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그 오빠들을 조심해 86화
으악, 에리히! 이 셋째 진상아! 원래 이 나이대의 남자애들치고 침대 밑에 도색 서적 하나 숨겨 놓지 않는 놈 없다더니! 아니,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탁자 위에 이런 발칙한 책을 떡 하니 올려놓는 게 어디 있냐! 당당한 거야, 뻔뻔한 거야?!
"에, 에리히가 두고 간 책인가 봐. 하하, 학술원으로 보내야겠네."
나는 식은땀을 삐질거리며 어색하게 소리 내 웃었다.
물론 에리히는 유진이 이걸 보든 말든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나는 지금 이 상황이 무척 뻘쭘하고 난처했다.
차라리 처음 이걸 보는 순간에 그냥 자연스럽게 반응했으면 또 몰라, 유진의 부름에 나도 모르게 흠칫하며 책을 뒤로 숨겼던 참이라 더욱 그랬다.
그런데 다음 순간 유진이 오히려 나한테 다가오며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그럼 나한테 줘. 어차피 조만간 한번 학술원에 들르려고 했으니까."
뭐, 안 돼! 동생한테 직접 도색 서적을 전해 주러 학교에 가는 유진이라니!
상상하자마자 그림이 영 좋지 않아서 나는 기겁했다.
"오, 오빠가 왜?!"
"왜 그렇게 당황해?"
당연하게도 유진은 내게서 수상함을 감지한 눈치였다. 그의 눈썹이 비대칭을 그리며 슬그머니 치켜 올라갔다.
"이리 줘 봐."
눈을 가늘게 뜬 그가 내 등 뒤에 감춰진 책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앗, 하지만 뺏길 수는 없어! 나는 책을 든 손을 등 뒤로 더 꽁꽁 감추었다.
"뭔데 그래?"
"그, 그냥 책이라니까."
유진은 믿지 않았다. 그가 다시 한번 내 뒤쪽으로 팔을 뻗었다. 하지만 내가 더 빨랐다! 내 손 안에 든 도색 서적을 뜻대로 취하지 못한 유진의 눈매가 슬쩍 찌푸려졌다.
앗, 갑자기 어릴 때 일이 생각났다. 그때는 에른스트 부인이 준 사탕 때문에 실랑이를 했었는데.
그런데 지금 유진하고 이러고 있으려니 갑자기 어릴 때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다소 묘했다.
스윽!
휘익!
"아니, 별거 아니라니까 왜 이렇게 궁금해해?"
"네가 숨기려고 하니까 더 궁금해지잖아."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손에 들고 있는 것을 유진에게 빼앗길 마음은 없었다. 훗,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날쌘 나를 봐! 이게 다 끊임없는 자기 관리 덕분······.
탁!
엥? 갑자기 등 뒤로 벽이 닿았다. 유진의 손을 피하면서 아마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친 모양이다. 그럼 더 이상 피할 데가 없잖아?
"앗."
설상가상으로 손을 유진에게 붙잡혔다. 나는 유진과 벽 사이에 낀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지금 내가 들고 있는 거 뺏어 갈 거야? 그럴 거야?
나는 누가 들으면 헛웃음을 지을 만큼 이상한 기대감을 품고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혹시 어릴 때처럼 내 손에서 책을 빼내 간 뒤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웃을까? 그리고 어쩌면 그 후에는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을 했다며 조금 겸연쩍어할지도 몰라.
아, 나는 그런 유진을 다시 한번 더 보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
유진은 아무 행동도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움직임 없이 자리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머리 위에서부터 떨어지는 깊은 시선에 나도 덩달아 말을 잃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눈을 마주하고 있으려니, 마치 그에게 내 속마음을 속속들이 읽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얼마 전 유진에게 안겼었던 일이 떠오르며 얼굴에 열이 올랐다.
결국 나는 그를 오래 마주 보지 못하고 눈길을 비꼈다.
"그냥······ 일반 책이야. 오빠는 바쁘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
그리고 붙잡힌 손목을 비틀어 빼내자 그 위에 겹쳐 있던 온기가 쉽게 떨어졌다.
"지금 나가 봐야 한다며. 잘 다녀와."
