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그 오빠들을 조심해 84화
"쉬고 있을 것 같아서 부르지 않았어."
유진이 나를 보고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무릎 위로 내렸다. 나는 방 안으로 들어서며 그에게 물었다.
"표정이 밝지가 않네? 일이 잘 안 풀려?"
"아니.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조금 피곤해서 그래."
지난번의 일 이후에도 유진과 나는 평소와 같은 태도로 서로를 대했다. 일단 겉보기에 우리의 관계는 지금까지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래도 기분 탓인지 심리적인 거리감은 전보다 좁아진 것처럼 느껴졌다.
"혹시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뭐든 말해줘."
물론 내가 유진이 하는 일을 직접적으로 도울 수는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밖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지 해주고 싶었다.
그러자 잠시 동안 말없이 내 얼굴을 보던 유진이 마침내 작게 입술을 뗐다.
"그럼 이리 와서 안아줘."
순간 '내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그는 방금 전 무슨 말을 했냐는 듯이 표정 변화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진이 팔을 들어 올려 양쪽으로 벌리기까지 하자, 나는 그의 말이 진심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귀를 의심하는 나를 보고 유진이 왜 그러냐는 듯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왜? 원래도 가끔 그런 적 있었잖아."
나는 내심 당황스러웠지만 유진은 아주 태연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과연 그의 말처럼 그동안 몇 번인가 내가 먼저 그를 안아주었던 적이 있었다. 라벤더 코르디스를 만나고 왔던 바로 얼마 전에도 그랬고······. 하지만 정작 그것을 유진에게 요구당하자 몹시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나를 재촉하듯 응시하는 그를 보니 왜인지 지금 망설이고 있는 내가 오히려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혼란스러운 상태로 주춤거리며 유진에게 다가갔다. 왜인지 지금 상황이 이상해서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지만, 앞에 있는 사람이 더없이 차분한 얼굴로 나를 기다리고 있어서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저기······."
그런데 또 유진과 막상 거리가 좁혀지자 뭔가 어색한 기분이 들어서 머뭇거리게 되었다. 하지만 깊은 생각을 할 새도 없이 유진이 그의 앞에 선 내 손목을 잡아당겼다.
"으앗! 자, 잠깐만······!"
바로 다음 순간 내 입에서 새된 음성이 터져 나왔다. 나는 파드득 몸을 떨며 소스라쳤다. 왜냐하면 내가 유진의 무릎에 앉은 모양새가 되었기 때문이다!
왜, 왜 이런 자세가 된 거지? 나는 기껏해야 앉아 있는 유진을 가볍게 한 번 포옹해 주고 마는 걸 생각했는데!
"괜찮아. 가만히 있어."
내가 펄쩍 뛰면서 다시 일어나려고 버둥거렸지만, 유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귓가에 속삭여지는 말에 나는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괜찮지 않아! 괜찮지 않아요!
하지만 따뜻한 온기에 몸이 둘러싸이는 순간 나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끼며 굳어버렸다.
유진은 단단한 팔로 내 허리를 조였고, 내 등을 당겨서 맞닿은 몸을 한결 더 밀착하게 만들었다. 나는 유진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로 숨을 멈추었다.
얕은 숨결이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평소 유진에게서 은은히 배어 나오던 청량한 향기가 그 어느 때보다 가까이에서 후각을 자극했다. 빈틈없이 맞붙은 몸에서 나보다 약간 높은 체온이 전해져 왔다.
이건 진짜 이상했다. 조금이 아니라 많이. 게다가 일단 이건 내가 안아주는 게 아니라, 꼭 유진에게 안긴 것 같잖아. 그리고 뭔가, 뭔가······.
나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유진을 밀어 그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분명 유진도 내 의사를 알아차렸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어째서인지 내 몸을 감싸고 있는 팔이 한결 더 단단해졌다.
"오, 오빠?"
