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그 오빠들을 조심해 89화
솔직히 이렇게 물으면 열이면 아홉 정도는 어울린다고 말해줄 수밖에 없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하리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어울려."
역시 유진은 그녀가 생각한 대로 대답해 주었다. 하지만 곧 이어진 나지막한 음성에 그녀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뭘 해도 예쁘지 않았던 적이 없어, 너는."
정면에서 밀려오는 시선에 미처 그 말의 의미를 파헤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작게 입술을 달싹였지만 그 밖으로 아무런 소리도 새어 나가지 않았다.
빛과 바람과 정적이 반짝이는 그곳에서 두 사람은 다만 서로의 눈을 마주했다.
"하리, 너 여기 있어?! 나 너한테 할 말 있······."
그때, 누군가 벌컥 서재의 문을 열어젖히며 안으로 들이닥쳤다. 요란하게 등장한 사람은 다름 아닌 카벨이었다.
"어? 형도 여기 있었네?"
그는 황궁에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곧장 하리를 찾아왔는지 아직 제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급하게 하리를 찾아?"
유진이 책상에 기대 있던 상체를 일으키며 물었다. 방금 전까지 주위에 맴돌던 묘한 공기는 은은한 자취를 남기며 사라진 뒤였다. 하지만 유진도 하리도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것처럼 태연히 카벨을 대했다.
"아니, 혹시 황궁 올 일 있어도 우리 기사단에는 절대 오지 말라고!"
그 말을 듣고 하리는 의아해졌다. 제2기사단에 자기를 보러 놀러 오라고 떼를 썼던 게 바로 엊그제인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러는 거지?
"왜? 지난번에는 오빠 보러 오라면서."
"안 돼, 안 돼! 우리 기사단에 엄청나게 파렴치한 놈팡이가 있단 말이야! 더러운 거 보면 눈 버려, 안 돼!"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카벨이 치가 떨린다는 듯 흉포한 기운을 흩뿌려서 일단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조금만 기다려! 내가 금방 똥 덩어리들 싹 다 치우고 1급수의 쾌적하고 청정한 환경을 만들어 놓을 테니까!"
"그, 그래······."
또 뭐 때문에 눈이 돌아가서 '오빠만 믿어!'를 피 토하게 외치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유진과 하리는 나란히 의문 어린 눈으로 발광하는 카벨을 바라보았다.
"알았으니까 밖에서 얘기하자. 유진 오빠, 우린 먼저 나갈게."
결국 하리가 카벨을 데리고 서재에서 나갈 의사를 내비쳤다.
"그래. 둘 다 쉬어."
유진은 그런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잠시 후, 방금 전까지 누군가가 있었던 자리에 어느덧 불그스름해진 햇빛이 들어찼다.
시끌벅적했던 주변이 다시금 조용해졌다. 그러나 역시 예전처럼 주위에 깔린 침묵이 무겁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또 하루가 지나간다는 사실이 이제는 더 이상 초조하지도 불안하지도 않았다. 그것이 그에게 있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아마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유진은 붉은 해가 거의 저물어 갈 때까지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더 시간이 흘러 그의 가족들이 이제 그만 저녁 식사를 하자고 그를 부르러 올 때까지.
24. 파혼과 약혼, 그리고 돌이킬 수 없게 된
"하, 참."
나는 황궁 도서관을 나오자마자 탄식했다. 한 시간 내내 원하는 책을 찾아 넓디넓은 도서관 안을 헤맸으나 결국 허탕을 치고 돌아서야만 했기 때문이다. 하, 이렇게 허무할 수가.
내 얼굴에 얇게 깔린 실망감을 포착한 에단이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찾으시는 책이 보이지 않았습니까?"
"그러네요. 황궁 도서관에는 없는 책이 없다고 해서 기대했는데."
"사서에게는 말씀해 보셨는지요?"
"음, 아무래도 직접 물어보기는 좀 그래서."
크흑, 당연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황궁 사서에게 그렇고 그런 책이 있냐고 물어볼 수는 없잖아? 내가 보고 싶은 책은 에리히의 방에서 찾은 것과 비슷한 빨강빨강한 책이었다.