나는 웃는 얼굴로 그를 배웅했다. 유진은 아직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상태였다. 원래는 문 앞까지 그를 배웅 나갈 생각이었지만 그냥 지금 인사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어째서인지 지속되는 유진의 침묵에 혹시 무언가를 들켰나 싶어서 가슴이 불안하게 뛰었다.
"······그래, 다녀올게. 그 책은 네가 알아서 해."
다행히 이번에는 그도 다른 말없이 내게서 물러났다.
나는 뒤돌아 걷는 유진을 보다가 이윽고 그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후우' 깊은숨을 내쉬며 몸에서 힘을 풀었다.
언제부터인가 손이 저릿할 정도로 세게 움켜쥐고 있던 책에 시선이 박혔다.
크윽! 셋째 진상아, 너는 나한테 고마워해야 한다! 내가 너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이렇게 노력했다는 걸 너는 알아야만 해!
「도련님의 아찔하고 위험한 교육.」
으흑, 다시 봐도 제목이 참······ 그나저나 이걸 어쩐다지? 그냥 원래 있던 자리에 둬? 아니면 에리히 대신 침대 밑이나 서랍장 같은 데 숨겨 줄까?
나는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잠깐 고민하다가 그동안 잊고 있던 존재를 떠올리고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페니!"
어느새 방에서 나갔는지 페니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에리히의 책을 손에 들고 또다시 페니를 찾아 길을 나섰다.
***
"와, 대박······."
그날 밤 나는 신세계를 경험했다.
내 손에는 오늘 낮에 에리히의 방에서 가져온 책이 들려 있었다. 그래, 나는 호기심에 이 책을 보고 만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책장까지 다 읽고 나서 책을 덮는 순간 나도 모르게 멍하니 중얼거리고 말았다.
아이, 더워라. 왜 이렇게 뺨이 화끈화끈하지?
그렇구나. 도련님이 그 하녀 양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뭘 가르쳐 줬나 했더니······ 으흠, 흠.
사실 이런 책의 존재 자체를 몰랐던 것은 아니다. 지난 생과 이번 생을 통틀어서 나도 영애들에게 언뜻 이야기를 들어 이런 서적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도색 서적을 읽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이야, 평소에 정숙하고 음전한 모습만 보이던 영애와 귀부인들도 몰래 이런 책을 읽고 있었단 말이지? 우와아.
나는 처음으로 접하게 된 새로운 세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냥 호기심으로 한번 펼쳐 본 건데, 이런 놀라운 이야기가 숨겨져 있었다니.
갑자기 손안에 든 책이 처음과 좀 다르게 보였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내일쯤 책을 한 번 더 읽을 생각으로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슬쩍 쿠션 뒤에 숨겨놓았다.
흠흠, 어차피 에리히는 빨라도 주말에나 집에 올 테니 그때까지만 원래 있던 곳에 돌려놓으면 되겠지, 뭐.
하, 그나저나 덥다.
나는 괜히 손부채질을 하며 요란을 떨다가 잠시 후 슬그머니 쿠션 뒤에서 책을 꺼내 또다시 남몰래 독서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23.5 그 오빠들
에리히는 억울했다.
맹세코 그 책은 그의 것이 아니었고, 심지어 그가 원해서 손에 들어온 것도 아니었다. 그 증거로 에리히는 집에 돌아온 방학 첫날부터 이미 그 책의 존재 자체를 잊고 있었다.
사건의 경위는 이러했다.
"야, 우리 누나한테 재미있는 거 얻었는데 너도 볼래?"
같은 학부에 있던 남학생 한 명이 어느 날 이상한 책 한 권을 가방에서 꺼내 든 것이 그 시발점이었다.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이 바로 대각선 방향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에리히도 어렵지 않게 그 책을 볼 수 있었다.
「요조숙녀 드봐리의 달콤한 계약 연애.」
책 제목을 언뜻 확인한 에리히는 코웃음을 쳤다.
"이게 뭐야, 여자애들이 보는 거잖아?"
"이 멍청아, 이런 거에 남녀 구분이 어디 있냐? 그리고 네가 몰라서 그래. 여자애들이 이런 책을 왜 좋아하겠냐?"
책을 추천받은 남학생이 황당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당당했다.
"다 여자들한테 먹히는 부분이 있으니까 이런 책이 불티나게 팔리는 거 아니야? 그럼 이걸 보면 여자들이 뭘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 이거지."
