흔들리는 내 눈과 더없이 고요한 그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