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그 오빠들을 조심해 85화
"묘하네. 양의 분위기가 왜인지 지금까지와 조금 달라진 것 같아."
그는 무언가를 가늠하듯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까지 비스듬히 기울였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어렴풋이 웃었다.
다이스가 지금 내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차를 한 모금 마셔 목을 축인 뒤 나는 말했다.
"이제 아리나가 되려는 걸 그만두려고요."
내 말이 뜻밖이었는지 마주한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그는 한순간 내 입에서 나온 '아리나'가 누구인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곧 무언가를 깨달은 듯 '헤' 입을 벌렸다.
"생각해 보면 그동안 저는 무의식중에 그녀처럼 행동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아요."
그러자 다이스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양은 그녀를 직접 본 적이 한 번도 없잖아. 이런 말 좀 그렇지만, 아마 그대의 오빠들도 그녀를 잘 기억하지 못할 것 같은데."
"네, 제가 바보라서 그랬나 봐요."
실질적으로 아무도 내게 그런 것을 억지로 강요한 적이 없었다. 내게서 아리나의 모습을 봐서 데려왔다는 죽은 에른스트 부부조차 빈말로라도 '아리나처럼 행동하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 갈수록,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날수록 내 안에서는 죽은 아리나가 천천히 되살아났던 것 같다.
"언젠가부터 어떤 행동이나 말을 하기에 앞서 만약 이 나이의 그녀였다면 어땠을까,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나는 다른 귀부인들과 영애들을 흉내 내고 그들처럼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사실 내가 가장 닮고 싶었던 건 그들이 아니었다.
"그러는 동안 초상화에서 봤던 그녀도 제 안에서 저와 함께 나이를 먹어 갔어요."
내가 진짜 아리나 에른스트로 태어났다면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도 가끔 들었다.
"그러니 저는 그동안 어떤 의미로 상상 속의 아리나를 흉내 내 행동했던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나는 아직까지 따뜻한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설핏 웃었다.
물론 그건 예전의 이야기이고,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 하리 에른스트죠. 그건 변하지 않는 거예요."
그리고 지금의 나는 내가 '하리 에른스트'인 것이 좋았다.
"이제 저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요."
만약 예전의 나였다면 이런 생각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27살의 하리 에른스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이루는 어느 중요한 부분이 크게 변한 느낌이었다.
"양은 용감한 사람이네."
조용히 내 이야기를 듣던 다이스가 문득 입을 열어 그렇게 말했다.
"용기를 낼 수 있게 해준 사람 중 한 분이 전하세요."
"내가?"
"네. 예전의 제가 어떻든 간에 지금의 저는 에른스트라고 전하께서 말씀해 주셨잖아요."
"고작 그런 말로. 내 덕이 아니야. 그저 양이 스스로 변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 거지."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런 다이스의 얼굴은 약간 씁쓸해 보였다. 물론 그것은 아주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잔상이라 내가 정확히 보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곧 다이스가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웃으며 우스갯소리를 던졌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양은 내 생각보다도 멋진 사람인 것 같아. 진짜 결혼할까?"
"그 농담 재미없어요."
"그래, 사실 나도 양의 오빠들이 내 형님이 되는 건 좀."
우리는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며 얼마간 담소를 나누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봄은 금방 찾아왔다.
내가 바깥에 내놓았던 해먹 의자는 어째서인지 카벨의 차지가 되었다.
"와, 이거 진짜 편해! 내가 가질래, 내가!"
분명 편하기는 하지만 저 위에 올라가 있으면 다들 나를 너무 걱정하는 눈초리로 쳐다보는 데다, 결정적으로 겨울에는 춥기도 해서 나는 언젠가부터 저 의자에 접근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방방거리는 카벨에게 그냥 선심 쓰는 척하며 의자를 떠넘겨 버렸다. 물론 카벨은 그런 내 속내도 모르고 그저 좋다고 히죽거렸다.
둘째 진상은 추위도 안 타서 그런지 겨우내 저 해먹 의자를 질리도록 애용했다. 얼기설기 얽힌 천 위에 몸을 돌돌 말고 낮잠을 자는 카벨은 꼭 고치 속에 들어 있는 애벌레 같았다.
