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
그 오빠들을 조심해 83화
23. 익숙한 사람과의 익숙하지 않은
"여어, 어서 와."
나는 막 마차에서 내려 내 앞으로 걸어오는 에리히를 보며 인사하듯 손을 슬쩍 들어 올려 보였다.
"너······."
나를 본 그의 눈이 대번에 동그랗게 떠졌다. 그는 눈을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뭐 잘못 먹었어?"
"아니."
"그럼 지금 시위해? 형이랑 싸우기라도 했어?"
"그럴 리가."
"그럼 때늦은 반항기야?"
그는 내 불량한 태도에 적잖이 감명을 받은 얼굴이었다.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지금의 나는 1층의 현관 옆에 해먹 의자를 놓고 그 위에 나무늘보처럼 누워 일광욕을 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얼마 전 루이제와 함께 외출했을 때 구매한 알이 검은 안경까지 쓰고 있었다. 이걸 쓰면 햇빛의 눈부심을 방지해 준다나 뭐라나.
확실히 눈부심이 덜하기는 했지만 그 효과를 백 퍼센트 믿고 구매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걸 착용하고 있으니 제법 멋이 나는 것 같아서 흡족했다.
왠지 이걸 쓰면 눈이 가려져서 표정이 보이지 않으니까 좀 더 도도해 보이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평소보다 기가 좀 세 보이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난 이제껏 날 구속하고 있던 이 억압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유로워졌어! 자, 너도 나와 함께 이 새로운 세상의 야생 청소년이 되어보지 않겠니?"
내 권유에 에리히가 쯧쯧 혀를 찼다.
"카벨 형한테 옮았네, 옮았어."
그는 나의 일탈이 둘째 진상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앗, 잠깐. 그런데 지금의 내가 카벨하고 닮았단 말이야?! 큭, 그건 왠지 좀 굴욕적인데?
"아니야, 내 눈을 바라봐! 넌 행복해지고 웃을 수 있어!"
"이건 또 뭐야."
"앗, 내 눈!"
갑자기 나한테 다가온 에리히가 내 눈에 쓰여 있던 안경을 벗겼다. 그러는 바람에 지금껏 차단되었던 빛이 갑자기 시야로 몰려들어서 나는 눈부심에 몸서리쳐야만 했다.
"아, 갑자기 뺏어 가면 어떡해?"
"오랜만에 집에 왔는데 네가 이상한 짓을 하니까 그러잖아."
에리히는 내 얼굴에서 벗겨 낸 안경을 찡그린 눈으로 요리조리 살펴보다가 직접 써보기까지 했다. 이렇게 새까만 알을 가진 안경은 처음 봐서 그런지 신기한 모양이었다.
에이, 나는 김이 새 버렸다. 사람이 장난을 치면 좀 어울려 주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에이, 재미없는 놈.
"그거 잘 어울리네. 그냥 너 가져라."
나는 에리히를 일탈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일을 포기했다. 아무래도 햇빛 차단용 안경을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라 나는 그냥 그것을 에리히에게 주기로 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래?"
에리히가 해먹 의자에 거의 엎어져 건들건들 팔을 밑으로 흔드는 나를 보며 눈썹을 슬쩍 추어올렸다. 안경의 검은색 알 때문에 눈이 가려져 정확한 표정은 읽을 수 없었지만 나를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만큼은 알 것 같았다.
"그냥 좀 이제부터는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볼까 싶어서."
밖에서 일하는 정원사 아저씨나 건물 안쪽의 복도를 오가는 사용인들도 유리창 너머로 계속 나를 힐끔거렸다. 휴버트는 그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다.
에리히는 내 말을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뭐, 그래도 상관없었다.
"우리 눈싸움할래?"
내 뜬금없는 말에 에리히가 이번에는 귀를 의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무슨 눈싸움이야?"
"너 학술원에서 친구들하고 눈싸움 안 해?"
"애도 아니고. 유치하게 그딴 걸 왜 해?"
"그으래?"
나는 해먹 의자에서 내려섰다. 아무리 일광욕이 목적이라 해도 날이 추워서 옷을 두껍게 껴입었기 때문에 약간 뒤뚱거리며 내려와야 했다.
"살찐 토끼나 오리 같네."
에리히가 그런 나를 비웃었다.
