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그 오빠들을 조심해 88화
그런데 유진이 그들을 한 차례 훑어본 뒤 입 밖으로 꺼낸 말은 천상의 하모니처럼 참으로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하던 것만 마무리하고 퇴근해."
그러자 지금껏 죽상을 하고 있던 이들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희희낙락한 사람들을 뒤로한 채로 유진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날, 유진도 평소보다 일찍 에른스트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하리 아가씨께서는 외출하셨습니다."
저택에 들어서자 휴버트가 하리의 부재를 알려 왔다. 에단을 데리고 루이제 바스티에와 함께 외출했다는 소식에 유진은 고개를 한 번 작게 끄덕여 보인 뒤 계단을 올랐다.
'전부 다 괜찮으니까, 하고 싶은 건 다 해. 갖고 싶은 게 있다면 그게 뭐든 가져도 좋아.'
가끔 그의 머릿속에는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고는 했다.
'좀 더 욕심을 내도 돼. 이제는 당신만을 위해서 살아.'
온 힘을 다해 그를 끌어안던 작은 몸,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던 나긋한 음성, 시야에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던 붉은 그림자, 그 시간의 공기.
'있는 힘껏 행복해져.'
층계를 오르던 유진의 걸음이 문득 멈추었다.
사용인들만이 오가고 있는 저택의 내부에는 오후의 짙은 정적이 고여 있었다. 그 속에서 유진은 복도의 어느 한 곳을 응시했다.
곧 제자리에 멈추어져 있던 그의 걸음이 느리게 움직였다. 그가 향한 곳은 한동안 열린 적이 없던 방문 앞이었다.
달칵.
유진은 눈앞에 있는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비록 주인을 잃은 방이었지만, 그래도 주기적으로 청소하기 때문인지 문고리는 기름칠한 것처럼 부드럽게 돌아갔다.
안으로 한 발짝 몸을 들이자마자 아늑한 분위기가 그를 감쌌다.
'유진.'
웃으며 그를 맞아주는 두 사람의 모습이 일순간 시야에 번졌다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유진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죽은 부모님의 흔적이 곳곳에 밴 방 안의 풍경과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모습을 비교라도 해보듯이.
그러다 문득 그의 검은 눈동자가 한쪽 벽면에 걸린 액자에 고정되었다.
그 안에는 갓 결혼했을 무렵의 젊은 모습을 그린 부모님의 초상화가 있었다. 한 손으로 부인의 어깨를 다정히 붙잡고 있는 전 에른스트 공작의 모습은 지금의 유진과 굉장히 많이 닮아 있었다.
유진은 자신의 나이일 때의 아버지가 어떤 생각과 어떤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살았을지 간혹 궁금해지곤 했다. 그리고 만약 지금 곁에 부모님이 살아 있었다면 지금쯤 자신은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지도.
그러나 그런 가정은 무의미했다. 과거를 바꿀 수 있는 능력 같은 것은 그에게 없었기 때문에.
그러니 지금의 그를 보고 부모님이 어떤 생각을 할지도 상상해 보지 않기로 했다. 좀 더 어렸을 때는 그들에게 칭찬받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누군가에게 인정받기를 기다리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그래도······ 그래도 아마 유진이 아는 부모님이라면 그에게 '잘했다'고 말해주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오늘날까지 혼자 잘해냈다고, 역시 너는 우리 아들이라고.
그리고 그들이 딸로 받아들였던 아이에게 유진이 품은 마음도 비난하지 않으리라.
설령 그것이 죽은 사람은 말이 없기에, 살아남은 사람 혼자서 어떻게든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고 합리화하는 것뿐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는 이런 식으로라도 살아야 했기 때문에.
유진은 다시 발길을 돌려 부모님의 방에서 빠져나왔다. 이번에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향해 답답한 겉옷을 벗어 던지고 목을 조이고 있던 타이를 풀어헤쳤다. 그리고 가벼운 셔츠 차림으로 잠시 창밖에 시선을 두었다.
오늘은 예정에 없이 일찍 귀가했기 때문에 여유 시간이 생겨 버렸다. 그럼 무엇을 할까, 잠깐 생각하다가 유진은 서재로 향했다.
