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그 오빠들을 조심해 87화
에리히가 저택을 떠난 후 방의 대청소가 시작되었다. 그날 청소를 담당한 하녀가 그의 침대 밑에 숨겨져 있던 책을 발견하고 급격히 동공을 흔들었던 것도, 그리고 그 책을 테이블 위에 고이 올려 둔 것도, 하필이면 그 책을 하리가 발견하게 된 것도 에리히는 모두 알지 못했다.
"에리히! 너 내가 가방에 넣어 놨던 거 봤어? 어때, 좋았냐? 그거 좀 화끈했을 텐데?"
다만 개학 후 또다시 그에게 친한 척 엉겨 붙은 제이 킴벌슨의 히죽이는 얼굴을 보고 그제야 잊고 있던 책의 존재를 떠올렸을 뿐이다.
그래서 갑자기 통신석으로 연락해 온 하리의 입에서 그 책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펄쩍 뛸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뭐?! 너 그 책 봤어?!"
에리히는 기겁해서 물었다.
"분명히 말해두는데, 그거 내 거 아니야!"
그리고 통신석 너머에 있는 하리에게 다급히 변명했다. 하지만 변명이 아니라 사실을 밝힌 것이었다. 그는 맹세코, 저런 저질적인 책을 한 글자도 읽은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어진 하리의 반응은 전혀 예상치도 못 한 것이었다.
[아, 그래? 그럼 다른 것도 좀 가져와 봐.]
"뭐? 다른 거?"
[아니, 크흠. 그 책이 꽤 봐줄 만하더라고.]
띠용.
그 순간 에리히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뭐? 그 책이 봐줄 만했다고? 갑자기 제이 킴벌슨이 제 친구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여자애들이 이런 책을 왜 좋아하겠냐? 다 여자들한테 먹히는 부분이 있으니까 이런 책이 불티나게 팔리는 거 아니야?'
이럴 수가, 설마 그 말이 정답이었단 말인가?
아니, 그런데 하리가 그 요망한 제목을 가진 책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자체도 놀라운데, 더군다나 지금 뭐라고?
"너, 너 지금 나한테 그런 책을 구해 오라고 시키는 거야?"
[나도 구하려면 구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 얼굴 팔리잖아. 너희 학술원에서는 어차피 안 보는 애들이 없다며?]
그렇게 말하는 하리의 태도가 몹시 당당해서 에리히는 답지 않게 어버버거리며 거절의 말을 내뱉지 못했다.
"야, 다른 책도 줘 봐."
그리고 다음 날, 그는 제이 킴벌슨을 찾아갔다.
기숙사 방에서 혼자 노닥거리던 그는 에리히를 보고 두 눈을 번쩍 떴다.
"이야, 드디어 너도 눈을 떴구나! 그래, 뭐 줄까? 넌 어떤 타입이 좋아? 섹시한 거? 귀여운 거? 누님계? 방금 다른 애들이 보고 나한테 반납한 것 중에 죽여주는 게 있는데······."
"아, 대충 아무거나 내놔."
에리히는 밀려드는 수치심에 마른세수를 하며 짜증스럽게 뇌까렸다. 하지만 제이 킴벌슨은 에리히가 괜히 민망해서 신경질을 낸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은 군말하지 않고 책상 밑에 숨겨 둔 책들을 척척 꺼내 주었다.
그리고 방문 앞까지 그를 배웅하며 히죽거렸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에리히는 갑자기 회의감이 들어서 책을 들고 망연자실했다. 뭔가 엄청나게 억울한데 그런 감정을 해소할 데가 없었다.
차라리 진짜 이 책을 보는 게 자신이었으면 이렇게 억울하지는 않지!
그리고 그 순간 에리히는 결심했다.
그래, 보자. 차라리 보고 덜 억울해지자. 이깟 책 하나 보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방으로 향하는 에리히의 걸음이 퍽 전투적이었다.
그날 밤 그는 밤새워 도색 서적을 탐독했다. 그리고 하리에 이어 에리히 역시도 새로운 세상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물론 그것은 그 혼자만의 비밀이었다.
***
제2기사단의 연무장에서는 오늘도 신입들이 죽어 나가고 있었다.
원래 새로 작위를 받은 신참들을 통솔하는 것은 부기사단장의 역할이었다. 그런데 이 인간이 뭘 잘못 먹었는지 얼마 전부터 자기 휘하의 기사들을 쥐 잡듯이 잡아 대고 있었다.