크흑, 하지만 휴버트랑 다른 사용인들이 감기에 걸리면 안 된다고 나를 밖에 내보내 주려 하지 않았단 말이야! 이렇게라도 꽁꽁 껴입지 않았으면 아마 오늘이 다 가도록 내 해먹 의자와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에리히."
나는 완전히 밑으로 내려서서 에리히를 향해 방긋 웃어주었다.
"눈싸움하기 싫으면 넌 그냥 맞기만 해."
에리히가 무언가를 느낀 듯 흠칫했으나 내가 더 빨랐다. 나는 잽싸게 의자 밑에 숨겨 놓은 동그란 눈덩이를 집어 에리히에게 던졌다.
퍼억!
얍, 받아라! 내가 이 순간을 위해 아까 야무진 손으로 정성을 다해 꾹꾹 눌러 만든 눈덩이시다!
"야, 너 반칙······!"
퍼억! 퍽!
내가 눈 뭉치를 미리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을 알고 에리히는 기가 막힌 눈치였다. 자신의 의사 따위에는 상관없이 내가 기어코 눈싸움할 마음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황당한 것 같기도 했다.
훗, 내가 바로 이 구역의 답정너이시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넌 대답만 하면 돼!
"이거 완전 사기 아니야? 내가 오자마자 이럴 생각이었던 거네?"
"헤헤, 아직 멀었거든?"
"그놈의 눈 뭉치는 도대체 몇 개나 만들어 둔 거야?!"
처음에는 그냥 맞아만 주던 에리히도 눈 폭탄의 끝이 보이지 않자 슬슬 약이 오르는 듯했다.
휘익!
곧 그가 반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나는 에리히가 던지는 눈을 날쌔게 피했다.
흐헹, 내가 이래 봬도 어릴 때의 별명이 멜팅턴의 날다람쥐였죠! 네 그 솜뭉치 같은 눈덩이가 날 맞출 수 있을 것 같냐?
"아하하, 바보! 내가 맞을 줄 알았······ 으악!"
퍼억!
하지만 첫 번째 것은 눈속임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곧바로 연달아 날아오는 눈덩이에 맞아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야, 잠깐만······."
"잠깐만은 무슨."
퍽, 퍼억!
에리히는 내가 '잠깐!'을 외치든 말든 나한테 마구 눈을 던져 댔다. 나도 덩달아 쉬지 않고 팔을 놀려서 어느새 우리의 주위는 흩날리는 새하얀 눈으로 자욱해졌다.
"헉헉······ 제법인데?"
"헉, 허억······ 너도 꽤 하는데?"
그리고 마침내 안개처럼 깔린 눈이 서서히 가라앉을 무렵, 우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서로를 향해 훗 미소 지었다. 그런 에리히와 나 사이에 파지직 번개가 튀었다. 이렇게 서로를 향해 호승심을 불태우는 것은 거의 10년 전 이후로 처음이었다.
"휴전?"
"휴전."
우리는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동의했다.
아구구, 삭신이야. 오랜만에 격한 운동을 했더니 팔다리가 삐거덕거리네.
나는 에리히의 시선을 피해 몰래 손을 움직였다.
"야, 너 자꾸 반칙할래?"
"으앗!"
바로 그때, 내가 슬그머니 눈을 뭉치고 있는 것을 본 에리히가 먼저 선수를 쳤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내 눈앞에 뿌려진 눈을 피하며 소리쳤다.
"뭐야, 너도 반칙이야! 휴전하기로 했잖아!"
"휴전은 무슨."
두다다다!
피 터지는 눈싸움의 2막이 올랐다. 우리는 18살이 아니라 8살짜리 애들이라도 된 것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서로에게 눈을 날려 댔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까보다 빨리 뻗어버렸다.
"헉, 헉······ 너 정말 독하다."
"헉······ 피차일반이네요."
우리 둘 다 더 이상 눈 뭉치를 던질 힘이 없는 와중에도 입만큼은 착실히 놀려 대고 있었다.
아이고, 그래도 1차전까지는 괜찮았는데 연달아 두 번이나 이 짓을 했더니 힘들어 죽겠다.
"너 때문에 옷이 완전히 눈투성이 됐잖아."
"보기 좋은데 뭐."
나는 투덜거리는 에리히를 향해 킥킥 웃었다.
처음 생각과 달리 너무 진심이 되어버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해보는 눈싸움이 꽤 재미있었다.