"커어어어!"
······물론 코 고는 소리는 잠자는 불곰 수준이었지만.
봄이 되면서 에리히는 짧은 방학을 마치고 다시 학술원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놈이 느닷없이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해서 겨울 동안 얼마나 골치가 아팠는지 모른다.
학술원에서는 이미 자기가 배울 게 없다나 뭐라나. 이게 무슨 카벨 같은 소리라지요? 학술원에서 네가 배울 게 왜 없어! 무슨 네가 불세출의 천재라도 된단 말이냐?
이제 졸업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그동안 재학했던 시간이 아깝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호, 혹시 이게 그건가? 청소년의 아이들에게 한 번씩 찾아온다는 반항기!
크흑, 다른 사람들이 에리히와 나를 보는 눈빛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맞는 것 같다. 나도 겨울 동안 한 짓들이 있는지라 우리를 쌍으로 요주의 인물 취급하는 시선들에 남몰래 식은땀을 흘려야만 했다.
그래도 방학 때 했던 말들이 아주 진심은 아니었는지 봄이 되어 에리히가 다시 학술원으로 돌아가서 다행이었다.
"페니!"
그리고 다시금 한가로워진 어느 날.
나는 페니를 찾아 저택 곳곳을 누비고 있었다. 당연히 집 안 어딘가에 있을 줄 알았던 페니가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정원으로 놀러 나갔나? 내가 산책 데리고 나가려고 했는데.
복도를 지나가던 사용인에게 물어보니 위층에서 페니를 본 것 같다고 해서 나는 계단을 올라갔다.
"페니!"
"왈!"
앗, 그런데 별안간 복도의 끝에서 강아지 짖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에리히의 방 쪽인 것 같은데?
나는 페니의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문이 열린 에리히의 방에서 금색 털의 강아지를 발견했다.
"페니, 여기 있었구나!"
찾았다, 요놈!
"멍멍!"
헉, 그런데 분명 에리히의 방문은 닫혀 있었을 텐데 어떻게 이 안으로 들어온 거지? 설마 페니가 직접 문을 열고 들어온 건가?
슬쩍 문고리의 높이를 확인해 보니 페니가 직립보행을 하면 충분히 앞발로 잡아당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구구, 우리 페니, 똑똑하기도 하지."
게다가 페니는 예전부터 아주 영특한 강아지였기 때문에 그렇다 해도 납득이 되었다.
"에리히가 보고 싶어서 여기 온 거야?"
"왈!"
그래그래, 방학 때는 매일 에리히랑 붙어 있다가 이제는 또 떨어져 있게 되었으니 허전할 만도 하지.
나는 에리히의 슬리퍼를 물어뜯고 노는 페니의 털을 쓰다듬다가 문득 탁자 위에 올려진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전에 내가 에리히에게 주었던 검은 안경이었다.
자식, 저 안경을 엄청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더니 방에 두고 갔네. 역시 학술원에서 쓰기는 좀 그런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로 향했다. 그리고 검은 광택을 내는 안경을 오랜만에 슬쩍 착용해 보았다.
그 후 앞에 있는 거울을 보니 내 모습이 퍽 만족스러웠다.
쓰읍, 조만간 영애들을 보러 갈 일이 있는데 그때 쓸까? 이러니까 나도 좀 세 보이지 않아? 이러고 가면 아무도 날 만만하게 못 볼 것 같은데?
나는 한참 심취해서 다각도로 내 모습을 살피며 의기양양하게 중얼거렸다.
"이러니까 나도 한 카리스마 하는데?"
"그런 게 요즘 새로운 유행인가?"
"악, 깜짝이야!"
그러다 문득 옆쪽에서 새어드는 목소리에 나는 비명을 내질렀다.
화들짝 놀라서 홱 고개를 돌리자 문가에 서 있는 유진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팔짱까지 끼고 벽에 살짝 기대 있는 걸 보니 지금 바로 온 건 아닌 것 같은데, 도대체 언제부터 저기에 서 있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밖에서 그런 걸 쓰고 다니는 사람은 아직 한 명도 못 본 것 같은데. 확실히 인상적이기는 하네."