내가 부르는데도 유진은 오히려 내 목덜미 위로 고개를 더 깊숙이 파묻기까지 했다.
"그, 그, 그만 놔줬으면 좋겠는데요."
나도 모르게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지금의 나는 심하게 당황하고 있었다.
"싫은데."
그런데 유진이 내 부탁을 거절했다. 나는 설마 그가 이렇게 대답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방금 전보다 더욱 당황했다.
"왜······."
"아직 부족한 것 같아."
바로 지척에서 울리는 목소리 때문에 귀가 간지러웠다.
나는 죽을 맛이었다. 심장이 아까부터 쉬지 않고 쿵쾅쿵쾅 뛰어서 유진에게까지 다 들릴 것 같았다. 그에게 내 동요를 들킬 것 같아서 숨조차 크게 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유진은 그런 내 속도 모르고 여전히 나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
"그러지 말고 놔줘······."
"너도 내가 놔달라고 할 때 놔주지 않았잖아."
앗, 그 순간 혹시 이건 예전 일의 복수인가 싶어졌다.
이상해. 진짜 이상해.
원래의 유진이라면 오히려 내가 끌어안으려고 해도 먼저 피했을 텐데.
"이렇게 한 번씩 안아주는 거,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아."
문득 그의 손이 내 뒷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응, 예전에는 미처 몰랐는데 나쁘지 않아."
내 곤혹스러움을 안다는 듯이 나긋하게 흘러나온 음성이 마치 나를 달래는 듯했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몹시 다정했다. 이렇게 안겨 있어서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왜인지 지금 그가 짓고 있는 표정도 그럴 것 같았다.
어라, 왜인지 유진에게 무척 예쁨받는 것 같은 느낌이라 기분이 묘했다.
이렇게 그에게 손길을 받으며 안겨 있으려니, 어째서인지 몸이 노곤해지면서 서서히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지금의 상황이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아무려면 어때' 하는 생각이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런 편안한 기분은 오래 가지 않았다.
기분 탓일까? 정확히 언제인지 알지 못할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나를 다독이는 손길이 약간 변한 것 같았다.
뒷덜미와 등을 훑어 내리는 움직임이 어쩐지 내 감각을 예민하게 파고들었다. 그와 동시에 유진과 나를 둘러싼 공기의 온도도 서서히 변했다. 방금 전보다 농도 짙은 침묵 속에서 나는 혼란과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똑똑.
"형, 여기 있어?"
그 순간 저 멀리 날아가 있던 정신이 돌아왔다.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에리히의 것이었다. 내가 움찔하자 유진이 달래듯이 내 귀에 대고 '쉬이' 소리 내며 부드럽게 등을 토닥였다.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허리에 둘린 팔이 풀리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
아까 이 방에 들어올 때 내가 문을 잠갔던가? 그럴 리가 없었다.
나는 당장에라도 에리히가 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아서 긴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우리의 자세가 조금······ 아니, 좀 많이 묘하잖아?
유진은 이대로 방에 없는 척해 에리히를 돌려보낼 생각인 듯 밖에서 들려오는 부름에 대답하지 않았다.
"형? 방에 없어?"
그래도 내가 계속 안절부절못하며 몸을 비틀자 유진이 봐준다는 듯이 나를 풀어줬다.
나는 재빨리 그의 무릎에서 일어나 뒤로 물러나다가 탁자에 몸을 부딪치고 말았다. 안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밖에 있던 에리히가 다시 한번 '형?' 하고 유진을 불렀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나와 달리 유진은 차분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그가 문을 열자 곧바로 의문 어린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어, 뭐야. 방에 있었네? 그런데 왜 대답 안 했어?"
"급하게 처리해야 할 서류가 있어서 집중하느라 못 들었어. 왜?"
"아니, 하리가 안 보여서 혹시 같이 있나 하고. 휴버트가 형 방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던데?"
내가 서 있는 곳에서는 에리히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의 입에서 나온 내 이름에 흠칫했다.