"아, 힘들어 죽겠네."
"헉, 허억, 난 근육 터지는 것 같아."
단비 같은 휴식 시간을 맞은 신입 기사들이 연무장에 널브러졌다. 오전부터 계속된 강행군에 모두 초주검이 되어 있었다.
기껏 황실 기사가 되어 이제부터는 눈앞에 꽃길만 펼쳐질 줄 알았더니!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연무장의 흙먼지와 하루하루 찌들어 가는 땀내였다.
"엥? 그렇게 힘들어? 그냥저냥 할 만한데?"
오직 단 한 사람만이 회한에 젖은 기사들을 어리둥절하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바로 학술원 시절 미친개로 이름을 날렸던 카벨 에른스트였다. 심지어 그는 이 땡볕 아래에서의 고된 훈련에도 지치지 않은 듯, 저 혼자 생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소금에 절인 시금치처럼 시들시들한 다른 사람들과는 그야말로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대번에 경악 어린 시선들이 날아가 박혔다.
이 괴물! 이 개고생을 하고도 어떻게 저렇게 멀쩡한 거야?! 역시 학술원 시절 괜히 미친개 소리를 들은 게 아니었어!
다리가 후들거려서 뻗은 기사들과 달리 카벨은 아무렇지도 않게 두 다리로 버티고 서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크으, 물맛 좋다!"
홀로 태평한 그 모습에 기사들은 그냥 카벨을 자신들과 같은 선상에 두고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부단장 요즘 왜 그래? 인간적으로 너무 굴리는 거 아니야?"
"내 말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연애한다고 팔팔 날아다니더니, 요즘은 연애 사업이 잘 안 되나?"
"정답이다, 이놈들아."
"허억!"
그들은 한참 저들끼리 부기사단장의 뒷말을 하다가 소스라쳤다. 등 뒤에서 흘러든 스산한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기껏 휴식 시간을 줬더니만 입만 살아서 노가리를 까고 있어?"
"아닙니다, 부단장님!"
부기사단장은 '이놈들을 어떻게 회 쳐 먹을까' 고민하듯이 눈을 번뜩이다가, 곧 이번만 봐준다는 듯이 혀를 찼다.
"신참들, 예쁜 누나 있으면 미리미리 말해. 뺑뺑이 빼줄 테니까."
차였나? 차였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세상에 연애하는 사람이 자기 혼자인 것처럼 눈꼴 시리게 팔랑거리더니.
기사들은 자기들끼리 눈빛을 주고받으며 수군거리다가 또다시 부기사단장의 살벌한 시선을 받고 찔끔해서 외쳤다.
"전 외동아들입니다."
"형만 셋 있습니다."
"아, 카벨한테 겁나 예쁜 여동생이 있습니다!"
부기사단장과 다른 신입 기사들이 뭐라고 떠들든 신경 쓰지 않고 한가롭게 하품을 하고 있던 카벨이 그 소리에 '커헉!' 돼지 멱따는 소리를 냈다.
곧 그가 눈을 부라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 이 새끼들이? 남의 여동생 가지고 왜 자기들이 유세야? 내 여동생이지 네 여동생이냐?!
하지만 그들은 나중에 따로 면담 시간을 가져야 할지도 모를 카벨보다 당장 눈앞에서 그들을 고문시키는 부기사단장이 더 무서웠던 모양이다. '호오' 소리를 내며 흥미를 나타내는 부기사단장에게 기사들이 병아리 떼가 합창하듯 말했다.
"많이 예쁘냐?"
"설마 부단장님은 한 번도 못 보셨습니까? 에른스트 양은 가끔 황궁에도 오시는데요."
"그래서 진짜 예쁘냐고."
"겁나 예쁩니다, 미친 듯이 예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입니다, 여신님입니다!"
그들은 모두 카벨이 재학 중이던 시절의 학술원이나 황궁, 또 연회장 같은 곳에서 하리 에른스트를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물 만난 고기처럼 신이 나서 한마음 한뜻이 되어 외쳤다.
그러자 카벨의 어깨가 어깨춤을 추듯 꿈틀거렸다. 그는 남모를 뿌듯함을 느끼며 콧김을 내뿜었다.
훗, 자식들. 내 여동생이 예쁜 건 알아서. 하긴 그건 눈이 달렸으면 당연히 알 수밖에 없지만!