으악, 창피해!
나는 유진에게 한참 심취해서 '안경 쇼'를 하는 모습을 들킨 것이 민망해 괜히 언성을 높였다.
"와, 왔으면 말을 하지 왜 그렇게 서서 보고 있어?!"
"그러려고 했는데, 꽤 즐거워 보이길래."
나를 보는 유진의 눈빛이 상당히 오묘했다.
이, 이건 뭔가······ 지난번 '간과 쓸개' 발언에서 카벨이 보였던 반응하고 비슷하잖아? '그동안 미처 몰랐던 내 여동생의 취향 2탄'인가요? 어흑, 아니야, 난 그런 게 아니야!
"오빠도 써 봐!"
에잇, 나만 굴욕을 당할 수는 없다!
나는 유진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그의 얼굴에 안경을 씌웠다. 그리고 곧바로 실망했다.
어······ 왜 굴욕이 없지? 좀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기대했는데 검은 안경을 쓴 유진은 조금도 우스워 보이지 않았다. 안경을 장착함으로써 카리스마를 한결 더한 유진이 나를 보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에이, 나 안 해, 안 해.
나는 김이 새서 다시 그의 얼굴에 있는 안경을 벗겼다.
"아직 유행은 아니지만 이제 곧 유행이 될 거다, 뭐."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는 무슨. 그냥 근거 없는 패기입니다. 크흑.
"그래, 네 마음에 들면 되는 거지."
유진은 언제나처럼 '네가 하고 싶은 건 다 해' 하듯이 말했다. 어쩌면 내가 삐진 것 같으니까 달래려고 그러는 것 같기도 했다.
"페니 산책시키려고 하는데 오빠도 같이 갈래?"
"난 지금 나가 봐야 돼."
"그럼 잠깐만."
나는 유진을 배웅하기 전에 들고 있는 안경을 원래 있던 곳으로 먼저 되돌려 놓으려고 몸을 돌렸다.
음? 그런데 탁자 위에 있는 책 한 권이 갑자기 눈에 띄었다. 아까는 안경에 관심이 쏠려서 미처 인식하지 못했었는데.
그런데 책 표지가 굉장히 소녀답고 화려했다. 어, 에리히가 이런 책을 다 본단 말이야?
나는 무심코 책을 들어 올린 뒤 곧바로 흠칫했다.
「도련님의 아찔하고 위험한 교육.」
으, 으아닛?! 이 요망한 책 제목은 뭐야?! 도련님의 아찔하고 위험한 교육?
가만히 보니 책 표지에는 한 쌍의 남녀가 그려져 있었다. 그다지 정교한 그림이 아니어서 인물의 실루엣만 보일 뿐이었지만 그림 속의 여자는 하녀복을 입고 있는 것 같았다. 과연, 그래서 제목에 도련님이란 단어가 들어가는 건가?
그, 그런데 그냥 기분 탓인 걸까? 왜인지 여자가 입고 있는 하녀복이 꽤 파격적인 것처럼 보였다. 왜 치마가 허벅지에서 동강이 나 있는 거지? 남사스럽게!
게다가 옷의 사이즈도 작은지 그림 속 여자의 몸매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부각되어 보였다. 이런 비효율적인 하녀복을 보았나?
그리고 이 관능적인 장미꽃 배경은 또 뭐며! 그것만으로도 수상함이 넘치는데 심지어 표지에는 부제목까지 달려 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뜨겁고도 달콤한 손길로 알려 주세요!」
"그게 뭐야?"
유진이 묻는 순간 나는 화들짝 놀라서 반사적으로 책을 뒤로 감추었다.
으, 으아! 나도 모르게 숨겼잖아!
하지만 이걸 유진에게 보일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건 그거잖아! 혈기 왕성한 소년 소녀들이 어른들 몰래 보는 빨강빨강한 책! 아니, 꼭 소년 소녀들이 아니라 다 큰 성인들도 남의 이목을 피해 몰래 구입해 본다는 살색이 난무한 바로 그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