"3차전 할까?"
"아, 못 해, 못 해. 배 째."
"어어, 지금 항복하는 거야? 그럼 내가 이기는 건데?"
"네 마음대로 해."
에리히의 표정이 꼭 '이 독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그의 얼굴을 보고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그만 들어가자."
우리는 언제 격정의 눈싸움을 벌였냐는 양 사이좋게 옷에 붙은 눈가루를 털고 걸음을 옮겼다.
"카벨 오빠는 오늘 야간 보초 선대."
"2기사단이 그런 걸 왜 해?"
"몰라, 신입은 원래 다 해야 하는 거라던데."
"신입한테 텃세 부리나?"
"뭐, 그렇다 해도 카벨 오빠가 그런 데 당할 위인이야?"
"그건 그래."
에리히와 나는 카벨이 알면 서운해할 정도로 그에 대한 걱정을 하나도 하지 않으며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끙, 하지만 이건 매우 타당한 생각이라고.
"따뜻한 차라도 내오라고 할까요?"
우리가 실내로 들어가자마자 휴버트가 물어왔다.
"그럼 코코아 두 잔으로요."
"무슨 코코아야, 애도 아니고."
"원래 눈싸움하고 나면 코코아를 먹어야 하는 거야!"
이 당연한 법칙을 모르다니!
나는 에리히가 황당해하거나 말거나 1인 1 코코아를 주장하며 에리히를 끌고 벽난로 앞으로 갔다. 휴버트는 티격태격하는 우리를 오랜만에 푸근한 미소를 지은 채 보다가 자리를 떠났다.
"그러고 보니까 그 기사는 어디 있어? 안 보이네?"
그런데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에리히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묻는 것이었다. 항상 내 옆에 붙어 있던 에단이 보이지 않으니 의아한 모양이었다.
"오늘 휴일이야."
"휴일? 그런 것도 있었어?"
"이제부터 생겼어. 일주일에 하루."
"뭐야, 그 자식. 완전히 근무 태만이잖아?"
"오히려 지금까지 너무 부려 먹었던 거지!"
크으, 옆 나라에서는 주 5일 근무가 보편화되었다고 하던데 아를란타에도 새로운 제도의 도입이 시급합니다!
"어쨌든 안 보이니까 좋네."
에리히가 벽난로에 장작을 하나 던져 넣으며 말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마치 앓던 이가 빠져 후련하다는 듯한 표정이 걸려 있었다. 그걸 보고 나는 쯧쯧 혀를 찼다.
"넌 예전부터 왜 이렇게 에단 경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재수 없잖아."
"아니, 뭐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이거 웃긴 놈이로세? 에단처럼 성실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 또 어디에 있다고.
그런데 그때, 갑자기 에리히가 홱 뒤돌아서 나를 보았다. 그는 생각 없이 지나쳤던 무언가를 갑자기 깨달은 것처럼 와락 얼굴을 구겼다.
"잠깐. 그런데 뭐야. 너, 지금 그 자식을 이름으로 부른 거야?"
"같이 지낸 지 1년이 넘었는데 그럴 때도 되었지."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오히려 이제 와서야 호칭으로 성을 떼고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게 늦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에리히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호위 기사랑 너무 격 없이 지내는 거 아니야? 그냥 성으로 불러, 성으로. 비숍이라는 나름대로 쓸 만한 성이 있는데 뭐하러 이름을 부르고 난리야."
아오, 또 시작이네. 나는 에리히의 말을 흘려 들으며 대강 '네네네' 대답했다.
"대충 듣지 마!"
"아, 알겠다니까. 앗, 코코아 왔다!"
때마침 하녀가 코코아를 들고 와서 나는 겨우 에리히의 잔소리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
"오빠, 왔으면 말을 하지."
나는 뒤늦게 유진이 온 것을 알고 그의 방으로 찾아갔다.
오늘은 에리히와 함께 페니랑 놀아주는 데 정신이 팔려 그가 귀가한 것도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유진은 이제 막 방에 들어온 것도 아닌지 소파에 앉아 서류로 보이는 정체 모를 종이를 훑어보는 중이었다.
그의 앞에 있는 테이블에는 따끈한 김이 올라오는 찻잔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유진은 요즘 내궁과 외궁을 오가며 바쁜 일상을 보내는 것 같았다.