마치 자신만의 은밀한 비법을 가르쳐 주듯 은근한 음성이었다. 하지만 뒷자리에 앉은 에리히의 귀에는 충분히 들리는 크기였다.
"여기 적힌 대로만 하면 열에 아홉은 다 넘어온대. 우리 형도 약혼녀랑 싸우고 나서 데이트할 때 이거 보고 참고해 봤는데 분위기 좋았다더라고."
그 소리를 들은 남학생은 솔깃한 눈치였다.
중등부에서 고등부로 넘어가면서부터 이런 방면에 관심을 갖는 학생들이 많아진 추세였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지만 에리히는 저렇게까지 여자애들을 꼬시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남자 놈들이 우스웠다.
더군다나 저런 얼토당토않은 방법이라니, 바보 아니야?
그런데 에리히의 헛웃음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문득 앞자리에 앉은 남학생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 혹시 너도 관심 있어? 하나 더 있는데 볼래?"
"치워. 관심 있어서 본 게 아니라 웃겨서 본 거야."
에리히는 대번에 거절했다. 평소 에리히의 성격을 아는 남학생도 두 번 권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난 하나 줘 봐."
에리히는 앞에서 비밀스럽게 속닥거리는 꼴을 보며 쯧쯧 혀를 찼다.
하지만 예상외로 그 우습지도 않은 순정 로맨스 책은 남학생들 사이에 유행처럼 급속도로 번져 나갔다. 어느 남학생이 그 책에 적힌 대로 누구한테 고백했는데 뜻밖에도 반응이 좋아 성공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어느 레이디의 비밀 고백」, 「제국 제일 검의 은밀한 순정」, 「요조숙녀 드봐리는 왜 그 방랑 기사에게만 고기를 먹였을까?」
낯 뜨거운 제목을 가진 온갖 책이 강의실 안에 떠돌아다녔다. 에리히는 저런 것이 남학생들 사이에서 연애 교본 비슷하게 취급받는 것을 보고 기가 차서 헛웃음을 지었다.
"에리히, 그러지 말고 너도 하나 보라니까? 이거 효과 은근히 좋아!"
지난번 에리히가 책을 거부한 이후로 넉살 좋게 친한 척을 하기 시작한 남학생이 또다시 달라붙어 왔다. 이름이 제이 킴벌슨이라고 했던가.
"필요 없다니까."
"에이, 너도 한 번 보고 나면 마음이 바뀔걸?"
에리히의 짜증 섞인 반응에도 그는 눈살 한 번 찌푸리지 않고 시종일관 귀찮게 굴었다.
그리고 대망의 방학식 날, 에른스트로 돌아온 에리히는 가방 속에서 정체불명의 책 한 권을 발견하게 되었다.
「도련님의 아찔하고 위험한 교육.」
"하?"
에리히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책의 제목만 봐도 이것이 누구의 소행인지 뻔히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남의 가방에 이딴 책은 또 언제 넣어둔 거야?
"왈왈!"
그때, 열린 문 사이로 페니가 달려 들어왔다.
"페니."
"멍멍!"
"왜 그래, 산책하러 가고 싶어? 지금 같이 나갈까?"
에리히는 금색 털의 강아지를 안고 둥기둥기하며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 에리히의 모습을 아는 학술원의 학생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보면 믿지 못해 입을 쩍 벌렸을 일이었다.
"에리히!"
그때, 문가에서 이번에는 하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리히는 흠칫 놀라 무릎 위에 뒀던 책을 침대 밑으로 잽싸게 던져 넣었다.
"페니, 거기에 있어?"
"그런데, 왜?"
"아니, 오늘은 네가 페니 산책시켜 줘. 너랑 같이 가고 싶은가 봐."
다행히 하리는 그의 수상한 행동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왜, 너도 같이 가."
"응? 나랑 같이 산책하러 가고 싶어?"
"무슨! 그게 아니라 난, 네가 같이 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쳐다봐서 말해본 거야!"
"그래그래, 네가 정 그렇게 원한다면 나도 같이 가주지 뭐."
"아니라니까!"
에리히는 페니를 데리고 하리와 함께 방을 나섰다. 그리고 그 후, 방학이 끝나 다시 학술원으로 돌아가게 될 때까지 침대 밑에 놔둔 책에 대해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