생각해 보면 나이가 들면서부터 서재에 앉아 느긋이 책을 읽어 본 기억이 없었다. 어릴 때는 하루 종일 그 안에 틀어박혀 있을 때도 있었는데.
서재에 들어선 유진은 어릴 때와는 확연히 눈높이가 달라진 책장을 눈으로 훑다가 손에 걸리는 책을 아무것이나 하나 뽑아 들었다. 곧 그의 시선이 서재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책상으로 미끄러졌다.
유진은 걸음을 옮겨 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소년 시절의 그가 그랬던 것처럼 의자를 빼고 그 위에 자리를 잡았다.
오전 시간에 청소하러 들어왔던 사용인이 창문을 열어 놓고 간 모양이다.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그가 아무렇게나 펼쳐 놓은 책이 휘리릭 제 마음대로 종이를 넘겼다.
······한가롭고 나른하고 평화로웠다.
이제는 적응이 될 만도 하건만, 유진은 이럴 때의 에른스트가 아직도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런 느낌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라면 또 모를까.
유진은 몸에 힘을 풀고 책상 위에 상체를 기댔다. 한쪽 팔을 앞으로 뻗고 반쯤 누워서 창가를 바라보자 책상에 드리워져 있던 눈 부신 햇살이 그의 얼굴을 간질였다.
눈꺼풀이 느리게 내려앉았다가, 또 천천히 위로 들어 올려졌다.
누가 뒤쫓아 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다급하게 달려왔던 시간으로부터 어느덧 시일이 많이 지나 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참으로 쉼 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구나 싶었다. 망설이고 고민할 시간조차 없어서 단 한 번도 멈추어 서지도, 주위를 둘러보지도 못했다.
쏴아아.
밖에서 초목의 나뭇잎이 몸을 부대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제외하고는 주위가 아주 조용했다. 마치 다른 세상에 들어온 것처럼 신기하게까지 느껴지는 고요함이었다.
이상한 일이지 않은가? 몇 년 전이나 지금이나 주변이 침묵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똑같은데, 그때와 지금의 적막감은 어째서인지 다르게 느껴졌다.
유진은 평온한 고요 속에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똑똑.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더 흘렀을까. 문득 서재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진이 대답하지 않자 밖에 있던 사람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아······ 자는 건가?"
혼잣말 같은 자그마한 음성이 바람결에 휩쓸려 날아갔다. 유진이 서재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찾아온 것은 외출에서 돌아온 하리였다.
그녀는 문 쪽으로 등을 보인 채 책상에 엎드려 있는 유진을 보고 발소리를 죽였다.
비록 선잠이 든 것 같긴 하지만 지금처럼 유진의 자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워낙에 이런 무방비한 모습 자체를 잘 보이지 않는 유진이었기 때문이다.
하리는 조용히 다가가 눈을 감고 있는 유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햇빛이 따갑지도 않은지 그는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도 역시 햇볕이 좀 강한 것 같아서 커튼을 칠까 하다가 혹여 그 소리에 곤히 잠든 유진이 깰까 싶어서 말았다. 그래도 하리가 그의 앞에 서자 그녀의 그림자가 유진의 얼굴까지 드리워졌다.
그녀는 그때까지도 유진의 손에 들려 있던 책을 살살 빼냈다. 바로 그때, 한순간 그의 손이 움찔한 것 같았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미동이 없는 유진을 보며 하리는 다시 하던 일을 마무리했다. 불편하게 책을 붙잡고 있던 유진의 손이 그제야 편해진 것 같아 그녀는 만족스러워졌다.
그러다 문득 유진이 무슨 책을 읽고 있었는지 궁금해져서 표지에 적힌 제목을 확인했다.
「사유하는 인간, 존재의 이유.」
그 순간 갑자기 눈에서 습기가 느껴졌다.
크흑, 역시 유진이구나. 에리히나 나랑은 읽는 책이 완전히 달라. 카벨은 애초에 독서라는 걸 하지도 않으니 비교 대상에 넣지 말자······ 하, 하지만 저도 얼마든지 이런 책을 볼 수 있다고요? 지금까지는 그냥 흥미가 안 생겨서 안 봤던 것뿐이란 말이야.