하지만 뭐, 어차피 황궁 도서관에 그런 책이 있다고 해도 실제로 빌릴 생각은 없었다. 왜냐하면 대출 기록이 남을 테니까 말이지. 크흠, 그래서 만약 책이 있으면 살짝만 읽다가 나오려고 했는데.
사실 오늘 황궁 도서관에는 다이스를 만나러 온 김에 겸사겸사 들른 것이었기 때문에 원하는 책이 없다고 해서 꼭 죽을 것처럼 아쉬운 건 아니었다.
그런데 에단이 진지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제목을 말씀해 주시면 제가 어떻게든 구해 오겠습니다."
쿠, 쿨럭. 물론 고맙긴 하지만 그것은 안 될 말씀입니다. 차라리 하녀를 시키거나 내가 혼자 서점에 가서 책을 구하고 말지.
"마음만으로도 고마워요, 에단."
나는 본심을 숨기고 에단을 향해 아하하 웃어 보였다.
"하리?"
그런데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돌린 나는 반가운 사람을 발견했다.
"요한 오빠!"
솜사탕 같은 하늘색 머리카락이 멀리서도 한눈에 띄었다. 어쩐 일로 황궁에 방문한 요하네스였다.
"다이스 전하를 만나 뵙고 오는 길인가 보구나."
"아직은 아니고, 이제 내궁으로 가는 길이야."
그는 나를 보자마자 황궁에 온 목적을 알아차린 듯했다. 하기야 내가 먼저 황궁에 올 만한 이유는 다이스가 거의 유일하기는 하지.
"오빠는 어쩐 일이야?"
"나는 요즘 아버지께 조금씩 업무를 배우고 있어서."
아, 그렇구나.
요하네스도 이제 학술원을 졸업했으니 슬슬 바스티에 백작에게 직접적인 가주의 일을 배울 만도 했다. 물론 아직 본격적인 일선에 들어간 건 아니겠지만 말이다.
사실 유진이 너무 어린 나이에 가문을 이끌게 된 것이지, 원래대로라면 요하네스처럼 차근차근 준비 단계를 밟아가는 것이 정상이었다.
"얼마 전에 코르디스 양을 만났어."
그러다 문득 요하네스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에 나는 한순간 멈칫했다.
"네 안부를 묻기에 적당히 응수해 주긴 했는데, 하리 너도 그 사람하고는 가깝게 지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라벤더 코르디스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기에 요하네스가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걸까?
그는 그녀가 내 안부를 물었다고 했지만······ 그냥 그런 말만 하고 말았다면 요하네스의 반응이 지금 같을 리가 없었다.
"응, 내가 그 사람하고 가까워질 일은 없을 거야. 걱정해 줘서 고마워."
그나저나 요하네스도 알고 있었지······ 에단에 관한 일을. 나는 예전에 에단을 보고 요하네스가 물었던 것을 떠올렸다.
'에단 비숍이라······ 그가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어?'
뭐, 나와 에단의 모습을 본 사람 중 몇 명이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던 것을 생각해 보면 그리 꽁꽁 감추어진 비밀도 아니었던 것 같기는 했다.
사실 나도 위화감을 감지했을 때 무언가를 알아내려 했다면 에단에게서든 유진에게서든 쉽게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좀 더 같이 있고 싶은데 시간이 없을 것 같네."
"으응, 다음에."
요하네스와 정원이라도 함께 걷고 싶었지만 다이스와의 약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그건 무리였다.
"하리, 난 항상 네 편이야. 알고 있지?"
청아한 푸른빛이 시야에 박혔다. 그의 눈빛은 언제나처럼 곧고 맑았다.
"알아. 고마워."
나는 그의 마음이 고마워서 설핏 웃어 보였다. 아마 라벤더 코르디스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요하네스가 그녀와 나 사이의 갈등을 어디까지 아는지는 몰라도 이렇게 내 편을 들어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나중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요하네스는 궁의 정문 쪽으로, 그리고 나는 다이스가 있는 내궁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궁의 안쪽까지 호위 기사를 데려갈 수는 없었기 때문에 다이스의 방으로 향하는 복도는 시종의 안내를 받으며 홀로 걸었다.