"아니, 여기에는 없어. 피아노 방이나, 온실은 찾아봤어?"
"아, 온실에는 안 가봤는데 거기에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럼 형은 하던 일 마저 해. 방해해서 미안."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곧 유진이 문을 닫고 뒤돌아섰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그에게 말했다.
"나도 그만 나가볼게."
하지만 유진은 문 쪽을 힐끔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에리히가 지금 막 갔어. 조금 기다렸다가 나가는 게 좋을걸."
나를 향해 다가오는 유진을 피해 뒷걸음질 치려고 했지만 내 발보다 그의 손이 더 빨랐다.
방금까지 그의 가슴팍에 문질러져서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느린 손길이 내려앉았다.
"그냥······."
그런데 조금 전의 일 때문인지 나는 자꾸만 괜스레 그의 손길이 평소와 다른 것처럼 느껴져서······.
"그냥 지금 나갈래."
결국 달아나듯이 유진에게서 벗어나 방을 나서고 말았다.
문을 나서기 직전, 나는 고개를 돌려 유진을 시야에 담았다. 그는 새까만 눈동자로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양 귀가 홧홧해져서 급히 문을 닫고 나왔다. 그리고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내 방까지 뛰어갔다.
***
타앙!
날카로운 총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서서히 풍겨 오는 탄약 냄새를 느끼며 나는 시선을 움직였다.
바스락.
잠시 후 동물을 몰던 시종이 나무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곧 그가 팔을 들어 X자를 그리는 것을 본 다이스가 끄응 신음했다.
"집중이 잘 안 되시나 봐요?"
"음, 오늘은 날이 아닌가 보네."
내 조심스러운 물음에 수긍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다이스는 평소 백발백중까지는 아니어도 꽤 적중률 높은 사격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그는 단 한 번도 목표물을 맞히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다이스가 자신이 들고 있던 총을 나한테 내밀었다.
"양도 한번 해볼래?"
"송구합니다. 전 작은 동물들이 다치는 상상만 해도 견딜 수 없이 가여운 마음이 들어서요. 아시다시피 제 마음이 좀 여리고 곱잖아요."
하지만 나는 그것을 받아 드는 대신 고개를 저으며 수심에 젖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물론 다이스는 내 노골적인 연기를 어렵지 않게 간파할 터였다.
과연 그는 내 뻔뻔한 소리에 약간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팔을 내렸다.
"양도 참 알면 알수록 첫인상과 많이 달라?"
"제가 좀 보면 볼수록 새로운 매력이 있답니다."
"······."
내 잔망스러운 대답에 다이스가 침묵했다.
"음, 기분 탓인지 양이 점점 카벨 경을 닮아가는 것 같······ 아, 아니야. 내가 실언을 했어."
그 뒤 이어지는 말에 내가 서서히 웃음기를 잃어 가자 다이스가 흠칫하며 금방 취소했다. 자기가 생각해도 카벨과 닮았다는 말은 너무 지나치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크, 크흑. 우리 집 둘째 진상의 취급이 너무나 하찮은 것. 다이스의 말에 무심코 차게 식은 표정을 짓고 만 나도 나지만, 저렇게 미안함을 온몸으로 표출하고 있는 다이스도 참······.
"이제 그만 쉬시는 게 어떨까요?"
나는 꽁꽁 얼어붙은 다이스의 손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으로 가지."
다이스가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에게 기다란 사냥총을 넘기자 이번에는 궁인이 다가와 그에게 가죽 장갑을 건네주었다. 다이스는 그것을 손에 끼며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오늘은 날씨가 포근하네."
"예년에 비해 올겨울은 확실히 따뜻한 편인 것 같아요."
나는 다이스와 함께 사냥터 한쪽에 마련된 휴식처로 향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그와 마주하게 되었을 때, 다이스가 모락모락 하얀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앞에 두고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