하리는 책상 귀퉁이에 걸터앉아 방금 전까지 유진의 손에 들려 있던 책을 펼쳤다.
그 후, 유진의 눈꺼풀이 서서히 들어 올려졌다.
검은 눈동자 안에 앞에 있는 사람의 뒷모습이 담겼다. 크림색 드레스가 햇빛에 물들어 한결 더 짙은 색을 내고 있었다. 창가에서 스미는 햇볕을 정면으로 받고 있는 몸이 하얗게 빛났다.
눈이 부셨다. 언젠가 느꼈던 것처럼.
방 안을 맴도는 바람에 허리까지 내려온 하리의 긴 머리카락이 그의 얼굴을 간질였다.
살랑살랑. 나비처럼 가볍게 날아들었다가 다시금 사뿐히 허리 위로 내려앉는다. 책상 위에 가만히 놓여 있던 유진의 손이 이윽고 그 움직임을 쫓아 느리게 들어 올려졌다.
눈앞에서 흔들리는 은빛의 잔영이 손에 잡힐 듯 말 듯했다.
그녀는 그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무엇이든 욕심내도 된다고 허락해 주었다.
물론 그것은 그의 소망이 무엇인지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된 배려였을 것이다. 그 사실을 유진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 그에게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했으니······ 이제부터는 그도 그럴 셈이었다.
유진의 눈빛이 방금 전보다 한결 더 짙어졌다.
설령 동정이어도, 마지못해 그의 손을 잡아주는 것이라 해도 좋았다. 그래도 떠나지 않고 옆에만 있어 준다면.
쏴아아.
파도처럼 밀려든 바람에 반짝이는 은발이 바로 눈앞으로 날아들었다. 유진의 손이 시야 가득 반짝이는 찬연한 빛을 쫓아 움직였다.
그는 눈 부신 빛이 넘실거리며 흘러나가도록 내버려 두다가 이윽고 그것을 손안에 가득 그러쥐었다.
곧 유진의 입술이 손에 잡힌 머리카락 사이로 파묻혔다. 그의 눈동자에 언뜻 위험하게까지 느껴지는 진득한 갈증이 어렸다.
"어, 일어났어?"
애초에 잠들었던 적도 없었지만, 하리는 이제야 그가 눈을 뜬 것을 깨달았는지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몸을 비스듬히 틀자 그 틈으로 햇빛이 밀려들었다. 유진은 반사적으로 지그시 눈꺼풀을 반쯤 내리며 입을 열었다.
"언제 왔어?"
"지금 막."
기다림의 시간을 지금처럼 직접 말로 하지 않는 것이 그녀의 다정한 점 중 하나였다. 유진은 굳이 그것을 아는 척하지 않고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나른함을 품은 유진의 얼굴 위로 하리의 시선이 떨어졌다. 이렇게 무방비하게 있는 모습을 보니 꼭 소년 시절의 유진으로 돌아간 것 같아서 어쩐지 머리라도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놓고 그녀는 멈칫했다.
하지만 이대로 갑자기 손을 물리는 것도 부자연스러울 것 같고, 또 유진도 딱히 거부하는 느낌이 아니라 다시금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유진은 그녀가 하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 둔 채 마주한 얼굴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오늘 루이제랑 같이 외출했었는데 휴버트한테 얘기 들었어?"
"응."
두 사람 다 지금의 고요함을 깨고 싶지 않은 듯,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이야기했다.
"재미있었어?"
"재미있었어. 참, 거리에 벌써 벚꽃이 피어서 예쁘더라. 우리도 다음에 다 같이 꽃 보러 갈래?"
"그래. 그러자."
나직한 음성이 주위에 부유하는 햇살 위에 고였다.
"아, 이거 오늘 산 건데 어때?"
하리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자신의 머리 위로 손을 올리며 물었다. 그곳에 있는 것은 하얀 진주와 베일로 장식된 꽃 모양의 코르사주였다.
"평소에 내가 좋아하던 머리 장식은 아닌데 봄이라 그런지 눈길이 가서. 어때, 어울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