그러다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을 발견하고 나는 멈추어 섰다.
"로자벨라 양?"
꿀처럼 반짝이는 금발과 에메랄드 같은 녹색 눈동자. 멀리서도 눈에 띄는 우아한 걸음걸이.
어째서인지 로자벨라 벨론티아가 황손 다이스의 방이 있는 곳에서부터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도 나를 보고는 한순간 멈칫했다.
나는 놀란 기색을 숨기고 그녀에게 물었다.
"다이스 전하를 만나 뵙고 나오시는 길인가요?"
생각해 보면 당황할 일도 아니었다. 내가 다이스에게 초대받아 궁을 방문하는 것처럼 로자벨라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으니까.
"네. 짧은 담소를 나누고 나오는 길이랍니다. 하리는 지금 전하께 가는 중인가 보군요."
다만 내가 알기로 지금껏 다이스는 단 한 번도 먼저 로자벨라를 만나고자 청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조금은 놀라고 만 것이었다.
더군다나 그 이유가 로자벨라에게 품은 다이스의 마음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그럼 이만 실례하겠어요. 다음에 만나요, 하리."
"네, 다음에."
나는 로자벨라와 헤어져 다이스의 방을 향해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런 내 발걸음은 아까와 다름이 없었지만 머릿속에는 이런저런 생각이 지나가고 있었다.
다이스의 방문 앞에 다다라서도 마찬가지였다.
"전하. 하리 에른스트 양이 방문했습니다."
"묻지 말고 그냥 들이라니까."
다이스의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 시종장이 문을 열었다.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트레이를 끌고 나오던 궁인과 마주치게 되었다. 나는 나를 향해 공손히 인사하는 궁인을 지나쳐 가며 트레이에 놓인 접시와 찻잔, 그리고 식기들을 눈으로 훑었다.
방금 전까지 이곳에 손님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듯이 찻잔에 반쯤 담긴 액체에서는 아직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던 다이스가 나를 본 뒤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종장이 참 고지식해. 한두 번도 아니고, 양이 방문하면 곧바로 안으로 들이라고 입이 아프도록 말해도 저렇게 꼬박꼬박 보고를 한단 말이야."
나는 나를 테이블로 인도하는 그를 따라 걸었다. 그리고 다이스와 마주 보고 앉은 뒤 지나가듯 말했다.
"방금 로자벨라 양을 만났어요."
"그래?"
다이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내가 그를 지그시 마주 바라보자 다이스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무릎 위로 손을 올렸다. 그리고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음, 이제부터 나도 양을 한 번 본받아 볼까 하고."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다이스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찜찜해졌다.
아니, 갑자기 그게 뭔 소리랍니까? 나를 본받는다니, 도대체 어떤 점을?
갑자기 불길함이 스멀스멀 밀려들었다. 하지만 그냥 기분 탓이겠지? 그렇겠지······?
"응,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그보다 우리 다른 얘기를 할까?"
다이스가 티 나게 말을 돌렸다. 더 이상 로자벨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마음이 없다는 강력한 의사의 표현이었다.
나는 여전히 찜찜했지만 그가 곧바로 다른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해서 로자벨라에 대한 이야기를 더 묻지 못했다.
아무리 내가 다이스의 말동무이니, 그의 친구이니 하는 소리를 들으며 가끔 건방지게 구는 것이 허락된다고 해도 황손과 일개 영애 사이에는 뚜렷한 경계가 있었다.
그러니 다이스가 지금처럼 딱 잘라 대화를 거부하면 나도 이 이상은 그에게 캐물을 수 없었다.
다이스는 그 후 평소와 똑같은 모습으로 나를 대했지만 내 마음속의 찝찝함은 가실 줄을 몰랐다.
"있잖아."
"네, 전하."
그리고 시간이 지나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돌연 다이스가 나를 불렀다. 그리고 그가 내뱉은 말은 나로서는 영문을 알 수 없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