"그래? 그럼 카벨은 빼고 너희들은 연무장 오십 바퀴 더 돌아라."
"아, 너무하십니다!"
"시끄러워, 인마. 백 바퀴 돌래?"
부기사단장의 패악이 다시 시작되었다. 연무장 백 바퀴라는 말에 기사들은 피눈물을 머금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명령을 받고 홀로 자리에 남은 카벨에게 부기사단장이 슬그머니 다가갔다.
"네 여동생이 정말 그렇게 예쁘냐?"
"그런데요."
카벨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평소 같으면 말투가 건방지다고 한 소리 했을 부기사단장이 이번만큼은 너그러운 태도를 보였다.
"그럼 어떻게, 다리 좀 서 봐라."
뭐? 다리? 뭔 다리? 설마 지금 내 여동생하고 자기하고······.
깨닫는 순간 카벨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내가 이 나이 먹도록 장가도 못 가고 이러고 있잖냐? 내가 잘되면 너도 좋고 나도 좋고 그런 거 아니겠어?"
이 시꺼먼 노총각 놈이 지금 뭐라는 거야? 감히 지금 내 여동생한테 누구를 가져다 붙여? 확 다리를 동강 분질러 버릴까? 부단장, 혹시 빵 좋아하십니까? 일명 죽빵이라고.
그렇지 않아도 가끔 학술원 때의 습관이 튀어나오려고 해서 난감하던 참이었는데, 이걸 확 그냥, 막 그냥! 아오, 지금까지 상사라서 가끔 개소리를 해도 참고 있었는데 그냥 확 저질러 버려?
크흑, 하지만 하리가 기사단에서 말썽 일으키지 말고 다 같이 사이좋게 잘 지내라고 했는데······.
결국 카벨은 죽빵의 유혹을 참아 내고 자리에서 걸음을 뗐다.
"지금부터 연무장 오십 바퀴를 돌겠습니다."
"응? 내가 빼준다니까?"
"거부합니다아아! 내 여동생이 만 배는 더 아깝다아아아아!"
"저 새끼가······?!"
카벨이 달리며 외치는 소리가 연무장 안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그 후 제 2기사단의 연무장에는 '나 잡아봐라~'를 연상시키는 피의 레이스가 벌어졌다. 부기사단장과 카벨이 그리는 진풍경에 모두 넋을 빼놓고 두 사람을 구경했다.
하지만 괴물 같은 체력을 가진 카벨이 끝끝내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피 터지는 레이스는 부기사단장이 항복 선언을 하는 것으로 끝나야만 했다.
물론 카벨은 그 후 부기사단장에게 하극상을 이유로 다른 기사들보다 배는 더 기합을 받았다. 그리고 그날, 카벨이 이를 갈며 '더러우면 출세하라!'는 말을 마음 깊이 새기고 진정한 하극상의 야망을 품게 된 것은 누구도 모를 일이었다.
그것이 바로 훗날 카벨 에른스트가 최연소 부기사단장의 타이틀을 달게 된 진정한 이유였다.
***
"이야기는 잘 마치셨습니까?"
건물 밖으로 나오는 유진을 발견하고 로웬그린이 다가갔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황손 다이스의 거처 앞이었다. 로웬그린은 앞서 걷는 유진을 뒤쫓으며 호기심 어린 눈빛을 빛냈다.
"황손 전하와 아주 긴밀한 대화를 나누셨나 봅니다."
"궁금한가?"
"궁금하다고 하면 알려 주실 겁니까?"
"그 입이 쓸 만할 정도로 무거워지면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
크흡, 그럼 알려 줄 마음이 없다는 거구나.
로웬그린은 눈물을 머금고 포기했다. 일전에 유진의 약혼녀에 대해 카벨에게 입을 털었던 것을 들켜 얼마나 곤욕을 치렀는지 모른다. 그 후 유진은 로웬그린에 대한 신뢰도를 대폭 변경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억울했다. 이게 다 상관이 잘 되기를 바라는 그의 갸륵한 마음인 것도 모르고!
로웬그린은 앞서 걷는 유진을 야속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물론 유진은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이 앞만 보고 걸을 뿐이었다.
외궁에 도착하니 여느 때처럼 자리에 앉아 코를 박고 일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로웬그린은 마치 앞으로의 자신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아 울컥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